백과사전이 방 한쪽에 자리 잡은 날부터, 서하의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다.
탐구할 지식이 많다는 것이 더없이 기쁘다는 듯 서하는 언제나 책을 펼쳐 읽었다.
처음에는 그림이 많은 곤충과 동물 편부터 시작했다.
호랑이의 무늬가 개체마다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고, 새들이 대륙을 건너 이동한다는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 하기도 했다.
‘방향을 어떻게 아는 거지? 얘들도 페로몬인가?’
곧바로 다음 장에서 ‘지구 자기장’의 원리를 읽으며 이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는 읽는 동시에 스스로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책 속에서 찾아내는 과정을 즐겼다.
보통 어린아이가 모르는 단어나 개념을 만나면 그 부분을 건너뛰거나 흥미를 잃게 마련인데, 서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그는 즉시 백과사전 속 다른 챕터를 뒤져 그것을 기어이 찾아냈고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고 난 뒤에야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광합성’이라는 단어를 읽은 날은 식물 편을 펼쳐 빛, 엽록체, 에너지 변환 과정을 차례로 추적했다. 하루에 한 챕터를 다 읽을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한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모든 내용을 연결해서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부모의 눈에는 책이 어려워 느리게 읽는 것으로 보였지만 서하는 모든 내용들을 엮어 머릿속에 거대한 지식 지도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서하가 스물아홉 권이나 되는 백과사전 한 질을 다 읽는 데는 2년이 걸렸다.
* * *
“유서하! 학교는 재미있었어?”
일곱 살이 된 서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보내지 않았기에 사회성이 없진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서하는 항상 웃는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응! 애들이랑 축구했어.”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등에 멘 병아리 가방을 내팽개치고 아이 방으로 우다다 달려간다.
서하의 관심은 이제 막 태어난 여동생에게 쏠려있었다.
서하가 손을 씻고 오더니 침대 가에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꼬물거리는 동생 서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귀여워?”
엄마의 물음에 서하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응! 너무 예뻐. 나 정말 서은이한테 잘해줄 거야.”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서은이 얼굴을 찌푸리다가 오빠를 보고 꺄르르 웃는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풍경이다. 미영은 둘째 낳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는 원체 손이 덜 가는 아이였지만 둘째는 달랐다. 여자아이라 그런지 엄마 손에서 떨어지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져라 우는 서은때문에 부부 모두가 항상 수면이 부족했다.
그런 딸이 날이 갈수록 오빠만 보면 빵긋빵긋 웃어주니 엄마로서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었다.
“서은아, 오빠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서하가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작은 서은의 두 손을 잡더니 아이의 눈을 가린다.”
“어디 갔지? 오빠 사라졌다!”
순간 두 손이 번쩍 열리며 해맑게 웃는 오빠의 얼굴이 나타난다.
“까ㅡ꿍!”
서은이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손과 발을 파닥이며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는 동생의 모습에 서하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서은이 ‘또 해줘!’ 라고 말하는 듯 팔을 오빠 쪽으로 쭉 뻗는다.
“좋아, 이번에는 진짜로 사라져 볼게.”
서하가 침대 밑으로 슬쩍 몸을 숨기자 서은이 의아한 듯 좌우를 살펴본다.
“까ㅡ꿍!”
침대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오빠를 보고 서은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잘 놀아주니 오빠라면 끔뻑 죽지.’
미영이 두 아이를 보고 고개를 젓는다.
에너지가 바닥난 자신과 남편은 죽어도 종일 저렇게 놀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참 놀다 지친 아이가 분유를 꿀떡꿀떡 먹더니 잠이 들었다. 그제야 서하는 여동생의 머리를 소중하게 쓰다듬다가 슬쩍 일어나 방으로 향한다.
서하의 방은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구석에 달랑 있던 책장이 어느새 한쪽 벽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서하가 백과사전을 독파하며 특히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수학이었다.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어졌기에 부모에게 부탁해 한두 권씩 늘어난 책들이 갈 곳을 잃자 책장을 늘리게 된 것이다.
책장 앞에 선 서하가 손끝으로 책등을 천천히 훑으며 이동한다. 모두가 자신에게 지식을 얻는 기쁨을 선사해 주었던 멋진 친구들이었다. 손가락이 점차 무겁고 두꺼운 양장본 쪽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검은색 하드커버에 은빛 글씨로 제목이 적힌 책에서 멈추었다.
《Linear Algebra and Its Applications》
선형 대수학과 그 응용.
번역본도 아닌 원서였다.
서하가 능숙하게 페이지를 넘겨 읽던 부분을 찾아낸다. 그리고 곧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 *
“하···. 여기도 이런 부모가 있네.”
충북 도담초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1학년 2반 담임 김윤미가 피곤하다는 듯 안경을 벗고 엄지와 중지로 눈을 매만진다.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윤미가 한숨을 내뱉다 삼킨다.
강남에 있는 유명 초등학교에서 수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다 고향에 내려온 지 불과 석 달이었다.
영어 유치원 입학시험인 4세 고시, 그리고 의대나 과학고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유아들의 수학학원 입학시험인 7세 고시까지.
그곳은 인세의 지옥이었다.
보람과는 거리가 멀었던 시간.
그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늘 불안했고 지쳐있었다. 그리고 결국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공부만 하면 모든 것을 부모가 케어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이다. 그들 중 일부는 빠른 선행으로 형성된 지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남을 멸시하는 파멸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과학고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는 흔치 않다.
덕분에 그녀는 강남 맘들이 가장 선호하는 공립초 교사가 될 수 있었다. 모두의 만류에도 아이들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환멸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부모의 욕망에서 기인한 지적 학대.
일곱 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의미도 모를 방정식 풀이를 반복해 적어 가며 외우는 모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그러다 힘들다고 엉엉 우는 아이를 본 뒤 뚜껑이 열려 학부모와 거하게 싸웠다.
‘결국 이 꼴이지만···.’
문제를 키우기 싫었던 교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근 엔딩. 이제 그런 꼴은 더 이상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유서하.
귀엽게 생긴 아이가 해맑게 잘 웃기까지 해서 부모는 참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을까?
서하의 병아리 가방 안에 담긴 수학의 정석을 보는 순간 윤미는 PTSD가 도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학부모 상담을 요청했고 오늘이 바로 서하의 부모가 오는 날이다.
드르륵.
하교 후 텅 빈 교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갓난아기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잠시만요.”
아기를 달래며 들어선 여자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피부는 햇볕에 조금 그을려 있었고, 머리는 빗질도 제대로 못 한 듯 대충 질끈 묶여 있었다.
하지만 윤미는 그녀의 검은 뿔테 안경과 조신한 태도에서 지적인 면모를 훔쳐볼 수 있었다. 부드럽게 아이를 토닥거리는 그녀의 손길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바빠서 그동안 찾아뵙질 못했네요.”
과하게 허리를 숙이는 학부모가 부담스러워 급히 인사를 받았다.
“아···. 네! 아닙니다! 제가 전화드렸던 이유는···.”
말을 하다 그녀의 옷을 보니 연한 크림색 얼룩이 크게 번져있었다.
분유인지, 아기가 토한 흔적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급히 닦은 자국 주변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피곤한 얼굴, 선한 눈망울, 아이가 무슨 사고라도 친 것일까 걱정하는 듯한 표정. 장사로 바빴던 그녀의 어머니가 학교에 오실 때마다 보여줬던 얼굴이었다.
윤미는 무심코 입술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던 ‘조기 교육 욕심에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의 이미지와 눈앞의 여성이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
“어머님, 제가 어제 서하 가방에서 수학의 정석을 봤거든요. 혹시 그런걸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시나요?”
마음이 조금 풀렸지만 사실은 확인해야 한다. 윤미는 간을 보기보다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뭔가 죄를 지은 듯한 반응이다.
윤미는 자신의 생각이 역시 옳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아이 아빠가 사준 책일 거예요. 서하가 고등학생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해했거든요.”
“네? 학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요?”
“쪼만한 애를 학원에요? 서하는 학원은커녕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싫다고 해서 보내지 않았어요.”
같은 주제로 대화 중인 것이 맞기는 한 걸까?
핀트가 전혀 맞질 않았다.
윤미는 다시 처음부터 이 일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어머님. 그러니까 서하가 그냥 호기심으로 정석을 가지고 다닌다는 거죠? 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은 자주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초등학생이 단테의 신곡 같은 난해한 고전문학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윤미는 자주 보아왔다.
“그건 아닐 거예요. 제가 요즘 둘째 때문에 서하 공부에 신경을 많이 못 썼는데 심심할 때 푼다고 그 책을 챙기는걸 봤거든요.”
심심할 때 푼다고?
초등학교 1학년이 고등학교 이과 수학을?
“그러니까 어머님 말씀은 서하가 독학해서 고등 수학 문제를 푼다는 건가요?”
윤미의 물음에 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는 어릴 때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어요.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한글을 어느새 읽고 계산도 빨랐어요. 그래서 애 아빠랑 상의해서 백과사전을 사줬거든요. 그랬더니 온종일 그것만 보고···. 또 요즘은 자꾸 이책 저책 사달라고 해서 남편이 들어준 거로 알아요.”
“으아아아아앙.”
심각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갑자기 서은이 울기 시작한다.
아이를 달래는 미영을 보며 윤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윤미는 자신이 서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단 서하와 얘기를 해보자.’
부모들은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간 윤미는 오랜만에 과학고 시절 보던 책들을 꺼냈다.
“그립네.”
해석학 입문, 수학의 정석, 대수학, 수학의 아름다움, 기하와 벡터, 수학 올림피아드 기출문제집···.
그때는 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았던 책들인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어있었다.
기숙사 소등 시간이 다가와도 문제 한 줄이 풀리지 않으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덮고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몰래 풀이를 이어가곤 했었다.
‘어디까지 테스트해 볼까?’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독학으로 가능한 한계가 있다.
“일단 중학 과정부터.”
사각사각.
조숙하게 허세 부리는 아이를 탓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성장의 한 과정일 뿐이니.
그러나 당황한 듯 담담히 말하는 서하 엄마의 태도에서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확인만 하자, 확인만.”
삼각 함수까지만 하려 했는데 쓰다 보니 미적분, 기하, 벡터까지 출제하고 말았다. 외워서는 절대 풀 수 없고 개념을 완벽히 이해해야만 풀이가 가능한 고난도 문제들이었다.
무의식이었지만 그녀는 규격 외 천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아주 조그만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서하야!”
수업이 끝난 뒤 요란스럽게 가방을 싸며 집에 갈 준비 만반이던 서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네! 선생님!”
‘저 나이 애들은 왜 평범하게 걸어 다니지 않는 걸까?’
넘치는 에너지가 부러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보면 평범한 초등학생이 확실한데···.
서하의 얼굴 어디에서도 학대당하는 아이 특유의 어두운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행학습을 미리 끝낸 학생들이 종종 내비치는 잘난 척도 없다. 덧셈, 뺄셈시간에도 여느 아이들처럼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받아쓰기도 성실하게 한다.
물론 이는 수업 중에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미영과 철호의 거듭된 당부 때문이었지만 윤미가 이를 알 방법은 없었다.
“오늘도 가방에 어려운 책 가져왔니?”
윤미의 질문에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쉬는 시간에 보려구요. 애들이 요즘 덥다고 축구를 안 해서···.”
모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문 쪽을 힐끗 보는 것이 어지간히 집에 가고 싶은 모양이다.
“급히 가야 할 사정이 있어?”
속내를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서하의 얼굴이 빨개진다.
“아..아니요. 그건 아닌데 서은이가 절 기다려서요. 서은이는 제 동생인데요, 엄청나게 귀여워요. 엄마도 제가 와야 청소랑 저녁 준비를 시작하시거든요.”
엄마 품에 안겨있던 아기 생각이 나서 윤미는 웃음이 나올뻔했다. 확실히 귀여운 아기였다.
‘아!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거람.’
맥이 풀렸다.
서하는 그냥 순박하고 착한 시골 초등학생이었다. 윤미는 이 기특한 아이를 빨리 해방시켜 주기로 했다.
“그럼 이 문제만 풀어 볼래? 몇 문제 안 되는데 다 풀면 바로 가도 좋아!”
“정말요?”
오래 걸리리라 생각했었는지 서하가 반색하며 묻는다.
“그럼! 어려운 게 있으면 그냥 내버려두면 돼.”
분명히 똑똑한 아이일 것이다.
아주 드문 케이스겠지만 과학고 동기 중에서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중고등 수학을 독학한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은 지금 UCLA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서하가 만약 중학 과정 수학이라도 완벽히 풀어낸다면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을지 윤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서하가 필통에서 오리 피규어가 달린 캐릭터 연필을 꺼내더니 답을 적기 시작했다.
1번, 중1 과정.
비례식과 비율 추론.
[지도에서 5cm가 실제로는 2km라면, 8cm는 몇 km일까요?]
사각사각.
「3.2km」
서하가 순식간에 답을 적었다.
‘보자마자 암산?’
윤미의 눈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서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의 깜빡임이 줄고 호흡이 가늘어졌다. 입술이 반쯤 다물어져 안쪽으로 살짝 말린 채 시험지를 응시하고 있다.
확실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지 서하는 완전한 집중 모드로 들어갔다.
사각사각.
2번 문제는 피타고라스 정리.
[밑변이 8cm, 높이가 6cm인 직각삼각형과 한 변의 길이가 8cm인 정사각형이 한 변을 공유할 때, 정사각형의 한 꼭짓점에서 직각삼각형 빗변의 중점 O까지의 거리를 구하세요.]
문제를 보고 2초 정도 생각하던 서하의 손이 바로 움직인다.
‘말도 안 돼! 이것도?’
윤미는 마른침을 삼켰다.
계산보다는 사고를 보고자 하는 문제였다. 답도 딱 떨어지게 준비해 놓았다. 서하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답을 적었다.
「5cm」
3번 문제, 이차 방정식.
[실수 m에 대하여 다음 이차방정식이 있다. x² + 2mx + (2m - 1) = 0. 이 방정식이 서로 다른 두 실근을 가지면서 그 두 근의 차가 2가 되도록 하는 모든 실수 m을 구하시오.]
서하의 연필이 거침없이 움직인다. 윤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하가 순식간에 판별식의 조건을 떠올리고는 이를 문제에 맞는 방정식으로 바꿔버렸다.
멈춤이 없다. 망설임도 없어 보인다. 답을 100% 확신한다는 뜻이다.
「m = 0 또는 m = 2」
윤미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정식에 근의 공식을 단순 대입해 푸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고 조건을 변형, 연결할 수 있는 사고력은 매우 특별하다.
윤미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친다.
속도 따윈 아무래도 좋다. 이러한 구조적 사고는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4번, 삼각비 응용.
계산은 쉽지만 사고 전환이 필요한 문제다.
서하는 단순히 문제에 값을 대입하거나 공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8살, 연산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나이지만 구조적 사고가 몸에 배어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정답을 적었다.
5번 미분.
[f(x) = x² + 2ax + (2a - 1) 의 극값의 차가 2가 되도록 하는 실수 a를 구하시오.]
계산은 짧고 판단은 더 빠르다. 윤미는 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서하는 연필을 손에 쥔 채 문제를 한 번 쓱 훑더니 곧바로 계산을 시작했다.
8살짜리 아이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도함수, 극값 위치, 극값 차라는 일련의 흐름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문제를 읽고 조건과 함수를 머릿속에서 바로 연결한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단계를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이는 서하가 이미 완벽한 논리와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윤미의 머릿속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초등학생이 크레파스로 정교한 건축 설계 도면을 그려낸다면 이런 느낌일까. 천진난만한 글씨 속에 담긴 냉철한 논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
“다 했어요, 선생님!”
3분이나 지났을까?
시험지를 내밀며 집에 가고 싶다는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서하가 귀여웠다.
“그래. 전부 다 맞혔네. 집에 가도 좋아.”
너무 놀라서 말이 건조하게 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서하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서하가 꾸벅 배꼽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달려 나간다.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놓고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칭찬 한마디 기대하는 기색이 없었다.
윤미는 멍하니 서하가 짧은 다리로 뛰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다.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겠니?”
윤미는 손에 들린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꿈에서도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현실과 상식의 괴리가 너무 커서 머릿속이 멍하다.
그녀는 구겨지지 않도록 답안지를 파일에 소중히 보관했다. 마치 귀한 보물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툭툭툭.
윤미가 검지로 책상을 두드린다.
아직 초등학교 1학년.
말할 것도 없이 어른들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다. 지금은 뛰어난 모습을 보일지라도 어느 순간 수학에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윤미는 그렇게 사라져가는 수많은 영재들을 보아왔다.
“평범한 영재라면 말이지···.”
서하는 천재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규격 외의 무엇인가였다.
순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인에게 영향을 미칠 위치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쓰으읍.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현실감이 돌아왔다.
책상 위에 놓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윤미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집어보았다. 하지만 무엇하나 마음에 차는 것이 없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뻔하다. 자신은 한 번도 천재였던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했다.
“결정했다.”
천재의 일은 천재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였던 사람에게.
혼자서 짊어지기에는 짐이 너무 무거웠다.
띠리리리리리링.
신호가 길게 이어진다.
-웬일이냐? 니가 전화를 다 하고.
벨소리가 끝나갈 때쯤에야 불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어볼게 있어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체념한 듯한 한숨과 함께 그가 대답한다.
-잠시만···.
* * *
우현이 급히 녹화용 카메라를 끈다.
칠판 위에는 여러 가지 그래프와 수식이 적혀 있었다. 수년간 연락도 없던 전 여친이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것일까?
물어볼 것이 있다는 말에 우현이 뚜벅뚜벅 스튜디오를 걸어나가 냉장고 안에서 캔 커피를 집어 든다.
“무슨 일인데?”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굉장한 천재가 있어.
우현이 피식 웃는다.
“천재는 지랄. 기껏 몇 년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지겹다. 그 소리.
100개국 이상이 참여하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2위를 따냈을 때 자신에게 수없이 쏟아졌던 찬사였다. 1988년 첫 참가 이래로 한국 선수가 거두었던 두 번째로 뛰어난 성적이었고.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런 칭호는 오직 신에게 선택받은 아주 소수만을 위한 것이다.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진짜 달라. 글쎄 얘가···.
하지만 윤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만! 용건 더 없으면 끊는다?”
화가 난 것일까?
수화기 너머로 숨 막힐듯한 침묵이 흐른다. 후회가 밀려왔다.
‘젠장. 좀 더 잘 받아줄걸 그랬나? 그러게 왜 남의 속을 긁어. 그딴 소리 하면 내가 싫어할 거 알면서.’
어찌해야 할지 우현이 고민하는 사이···.
-쫌생이···.
“뭐?”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다.
-야, 이 쫌생아!
“진짜 너 뒤진다?”
-언제까지 꽁해 있을 건데?
듣다 보니 열이 뻗쳤다. 누구에게나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역린이 있는 법인데.
“뭘 꽁해있어? 우리 동창 중에 나보다 더 많이 버는 놈이 한 명이라도 있냐?”
작년, 세금만 50억을 넘게 냈다.
모든 학부모와 수험생들이 추앙하는 1타 강사. 최고의 학력과 스펙을 갖춘 수리의 신, 신우현에게 감히!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차갑게 가슴이 식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데 동창회는 왜 안 나와?
“···그건 너 때문이잖아. 나라고 전 여친 보는 게 편하겠어?”
-웃기시네.
“됐고, 들어줄 테니까 다시 말해봐. 걔가 어쨌길래?”
저쪽에서 안도했다는 듯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등학교 1학년 애가 미적분, 기하 벡터를 완벽하게 이해해서 풀어.”
우현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찡그린다.
“너 아직도 강남에 있냐? 그 집 부모도 어지간하네. 애를 얼마나 잡았으면···.”
한 해에도 몇 명씩 이런 아이들이 있다.
좋은 DNA와 비인간적인 조기교육이 결합하면 놀랍게도 이런 아이들이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 머지않아 주제를 파악하고 의대에나 진학 하겠지.
그럼에도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재발굴단 같은 곳에 출연해 얼굴을 알릴 것이다. 웃긴 일이다. 그걸 누가 인정해 준다고.
-아니야. 나 지금 고향에 있어.
“옥천에?”
두 사람이 연인이었던 시절 우현은 그녀의 고향에 함께 내려간 일이 있었다.
“그 깡촌에 그걸 푸는 애가 있다고?”
-나도 믿질 못하겠더라. 애 엄마를 불러서 얘기해 봤는데 학원은커녕 집에서도 가르친 적 없대. 애가 독학으로 깨우친 거야.
“거짓말 아닌 거 확실하지?”
-내가 속을 것 같아? 여러 번 확인해 봤어. 오빠, 좀 알려줘. 나 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영재 교육원 같은데 연락하면 되나? 아니면 조기졸업 알아볼까? 과고 선생님들한테도 전화해 볼까 했는데···.”
윤미가 다급하게 내뱉는 말을 우현이 끊는다.
“아서라, 애 망친다. 부모 헛바람만 잔뜩 들겠지. 학생도 지가 뭐라도 된 줄 알고 거만해져.”
-그럼 어떻게 해? 진짜 나 평생 이런 애 처음 봐.
“우리나라에서나 그렇지. 외국에는 가끔 있어. 미친놈들이.”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우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그냥 내버려두란 소리야?
“물론 아니지. 네 말이 사실이라 가정하고, 그놈 같은 진짜 천재들에게 필요한 게 뭔 줄 알아?”
-눼눼. 천재가 아니라서 전 모르겠네요.
비아냥 거리는 윤미의 말투에도 우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압도적인 실적.”
예상과 다른 말에 윤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실적이라면 대회를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초등학교 1학년한테 대회는 좀 이르지 않을까? 어디를 내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건 내가 아이의 역량을 정확히 알아야 대답해 줄 수 있어.”
-흐음···.
“왜, 내키지 않아?”
-서하, 아! 그 아이 이름이 서하야. 걔네 가정이 굉장히 화목해 보였거든. 내가 잘 살고있는 집에 풍파를 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놔두면 지금처럼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 결정의 대가는 미래의 필즈 메달이나 노벨상 수상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일 테고. 솔직히 그냥 놔두는 게 더 행복하리라는 너의 생각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봐. 지금 두각을 나타낸다 해도 미래에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재능 없는 수학자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지 우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입구에서부터 도망쳐 버린 자신이 입에 담을 말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왜 실적이야? 그냥 월반해서 정규 교육 시스템을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대학은 가야 하고···.
“나처럼 말이지? 그건 차선책 정도는 될 거야.”
-오빠도 어릴 때 힘들었다고 했지?
“어딘가에 뛰어난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쥐고 흔들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나. 때로는 순수한 관심이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성과를 위해 아이를 이용하려는 더러운 계산이 깔려있지. 의심의 눈초리는 끊이질 않고 부모도 심각한 압박을 받게 돼. 그러는 사이 아이 자신도 ‘정말 내가 그 정도인가?, 사람들 말대로 과대평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는 거야.”
-아···. 뭔지 알 것 같아.
“하지만 압도적인 실적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대회든, 논문이든 그 수준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 있으면 모두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거든.
객관적 지표는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게 해줘.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게 될 거야.”
멀고 아득한 길을 가려는 수학자에게 자기 확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 와주는 거지?
“옥천에?”
“미쳤냐? 너 내 하루 몸값이 얼만지는 알아?”
-그놈의 돈, 돈! 오빠 전에는 꽤 멋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닌 거 알지?
우현의 얼굴에 자조 섞인 그림자가 드리운다.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수치심이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하겠다고 새벽까지 흑판 앞에서 눈을 빛내던 젊은 수학도는 더 이상 없다.
‘그때의 나는 어땠더라?’
고개를 들면 머릿속에서 수식이 폭죽처럼 터졌다. 그리고 그 불꽃이 끝내 세상을 바꿀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숫자는 흑판이 아닌 계약서에 적혀 있었다.
스스로 버려두었던 꿈의 잔해들이 날카롭게 자신을 헤집어놓는 것 같았다. 멀리 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꺼져버린 꿈이었는데 왜 아직도 이토록 아픈 것일까?
모든 것을 정리 해야 할 시기가 윤미의 입을 빌어 찾아온 것일지 모르겠다고 우현은 생각했다.
우현이 이런 생각을 하는걸 모르는지 윤미가 말을 이어간다.
-솔직히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 수준으로는 서하의 한계를 모르겠어. 어디까지가 가능하고 무엇에서 막혀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겠다고. 엄청 비참한 느낌이야. 오빤 이런 기분 모르지?
모를 리가 있나? 너무 잘 알지.
“알았어. 하루 시간 낼게. 맛집이나 알아놔라.”
-헤헤, 고마워. 옥천 풀코스로 모실게.
수업을 어떻게 빼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지만 오랜만에 윤미를 만날 생각을 하니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주말 오후 옥천 어느 한옥.
미영이 요리를 하는 사이 서하는 모빌에 정신이 팔린 동생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나랑은 다른가?’
자신은 이때쯤 말을 대충 알아들었던 것 같은데 반응을 보니 서은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보고 서은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 한다.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도 그래. 서은이가 빨리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서은이 해맑게 웃는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빵빵한 볼을 향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손끝에 닿은 볼이 부드럽게 들어갔다가 손을 떼자 ‘퐁’하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한번 꾹 눌렀다.
이번엔 양쪽을 동시에.
말랑한 젤리 같은 촉감이 중독적이었다.
‘재밌다.’
서하가 동생과 노는 사이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서하네 집이죠?”
“어머! 선생님!”
윤미를 알아본 미영이 빨래를 널다 말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분유를 타던 철호도 슬쩍 나와 슬리퍼를 신는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서하 담임이에요.”
“안 그래도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미영이 윤미 뒤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묻는다.
훤칠한 키에 마른 체형.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었지만 불편함을 느끼는지 넥타이를 자주 매만진다.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신우현이라고 합니다. 김윤미 선생님이 보여주고 싶은 학생이 있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딱딱한 우현의 인사에 윤미가 옆구리를 찌르더니 급히 끼어든다.
“보기엔 이래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한 분이에요. 지금은 유명 강사시고요. 저보다는 훨씬 서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함께 왔습니다.”
“네? 서하 얘기라는 게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미영이 두 사람을 집 안으로 안내한다.
“저는 학생 방을 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뜬금없는 우현의 요구에 윤미가 표정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매만진다. 그녀는 새삼 우현의 사회성이 얼마나 박살 나 있는지 깨달았다.
“네? 네! 그러세요.”
철호가 우현을 서하의 방으로 안내한다.
찌그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낡은 마루가 비명을 지른다. 철호는 머쓱하게 웃으며 단단한 곳을 골라 밟았다.
끼이익ㅡ
“여깁니다.”
우현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책이 많네.’
백과사전을 한번 꺼내본다. 꼼꼼히 읽었는지 모든 페이지에 사용감이 있다. 유아용 그림책은 가장 아래 칸으로 밀려나 있고 손이 쉽게 닿는 곳엔 대부분 수학 관련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학교 학부생들이 주로 보는 책들이네요.”
우현이 제임스 멍커스가 쓴 ‘위상수학(Topology)’을 꺼낸다. 그 역시 공부했었던 책이었다.
“1년 정도 전부터 이런 책들을 사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 봐도 내용을 하나도 모르겠는데 아들이 공부한다고 하니 그냥 사다주고 있습니다.”
윤미의 교실에 들러 시험지를 확인하고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확신하지 못했었다. 진정 독학으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것도 이 어린 나이에?
우현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오른다. 8세가 되기 전에 대학 수학을 혼자 거의 끝내버렸다던 그 사람.
‘비슷한가? 아니, 그 사람의 부모는 의사에 수학 교사였지. 재능은 이쪽이 더 우월할지도 모른다.’
책상 위에 가지고 놀던 색종이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아이다운 구석도 있네?’
우현이 슬쩍 웃으며 색종이를 집는다. 아래에는 스케치북이 있었다. 그리다 만 지도 같은 것이 보인다. 아래에는 낙서 같은 기호가 적혀있었다.
‘응?’
색종이의 색은 총 네 가지.
스케치북 위에 어지럽게 적혀있는 수식.
‘설마···.’
우현은 수식을 읽어보았다. 한눈에 식이 들어오지 않았다.
“G는 V, E···. 평면 그래프?”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e ∈ E, c(u) ≠ c(v), 인접한 두 꼭짓점은 색이 다르다?”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min |C| ≤ 4? K5, K3, 3···. 평면성 조건까지?”
책상 위의 색종이 조각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빨강, 파랑, 노랑, 녹색. 정확히 네 가지 색.
“오일러 공식 V - E + F = 2.”
그는 숨을 삼켰다.
“맙소사. 4색 정리를 직접 해보려고 한 거였어?”
조용히 듣고 있던 철호가 참지 못하고 끼어든다.
“4색 정리? 그게 뭡니까?”
“1852년 프란시스 구스리가 제안한 이론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지도라도 네 가지 색을 이용하면 모두 구별되게 칠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어려운 건가요?”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그 이상이죠. 100년간 수 많은 수학자들이 도전했지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4색 정리가 참이라고 증명된 건 컴퓨터가 등장한 이후였으니까요.
그딴 건 증명이 아닙니다. 연산, 혹은 프로그래밍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죠. 납득하지 못하는 수학자들이 많았지만 대안이 없으니 학계에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요즘 시대에 이걸 진지하게 파는 수학자는 아마 없겠죠.”
잠시 색종이를 만지던 우현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웃는다.
“아! 그래서 위상수학을 공부했던 거구나. 지도를 평면 그래프로 옮기고 경계와 면의 성질을 정의하려고!”
그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서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저씨, 혹시 제 색종이 만지셨어요?”
우현이 멋쩍은 듯 웃는다.
수학자들은 남이 허락 없이 자기 연구물을 만지는걸 극도로 혐오한다. 이 까칠한 반응을 보니 어린 나이지만 수학자의 자질이 충분해 보였다.
“아···. 미안. 원래대로 해놓을게.”
“아니에요. 그냥 두시면 돼요.”
최악의 첫인상.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우현은 서하가 좋아할 만한 주제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어디서 막혔어? 색칠 조건?”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저씨도 이 놀이 아세요?”
서하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는 신이 난 듯 질문을 쏟아낸다.
놀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100년간 수없이 많은 수학자를 좌절시킨 문제가 이 아이에게는 조금 고차원적인 색칠 놀이 정도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초장부터 지고 들어갈 순 없었다.
“색종이 네 개 색깔하고 네 꼭짓점 인접 조건을 적어놓을걸 보니까 딱 감이 왔지. 평면성 판정은 이미 끝낸 것 같더라.”
서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스케치북을 꺼낸다.
“그 뒤로 막혔어요. 인접한 꼭짓점끼리는 색을 다르게 해야 하잖아요? 근데 이게 실제로 해보니까 순서를 바꾸면 색이 안 겹치는데, 어떤 경우는 세 번째나 네 번째 색을 써야만 가능해져요.
그러다 보면 네 가지 색으로 될지 안 될지 헷갈려요. 아무리 바꿔도 세 번째 변에서 조건이 깨져버릴 때가 있거든요.”
서하는 손가락으로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를 짚었다.
거기엔 네 가지 색이 점점 겹쳐지는 과정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여기 보세요. 여기선 파랑으로 시작하면 마지막에 두 꼭짓점이 같은 색이 돼서 안 돼요. 그래서 빨강으로 시작했는데, 이번엔 중간에서 막히고요···.”
우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색칠 순서의 함정이지. 평면성만 보장돼도 색칠 순서를 잘못 잡으면 더 많은 색이 필요한 것처럼 보여. 그걸 피해 가려면 ‘귀납적 색칠’이나 ‘감소법’ 같은 기법을 써야 해.”
“감소법이요?”
“응. 큰 그래프에서 꼭짓점을 하나 빼고 색칠한 다음에, 다시 끼워 넣으면서 조건을 맞추는 거야. 네 색 안에서만.”
서하가 눈을 반짝였다.
“아···. 그러면 중간에 막히더라도, 다시 돌아가서 색을 바꾸면 되겠네요?”
“맞아. 근데 이게 생각보다 복잡해. 너처럼 손으로 다 해보는 건 금방 한계가 와. 4색 정리를 증명하려면 그 ‘모든 경우’를 다 체크해야 하거든. 수천, 수만 가지 경우를. 그래선 증명이라 할 수 없겠지.”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는지 서하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하지만 우현은 반대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아이는 당대의 뛰어난 수학자들이 4색 정리에 접근했던 방식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었다.
방 안에 낡은 상이 펴졌다.
각기 다른 모양의 컵 안에 인스턴트커피가 담긴다.
철호, 윤미, 우현이 상 앞에 둘러앉았다.
서하가 서은을 돌보는 사이 미영은 가스레인지에 커피 물을 올렸다.
“대접할게 별로 없어서 어쩐대요. 선생님들, 우리 서하때문에 누추한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영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힌다.
서로가 할 말을 정리하는 사이 주전자에 김이 올라오고 곧 증기 소리를 내뿜었다.
쪼르륵.
윤미가 어서 말을 꺼내라는 듯 우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좀처럼 상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 보았던 서하의 모습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이었다.
결국 윤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서하같은 아이는 제가 교직 생활을 하며, 아니 교직 이전에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도 서하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미영이 잠시 말을 잃은 듯 눈을 깜빡였다.
물론 똑똑한 아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찾아올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저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가겠구나 싶어 학비를 잘 모아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을 뿐.
“서하가 서울에 있는 애들보다 더 잘하나요?”
두 부부가 기대와 우려가 섞인 표정으로 윤미를 바라본다. 아들을 서울에 유학이라도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다.
‘그래, 이게 평범한 부모의 반응이겠지.’
윤미가 작게 한숨을 쉰다.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아···. 어머님. 저희가 오늘 찾아뵌 건 단순히 서하가 서울에서 조기 교육 받는 애들보다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댁의 아드님은 역사에 남을 위인이 될 자질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어 우물쭈물하는 사이 우현이 끼어들었다.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좋고···. 서하는 이런 수준이 아닙니다. 자세한 건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현재 저는 전 세계를 뒤져봐도, 아니 최근 50년간의 인류 역사에서 서하보다 수학적으로 더 뛰어난 인간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 나이에서는요.”
우현의 입장에서는 50년도 상당히 양보한 수치였다. 이 이상의 괴물이 과거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
““네?””
철호와 미영이 외마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하하하하하하하!”
“아이 참! 선생님은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세요.”
두 사람이 한참을 웃었지만 우현은 눈썹 하나 까닥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걸 느꼈는지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저 농담 안 합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무거워졌다. 미영과 철호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곧추세운다.
“이제 부모님들께서도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서하를 위해서요. 저는 서하가 굉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인류의 역사, 특히 과학은 아주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진보해 왔습니다. 서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소수에 속하는 인간입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저희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네요. 이런 말이 실례인지는 알지만 솔직히 의심스럽고요.”
일이 잘못되겠다 싶었는지 윤미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어..어머님! 이 사람이 못 미더워 보이실 수는 있는데 절대 없는 얘기를 지어낼 분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현이 오른손을 들어 윤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낸다. 그의 집 다락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잊고 싶었던 기억. 만에 하나 이런 일도 있을까 해서 준비해 왔는데 정답이었다.
신문 스크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앳된 우현의 모습, 메달을 목에 건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만 16세 신우현 군,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2위 영예, 영재들 사이에서도 빛나는 천재성]
그것 외에도 수 많은 상장들과 메달.
한 때 한국 수학계를 이끌어갈 것이라 모두가 믿었던 그의 과거였다.
“일반인들은 별 관심 없겠지만 저는 한때 한국 수학계의 미래라고 기대받았던 학생이었습니다. 세계 거의 모든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았었죠. 올림피아드 대표의 국가별 정원은 여섯 명입니다. 저는 고1 때 110여 개국 700명의 영재들 사이에서 2위를 했으니 그런 기대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대단한 분이셨군요.”
철호가 파일을 집어 신문 기사를 읽어본다.
윤미도 숨을 삼키며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럽죠. 저는 실패했거든요. 그저 제 말의 진실성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우현의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차린 철호가 우현에게 묻는다.
“만약 선생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애를 서울로 보내야 할까요?”
옛말에도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네?”
“자랑도 과시도 서울 유학도 필요 없습니다. 아이에게 부담만 될 뿐이죠.”
“그럼 그냥 두라는 건가요?”
“부모님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책장을 둘러보니 수학을 편식하고 있더군요. 4색 정리를 풀기 위해서였겠지만 위상수학에만 몰두하는 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상수학 하나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거든요.
정수론, 대수학, 해석학, 조합론, 기하학···. 겉으로는 전혀 다른 영역 같아 보여도 중요한 정리나 이론은 이런 여러 분야가 맞물려야 풀립니다.”
“와일즈처럼 말이지?”
아는 내용이라 생각했는지 윤미가 묻는다.
“그래. 와일즈 교수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데 몇 가지 이론이 쓰였을 것 같아?
대수기하학, 정수론, 모듈러성 정리, 갈루아 표현, 프라이 곡선, 리벳 정리, 디오판토스 방정식···. 이러니 오일러나 가우스 같은 세기의 천재라도 당시에는 해결 못했던 게 당연하지.”
윤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 학계 경향을 보면 아예 ‘융합 수학’이라고 부를 만큼 분야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으니까.”
들어본 적도 없던 용어의 폭탄에 부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걸 이해 한다는 듯 우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한다.
“핵심은 수학 전반을 골고루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꼭 봐야 할 책을 서하에게 보내겠습니다. 중요한 논문도 말이죠.”
“그거면 충분한가요?”
근엄했던 처음 분위기와는 달리 이정도면 별일도 아닌 것 같았다. 남편이 사주던 책을 이 서울 선생님이 골라준다는 것이 다를 뿐.
“서하는 애초에 독학으로 대학 수학까지 도달한 아이입니다. 제대로 된 길만 알려준다면 혼자서 못 할 이유가 없겠죠. 질문이 있으면 전화나 화상으로 제가 설명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평소대로 학교에 보내면 되겠군요.”
“맞습니다. 초등학교까지는요.”
“그 이후는요?”
“엘리야 크로넨 이라는 수학자가 있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이름에 부부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우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무려 13세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1위를 했고 16세에 석사 학위를 땄습니다. 23세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인 프린스턴에서 정교수로 임명됐죠.
수학에는 노벨상이 없는 대신 4년마다 한번 수여하는 필즈상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29세에 그걸 받아냈어요.
그동안 해결한 난제는 수도 없이 많고 지금은 밀레니엄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는군요.”
“밀레니엄 문제요?”
“하버드 수학자들이 주축인 클레이 수학연구소에서 발표한 문제입니다. 2000년, 여러 수학계 석학들이 함께 논의 한 끝에 21세기 수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7가지 난제를 선정했어요.
하나를 풀면 상금이 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0억이 훌쩍 넘는군요.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은 그걸 해결한 순간 세계 수학사, 아니 인류의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된다는 점이겠죠.”
어마어마하게 스케일이 커진 대화에 철호가 고개를 젓는다.
“그걸 푸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물론입니다. 사실 한 문제는 이미 풀렸어요. 그레고리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그럼.”
“네. 저는 서하가 장차 밀레니엄 문제에 도전할 수 있는 수학자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목이 타는지 미영이 컵을 들고 식은 커피를 원샷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은 그냥 내버려두라면서요?”
아들이 세기의 천재일 가능성이 있다는데 어떤 부모가 도움을 마다할까.
“저는 서하가 엘리야 크로넨보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어릴 때 의사와 교사인 부모로부터 헌신적인 서포트를 받았다. 그러나 서하는 그런 것들 없이도 그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지원은 자신이 해주면 된다.
미영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 보았다.
“그럼 13세에···.”
“아니요, 딱 1년만···. 엘리야 크로넨보다 1년만 더 빠르게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처음으로 우현의 얼굴에 표정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것은 탐욕이었다.
‘그래도 최연소 올림피아드 1위 기록은 갈아 치워야겠지.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고···.’
“서하가 12살이 될 때까지 준비시키겠습니다. 그 후로는 아마 미국으로 가는 것이 수월할 겁니다. 비용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학에서 돈 보따리를 내밀며 와달라고 애원할 테니까요. 여차하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1타 강사라서 연봉이···.”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싫은데요?”
미영이 깜짝 놀라 서하를 쳐다본다.
“서하야! 무슨 소리니? 선생님들은 다 널 위해서···.”
하지만 서하의 말이 더 빨랐다.
“전 한 번도 대회에 나가 상을 받는다거나 난제 같은 걸 해결하려고 수학을 했던 적이 없어요.”
게다가 미국이라니···.
옥천에서 평생을 사셨던 두 분이 삶의 터전을 그렇게 쉽게 옮겨도 괜찮은 걸까? 저 사람 말대로 끌려다니다 보면 서은이하고 놀 시간도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순하기만 하던 아들의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아···. 왠지 이럴 것 같았지.”
우현이 피곤하다는 듯 손바닥을 펼쳐 눈을 비빈다.
“말씀은 고맙지만 수학은 혼자서 해도 충분해요.”
첫인상이 나빠서인지 얼굴에 반항기가 가득하다.
지금 이 아이의 눈에 자신은 무엇으로 비치고 있을까? 평온한 삶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침입자?
“알았어. 미국에 꼭 갈 필요는 없어. 내가 시키는걸 하지 않아도 좋고.”
예상외로 빠른 포기에 서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우현의 말을 듣고 서하는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총 12년.”
가슴속에서 열불이 난다.
저 아이는 알고 있을까? 자신 같은 범인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에서 사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는 것을.
“뭐가요?”
“네가 방에 있는 백과사전보다도 못한 교육을 받느라 허비해야 할 시간.”
“에?”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걸음을 내디딘다. 그리고 몸을 낮춰 서하의 양 어깨에 두 팔을 얹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자, 솔직히 말해봐라. 윤미랑 하는 초등학교 수업은 죽을 만큼 지루하지? 그걸 12년이나 참아야 한다고?
지금도 한발만 떼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문제들이 저 밖에는 가득한데? 해결하면 그야말로 인류의 삶과 역사를 통째로 바꾸어 버릴지도 모른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밝히고서 인류는 얼마나 진보했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아니었다면 감히 인간이 우주에 나갈 수나 있었을까?”
‘이 사람 눈빛이 맛이 갔어.’
서하는 눈을 희번덕거리게 뜨고 광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쏟아내는 우현이 너무 무서웠다.
“히이익ㅡ”
“네 머릿속에는 인간이 수천 년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걸 써보지도 않겠다고?
너로 인해 지구가, 인류가, 그리고 역사가 진보할 지 모르는데도?”
그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흰자위가 번쩍였다.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어깨가 아파왔다.
“으아아아아앙ㅡ 엄마!”
우현은 결국 서하를 울리고 말았다.
윤미가 우현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아얏! 진짜 아파. 너 손 완전 맵거든?”
우현이 펄쩍 뛰며 등을 매만진다.
“내가 못 살아!”
“그래도 잘 됐지?”
“하아···. 내가 미친년이지. 오빠랑 학부모를 만나게 하다니.”
얼마간 소란이 있었고 서하 부모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우현은 서하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설득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런 천재가 12년이라는 무의미한 세월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던 일이었는지 서하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곧 자신에게는 월반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월반과 조기졸업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특히 초등학교 월반은 국가적으로 1년에 한 건도 없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서하가 그것을 충족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만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학교가 공부만 배우는 곳도 아니고.’
최소한의 사회성을 학습하고 또래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서 발달도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래서 합의한 것이 초등 6년.
초등 저학년 기간에는 국내에서 열리는 굵직한 대회에 참여하여 이름을 알리고, 6학년이 되는 해에 세계를 제패한다.
우현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의 미래를 컨설팅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래도 미국은 안 갈래요.”
당돌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모습이 오히려 고마웠다.
처음엔 미국만이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미국의 최상위권 대학은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 하더라도 제도적으로 조기졸업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오케이. 문제없어. 물론 언젠간 가는 것이 좋겠지만···. 부모님께서도 따로 바라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우현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속내를 드러낸다.
“가능하다면 검정고시 말고 정규 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싶습니다. 대학이 중요한 건 알지만 그래도 평생 한 번뿐일 학창 생활은 소중하니까요.”
우현이 검지로 밥상을 두드린다.
“문제 없습니다.”
영재 교육 시스템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현은 서하의 미래와 부모의 바람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를 알고 있었다.
“정말인가요?”
“영재 학교란 곳이 있습니다.”
“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철호의 말에 우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여기서 멀지 않은 세종과 인천 그리고 부산에 있죠. 영재 학교의 장점은 특수학교라서 초중등교육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입학 자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중학 3년을 합법적으로 스킵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거기에다 영재고는 카이스트와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기에 입학하자마자 대학 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대학 입학 후에 이수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요.”
“오! 편리하네요.”
이제야 관심이 동하는지 서하가 눈을 반짝인다.
“그렇지? 너는 영재고 2년 동안 대학 과정을 모두 끝내고 카이스트 입학 후 2년 안에 석사까지 마칠 수 있어.”
카이스트의 학·석사 연계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할 터. 교수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그럼···.”
안달이 났는지 미영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서하는 16세에 카이스트 석사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은 한푼도 필요 없을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장학금을 뜯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영재 학교 입학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나요?”
부부는 여전히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입학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서하가 1년에 수백 명씩 뽑는 입학 정원 안에 들어가지 못할 리가···. 문제는 나이다.
우현이 씨익 웃는다.
“그러니까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게 할 계획입니다.”
진심, 전력을 다 한 상담을 마치고 나니 윤미는 배가 고파왔다.
한참을 걸어 나와 차를 세워둔 공터에 도착한다.
“타, 맛집으로 안내할게.”
우현이 흔쾌히 윤미의 경차에 올라탔다.
“맛집 확실하냐?”
윤미가 못 들은 척 차를 빼내 도로 위에 올린다.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운전하며 윤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오빠.”
“응?”
“오늘 좀 멋있었어.”
우현의 속에 울컥 하는 감정이 솟아 올랐다.
“난 원래 멋있었어 인마.”
아쉽게도 지역 명물인 생선국수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 * *
4년 후, 서울대 관악 캠퍼스 대강당.
“우리 딸, 잘 할 수 있지?”
민지의 어머니가 딸의 옷깃을 매만진다. 11월이지만 벌써부터 공기에는 찬 기운이 섞여 있었다.
2년 전, 과학고 입시에 실패한 민지는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본 실패.
하지만 민지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 할 수 없었다.
‘나도 열 살부터 미적분을 풀었다고.’
그 해 겨울방학, 자신을 삼킬 듯한 열등감을 억누르고 그것을 공부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그 후 2년간 민지는 뼈를 깎는 노력을 이어갔다.
밤새 증명 문제와 씨름하며 주말이면 엄마 차를 타고 전국에서 열리는 경시대회에 참가했다.
첫 입상의 기쁨.
3위였지만 그녀는 과거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자신의 아래에는 많은 과고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가 틀렸던 게 아니야.’
그러나 대회에 참가할수록 순위는 떨어져만 갔다.
‘왔다.’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는 주제에 이럴 때만···.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과학고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온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주위 공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자신을 포함한 일반고학생들이 웅성거리는 탓이다.
하지만 국내 최고의 고등학교는 저곳이 아니다.
“영재고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들의 집단.
자신은 언감생심 욕심조차 내보지 못했다. 과학고 학생들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그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는다.
‘너희들도 인간이구나.’
민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과학고 학생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올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대표에 과학고 학생은 단 2명. 나머지 자리는 모두 영재고 학생들이 차지했다.
특히 올해는 영재고에 중3의 나이임에도 대표로 뽑힌 천재가 있다고 들었다.
민지가 티 나지 않게 그녀를 찾는다.
임수정.
기사에서 본 얼굴이다.
작은 키, 깡마른 몸. 화장기 없는 얼굴에 뒤로 묶은 머리.
후광 효과 때문인지 고귀함마저 느껴졌다.
‘얼굴도 예쁘네.’
저 나이에 수학 국가 대표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천외천, 죽어도 닿을 수 없는 사람.
객기로 시작한 공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저런 존재를 알게 되면 싫어도 포기 할 수 밖에 없다.
‘대회 참가는 이번까지만 하자.’
이제는 대학도 준비해야 한다.
열등감 해소로 참가하기 시작한 대회였지만 입시에서 가산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보며 상념에 잠겨있는데, 수정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러더니 고운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린다.
‘뭐지?’
민지의 시선이 수정을 따라 이동한다.
터벅터벅.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촌스러워 보이는 남방을 청바지에 넣어 입었다. 요즘 유행하는 너드남의 미니미 버전 같아 웃음이 나온다.
‘몇 학년이지? 제법 잘생겼네.’
저런 남동생이 있다면 옷을 입히는 재미가 있을 텐데···.
사실 서하의 입장에서, 서울에 간다고 부모가 엄청나게 신경 쓴 복장이었다. 읍내에 나가 큰 가게에서 제일 예쁜 옷을 사 입혔다.
아이를 보는 수정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
들은 기억이 있다.
올해 초부터 중요 대회에 초등학생이 나타나 대상을 휩쓸고 있다는 괴담. 이름이 유서하 라고 했던가···.
수정의 표정을 보니 단순한 루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막상 그 아이는 누구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수험표를 힐끗 보더니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민지는 홀린 듯이 그를 지켜보았다.
자리에 앉은 서하가 필통에서 연필을 꺼낸다. 피규어가 달린 저학년용 연필.
‘오리?’
‘아! 이해가 간다. 저런 애한테 졌다면 멘탈이 깨질 만도 하지.’
서하는 무덤덤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난 4년간 그의 수학은 드라마틱한 발전을 겪었다.
우현은 한 달, 혹은 두 달 간격으로 책을 보냈는데, 내용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서하는 책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백과사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
그래프 이론과 네트워크 과학, 리만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수학의 역사와 위대한 수학자의 삶을 다룬 철학서까지.
복소수 행렬의 기묘한 춤, 직관을 속이는 수식의 트릭,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서하는 수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학이 세계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거대한 언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소한 부작용이 있었다.
“왜 이 문제를 이렇게 풀어?”
우현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선다.
어지간하면 가만 놔두고 싶었지만 다섯 줄이면 끝날 증명을 열 페이지 넘게 적어버린 서하의 답안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시험 때도 이런 식이면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서하의 말이 그의 폐부를 찌른다.
“선생님. 그 증명은 굉장히 천박해요.”
우현이 문제를 살펴본다.
피타고라스 수의 일반적인 생성 공식의 증명.
“피타고라스 정리의 고전적인 매개 변수화잖아. 유클리드가 증명한 방식을 그대로 쓰면 다섯 줄이면 돼.”
“그건 그냥 공식을 쓴 거잖아요. 이 삼각형이 왜 이런 구조를 가졌는지 보여주려면···.”
서하가 연필로 커다란 직각삼각형을 그린다. 그리고 그 안에 정사각형 하나를 그려 넣었다.
“이 방식이 아름다운 이유는 정사각형의 회전과 삼각형의 닮음만으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기하가 직관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거죠.”
서하가 종이 위의 도형에 기하적 변환을 시작한다.
정사각형을 시계방향으로 90도 회전시키고, 그것이 만드는 새로운 빗변을 기준으로 직각삼각형을 재배치한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정사각형이 면적이 같은 사각형과 합쳐지고 복잡하게 분화한다.
‘닮음비로부터 정수 조건을 얻어내다니···.’
미친, 천재적이다.
우현은 더 이상 자신이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하의 수학적 자아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대회에 나가자.”
‘골머리는 심사위원들이 앓게 되겠지. 당신들이 대상을 주나 안주나 꼭 구경하고 싶네.’
모범답안과는 확연히 다를 서하의 대답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졌다.
눈이 옹이구멍이어도 그들도 명색이 수학자라면 감히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네!”
“큰 대회만. 너랑 같은 대회에 나가야 하는 애들이 불쌍하니까.”
시도 단위 대회는 건너뛴다.
그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트럭에 치여 고사하는 그림은 원하지 않았다. 물론 피해자는 생기겠지만 그들도 머지않아 천재지변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아직 1년 반이 남아있다.
1년이 꼬박 걸리는 올림피아드 선발전은 내년에 시작하면 된다.
‘그 전에 우선 수학계 꼰대들에게 마음의 준비도 시킬 겸 폭탄을 투하한다.’
“15년만인가···.”
에드워드 한은 심사위원석에 앉으며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왜 나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학문적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옛 동료의 부탁, 그리고 아마도 약간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한국 수학은 끝났다.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는.’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최근 미국 학계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그는 같은 생각을 했다. 한국은 국제 올림피아드 메달 수로는 상위권이지만, 그 재능들이 남긴 수학적 업적은 손에 꼽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해외에 자리를 잡고 연구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 덕분. 물론 자신도 여기에 포함 된다.
끼이익ㅡ
문이 열리고 검토실에 심사위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오! 한 교수도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번에 발표하신 논문 봤습니다. 거 참 대단하시더군요···”
‘이 사람은 아직도 현역이구나. 수십 년째 같은 내용만 강의하고 있는 그가 정말 내 논문을 보았을까? 미국이라면 진작에 잘렸을 텐데···.’
생각과는 반대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교수님.”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들도 대동소이한 인물들.
정년 보장을 받은 교수이기에 연구 실적이 없어도 자리에서 잘리지 않는다. 물론 이들도 한때는 빛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다 돈 때문인가···.’
수학과 인문학처럼 연구비가 거의 지급되지 않는 분야에서 이들은 오래된 명성과 인맥으로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투입된 연구비가 적으니 성과에 대한 압박이 적다. 최신 연구에는 관심도 없을 테고 교재 판매와 인맥 관리에만 열을 올린다.
“자! 될성부른 떡잎을 한번 골라 보죠. 올해도 우리 학교에 좋은 인재가 많이 와 줬으면 좋겠어요.”
“하하하! K 대에서는 저번에 경시대회 수상자들을 다 쓸어가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먹고 살아야죠.”
뛰어난 인재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스카우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데 무척 중요한 일이다. 교수들이 대회마다 굳이 얼굴을 비추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학자가 아니라 마치 네트워크 관리자 같군.’
대학에서도 인맥과 영향력을 발휘해 학생을 유치하니 연구를 하지 않아도 이들은 필요한 인재로 대접받는다.
‘빌어먹을 대한민국. 진짜 성과를 내는 교수들은 이런 곳에 올 시간이 없을 텐데.’
“답안지 가져왔습니다!”
조교들이 밀봉된 답안지를 하나씩 열어 테이블 위에 꺼내놓는다. 번호표가 달려 깔끔하게 정렬된 용지들이 심사위원들 앞에 놓였다.
채점과는 다르다.
정답 여부도 중요하지만 풀이 과정의 논리성, 참신한 접근 방법 그리고 시간 관리 능력까지 가늠하는 것이 심사다.
“이 아이는 평범하네요.”
“어째 수준이 갈 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요.”
“잘하는 애들은 다 의대를 가니 원···.”
교수들의 불평에 에드워드 한이 냉소를 짓는다.
‘당신들이 이 판을 그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 같소만.’
“오오! 이 아이는 정말 대단하네요.”
한 심사위원이 답안지를 펼친 순간 테이블 위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17번 응시자,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개인정보는 가려진다.
“벌써 코시-슈바르츠를 배웠네요. 완전히 이해해서 쓰고 있어요.”
“요즘 올림피아드에 나가려면 선형 대수학은 필수니까요.”
“아! 얘가 그 앤가요? 나이도 어리다는데···.”
“어허! 블라인드인 거 잘 아시는 분이!”
‘이 정도면 확실히 괜찮네.’
에드워드 한이 턱을 쓰다듬는다.
센스가 있다.
불필요한 계산을 걷어내고 핵심 구조를 단번에 간파는 능력은 그야말로 발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키워볼 만한 인재야. 물론 이런 재능이 이 나라 안에 오래 남아 있을 리 없겠지만.’
그 외에도 괜찮은 응시자가 몇 명 있었다.
교수가 문제에서 제시한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착한 학생들···.
쓴웃음이 나온다. 이 아이들은 이런 유형의 문제를 수도 없이 풀어봤을 것이다. 가능한 변형까지 형태를 모두 외우고 있겠지.
몇 시간이 넘게 답안지를 들여다보니 눈이 따가웠다. 교수들이 하나둘 허리를 펴고 안경을 벗었다.
“밥 먹고 합시다!”
조교들이 기다렸다는 듯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윤기 있는 장어가 두툼하게 올라간 고급 도시락.
‘도시락에 쓸 예산으로 쟤들이나 좀 챙겨주지.’
조교들이 구석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서류 뭉치와 채점지가 쌓여있는 그 공간은 사각 구석처럼 햇빛이 닿지 않았다. 누군가는 피곤한지 연필심을 깎으며 꾸벅꾸벅 졸고 다른 누군가는 종이컵에 커피를 마시다 한숨을 내쉰다.
퀭한 눈가와 누렇게 뜬 그들의 얼굴에서는 젊음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소싯적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고급 도시락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교수들이 그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심사도 체력전이라니까요? 먹어야 버팁니다. 어이! 김 군아! 도시락 남는 거 있지? 좀 가져와 봐라.”
“네! 교수님.”
“저는 요즘 기력이 없어서 수업도 힘들다니까요.”
“에잉!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나라가 자연 과학을 등한시하고 이공계만 밀어주니 큰일입니다.”
우걱우걱.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익숙해져야죠. 그나마 있는 예산이라도 안 깎는 게 어딥니까.”
목구멍이 까끌하다.
그는 무심코 구석의 조교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에 잡힐 듯 알 것 같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치와 인맥이 학문을 덮어버리고 실력은 평가받지 못한다. 그제야 저들은 하나둘 다른 길을 찾아 나서거나 해외로 떠날 것이다.
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조차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미안했다.
“다들 잘 드셨죠? 다시 시작합시다!”
누군가 손뼉을 치자 교수들이 느릿느릿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 식곤증으로 교수들이 느슨해진 사이, 에드워드는 마지막 몇 장의 답안지를 차례로 들춰보고 있었다.
“음?”
무심코 펼쳐 든 답안지를 보는 순간 그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됐다.
첫 번째 문제부터 범상치 않았다. 부등식의 증명 문제를 모범 답안과는 전혀 다른 접근으로 풀어냈다.
‘젠센 부등식을 이렇게 확장시켜서?’
확실히 이쪽이 더 간결하고 직관적이다.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사고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문제 4 : 정삼각형 내부의 한 점에서 세 변까지 거리의 합이 정삼각형의 높이와 같음을 증명하시오.]
-이는 비비아니 정리의 특수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정리가 성립하려면 평면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른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구면이나 쌍곡기하학 같은 곡률이 있는 공간에서는 보정항이 필요합니다.
h₁ + h₂ + h₃ = h - (Area × |K|)/(2π) 다음과 같이 공식을 수정하면···.
문제를 풀라고 했더니 논문을 적어놓았다.
학생이 아닌 연구자의 시각. 이 답안은 에드워드에게 스탠퍼드의 천재들과 토론하며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에드워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교수님들, 잠깐 이것 좀 보시죠.”
“어? 그게 뭡니까? 답안이 왜 이렇게 길어요?”
가장 먼저 다가온 정교수가 답안지를 들춰보다니 점점 표정이 굳는다.
“이 학생이 4번 문제에 대해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비비아니 정리가 구면 기하학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출제를 담당했던 중년 교수가 불쾌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아니, 고등학교 문제에 굳이 복잡하게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나요? 말이 따로 없으면 당연히 평면이지.”
‘참담하다.’
수학에서 ‘당연히’라는 말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19세기까지 모든 기하학자들이 ‘당연히’ 평행선 공리가 성립한다고 믿었다. 그 ‘당연함’이 무너지면서 현대 수학이 시작된 것인데···.
“요즘 영재라는 애들이 다 이래요. 인터넷에서 어려운 용어 몇 개 주워들었다고 교수 행세를 하려고 한다니까요?”
정교수가 질렸다는 듯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사각사각.
에드워드가 답안에 있는 보정 공식을 검증해 본다.
만약 이것이 성립한다면 비비아니 정리는 오늘로 수정될 것이다. 수학계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물론 오늘은 이 학생이 틀렸겠지만 이를 계기로 연구를 이어갈지도 모르니 이 역시 수학계를 위해 좋은 일이다.
그가 검증을 이어나간다.
가우스 - 보네 정리에서 수식이 출발한 것 같다. 곡률이 있는 공간에서 삼각형의 각도 합은···.
‘잠깐.’
에드워드의 손이 멈춘다. 그리고 급히 다른 종이를 꺼내 계산을 시작했다.
구면에서 삼각형의 초과각, 쌍곡면에서 삼각형의 결손각.
비비아니 정리를 적분 기하학으로 접근하면 점 P를 중심으로 측지선까지 거리 개념이 곡률에 따라 달라지고···.
“어..어떻게···.”
그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는다.
“뭐가요, 한 교수님?”
공식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구면에서는 거리의 합이 높이보다 크고, 쌍곡면에서는 작아진다. 그리고 그 차이가 정확히 곡률과 넓이에 비례한다.
“교수님, 무슨 문제 있으세요?”
젊은 조교가 에드워드의 변화를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이 공식이 맞습니다.”
“네?”
“100% 정확합니다. 제가 지금 검증해 봤는데, 구면 기하학과 쌍곡기하학에서 실제로 이 공식대로 됩니다.”
교수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그럼 답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죠?”
“그냥 다 맞다고 할까요? 복수 정답 처리하면 이의 제기도 없을 테고요.”
“그런데 이 일반화 공식이 정말 맞다면···.”
“논문감이겠네요.”
노교수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탐욕이 깃든다.
“비비아니 정리의 곡률 보정. 캬! 제목도 근사하게 뽑히겠네요. 이거 꽤 임팩트가 있겠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360년 만에 일반화라니.”
교수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침묵 속에서 저마다 눈알이 돌아간다.
“저, 한 교수님. 이 공식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증명이 생략된 것 같은데 유도 과정에도 첨삭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학생을 불러서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 서로 도움이 될 겁니다. 논문에 1 저자로 실어주면 입시에도 유리할 거 아닙니까?”
도둑맞은 논문.
석사 시절 겪었던 일이다.
에드워드 한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네 아이디어가 정말 좋네. 이걸 발전시켜서 논문을 써보면 어떨까?”
당시 지도교수였던 김정식 교수의 제안이었다. 그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인정 받았다 생각했으니까.
“교수님, 정말 이게 가능할까요?”
“물론이지. 하지만 혼자서는 힘들 테니 내가 도와주지. 1 저자는 자네가 하고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공동 연구였다.
하지만 6개월 후 발표된 논문에서 자신의 이름은 2 저자로 빠져있었다. 물론 김정식 교수가 단독 1 저자였고. 아이디어의 핵심은 마치 교수 자신이 생각해 낸 것처럼 둔갑해 있었다.
“교수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보게, 우리 솔직해져 보세. 자네가 진정 1 저자에 맞는 기여를 했는가? 초기 아이디어만 제공했지 증명은 내가 다 하지 않았는가?”
그날 밤,
에드워드, 아니 한재홍은 한강 다리 위에서 검게 넘실거리는 물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하지만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아이 씨발. 내가 이래서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듣기엔 충분했다.
“뭐..뭐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상소리에 교수들이 흠칫 놀란다.
에드워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들을 향해 일갈한다.
“야, 이 개새끼들아! 니들은 학자로서 양심도 없냐? 이거 도둑질하는 놈은 스탠퍼드 교수인 내가 책임지고 매장해 버린다!”
탁ㅡ 타탓.
한 조교의 볼펜이 유난히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모두가 입이 떡하니 벌어진 채 멍하니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대박.”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서은이가 왜 이렇게 뿔이 났을까?”
다섯 살이 된 서은이 팔짱을 낀 채 고집스럽게 왼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달래보려 부드럽게 말을 걸어봤지만 볼을 부풀려 더 불뚝하게 내밀고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다.
“우리 예쁜 서은이, 엄마한테만 살짝 말해보자. 무슨 일이야?”
짧은 다리로 서서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는 것이 마치 온 몸으로 자신이 화가 났다 세상에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영이 그 모습을 보며 귀여워서 웃는다.
“서은아, 왜 그래애.”
서은이 세상 서러운 듯 훌쩍이기 시작했다.
“오빠가아!”
“응, 오빠가.”
“오빠가 나랑 이틀이나 안 놀아줘써어. 대회 끝나면 놀아준다고 했는데 나한테 거짓말했어.”
서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지금 손님이 와서 그럴 거야. 곧 가실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리치몬드? 에드워드?
유명한 교수라는 사람이 일찍부터 찾아와서 서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미영도 면역이 되어 전처럼 긴장하지 않게 되었다.
‘서하가 알아서 하겠지.’
“그럼, 엄마가 대신 해주면 안돼? 내가 알려줄게에.”
미영이 한숨을 쉰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딸이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알았어! 엄마랑 하자!”
“응!”
서은이 후다닥 방으로 달려간다. 그러더니 바구니를 가지고 나왔다. 안에는 서하가 만들어준 화려한 숫자 카드가 들어있다. 미영은 아이들이 저걸 가지고 노는 건 봤지만 놀이의 룰은 알지 못했다.
카드는 두 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큰 수와 작은 수.
“이걸 엄마가 내면 내가 이 카드들로 부수는 거야. 카드는 많이 쓸 수록 좋아!”
자신의 손에 주어진 카드. 큰 숫자다.
미영은 그중에 90이라 적혀있는 카드를 내밀어봤다.
“90이네? 그럼 나는···.”
서은이 작은 손으로 자신의 카드들을 뒤적이며 중얼거린다.
“음···. 먼저 2! 그럼 45가 남고, 다음은···. 3! 이제 15 남았으니까 3 하고 5!”
서은이 신이 나서 카드를 하나씩 집어서 내려놓는다.
“짜잔! 네 개나 썼어.”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 그러더니 손바닥을 내민다.
“사탕!”
미영은 넋이 나갈 것 같은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이게 숫자놀이? 아들아 대체 동생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거니?’
미영이 서은의 손에 사탕을 쥐여준다.
“이제 엄마 차례야! 더 큰 숫자!”
부부는 서은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하가 동생을 매일 안고 있더니 어느날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글 공부. 숫자와 알파벳, 구구단까지 다 끝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설마 소인수분해를 시키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서은은 그저 오빠랑 노는 것이 기뻤던 모양이다.
이것을 전혀 공부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
자신도 인간인지라 ‘서은이도 혹시?’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딸은 서하와는 달랐다.
아들은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처리했다. 서하가 책을 찾아 읽으며 지식에 목말라하던 모습이 서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 없다.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으니 말이다.
오빠 바라기가 되어버린 딸에게 철호가 조금 섭섭해하기는 하지만···.
“풉.”
집에서 딸에게 3순위로 밀려 시무룩해진 남편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 * *
“얘기는 끝났니?”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교수가 밖으로 나왔다. 서하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할 말 많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더니 공손히 인사만 하고 돌아간다.
“네. 미국 어느 대학의 교수님인데, 저한테 논문을 발표하라고 하시던데요.”
“논문? 그거 어려운 거 아니니?”
“에이, 그렇지 않아요. 제가 풀었던 문제를 잘 정리해서 쓰면 된대요. 투고도 그 교수님이 해주시겠다네요.”
미영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논문이라는 것은 최하 대학생들이 쓰는 것 아니었던가? 똑똑한 아들에게 익숙해지려 해도 서하는 매번 자신의 상상을 넘어선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논문이야?”
“이거 주시러 오신 김에 그냥 한번 꺼내 본 소리겠죠.”
서하가 이제 생각이 났다는 듯 뒤에서 박스를 꺼낸다. 제법 큰 크기의 박스였는데 발신인에 ‘대한 수학회’라 적혀 있었다.
“어? 이게 뭐야? 꽤 크네?””
미영이 박스를 받아 들고는 무게감에 놀란다.
궁금함에 커터 칼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박스를 개봉했다. 안에는 완충재에 둘러싸인 물건이 들어있었다.
“책인가?”
책처럼 펼칠 수 있게 제작된 케이스를 열자 금박으로 인쇄된 상장이 나타났다.
[제 49회 전국 수학 경시대회 대상]
“이렇게 신경 써서 만들어주는구나.”
미영이 감탄하며 상장을 들여다본다. 두꺼운 종이에 금박 도금이 되어있다.
[성명 : 유서하]
전국 대회에서 아들이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어느새 서은이가 와서 고양이처럼 내려놓은 박스를 뒤지고 있다.
“엄마, 접시!”
은색 접시 모양의 상패였다.
미영은 상장과 상패를 번갈아 보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잘 두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서하는 이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꺄아아악!”
서은이 즐거워한다.
반짝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 것인 양 양손으로 접시를 꽉 잡은 서은을 안고는 ‘높이 높이’ 비행기 놀이를 해준다.
박스를 치우려는데 바닥에서 서류가 나왔다.
[상금 수령 안내]
-상금액 : 100만 원
“상금도 있어?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빠듯한 살림에 100만 원이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미영은 차마 이것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서하 앞으로 모아놔야겠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유서하라는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 * *
세종 소재 영재고 교무실,
수정이 상장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다. 손에 쥔 종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제 49회 전국 수학 경시대회 금상]
“금상이요? 제가요?”
수정의 목소리에 불신이 가득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항상 1등이었다. 모든 시험, 모든 대회에서.
“그래. 이번에는 아쉽게 됐구나.”
수학 교사인 담임 박영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선생님, 이거 실수 아닌가요? 저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어요. 전부 다 아는 문제였고 완벽하게 풀이와 답을 적었다구요. 만점인데 어떻게 대상이 아닐 수가 있죠?”
담임 교사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 역시 수정의 대상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결과를 보고 즉시 주최 측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다.
-4번 문제에 조그만 오류가 있었습니다. 대상을 받은 학생이 그걸 완벽하게 수정했다는군요.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습니다. 사실 복수 정답처리로 가는 거였는데 스탠퍼드 한 교수님이 반대했다고 해요.
에드워드 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영호는 소름이 돋았다. 세계적인 수학자가 한국의 경시대회에는 대체 왜?
그 역시 대학 시절 한 교수의 논문을 이해하려 며칠 밤을 지새우곤 했었다.
그가 34세에 발표한 ‘나비에 - 스토크스 방정식의 정칙성 문제에 대한 접근’은 수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체역학의 핵심인 이 방정식 난제에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 후로 수많은 톱 저널에 3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고 인용 수에 있어서도 월드 클래스를 자랑한다.
이 사람이 대상을 직접 뽑았다면 학회에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영호가 열심히 이를 설명했지만 수정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답이 틀렸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에 맞으면 돼요. 하지만 아니잖아요. 선생님 제가 1등을 하려면 뭘 해야 하는 거죠? 대상을 받은 사람이 대학에 갈 때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왜 이렇게 절박한 거지?’
영호는 그제야 눈앞의 학생이 15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뛰어난 수학적 성취에 눈이 가려져 학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수정아.”
“네?”
“혹시 집에서 부모님이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주시니?”
영호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학생부에 기재된 정보에 따르면 수정의 아버지는 서울대 공학 교수, 어머니는 의사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집안에서는 자녀에게 상당한 학업적 압박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아이도 어쩌면 학대에 가까운 공부를 강요받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제발 학원 좀 줄이라고 난리였는데요? 특히 아빠는 주말마다 학원 빼먹고 놀러 가자고 졸라서 떼어내느라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수정이 영호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본다.
“응?”
“네?”
“근데 왜 이렇게 등수에 집착하니? 금상도 충분히 훌륭한 결과야.”
“저는요, 1등이 좋아요.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느낌. 다른 사람들이 저를 올려다보는 그 순간이 정말···.”
수정의 눈이 반짝거린다. 마치 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는 느낌이 이러할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거든요.”
수정이 눈을 감고 마치 자신을 안아주듯 손을 가슴에 교차한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떤다.
후두둑.
영호의 팔에 닭살이 돋았다.
“수..수정아.”
'정상이 아니야. 정신 장애? 그렇다고 하기엔 평소엔 너무 멀쩡한데? 엄마가 의사면서 집에선 대체 뭘 하는 거지?'
영호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교차한다.
슬쩍 몸을 피하려는데 수정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박력에 영호가 움찔한다.
“선생님, 그래서 묻는 거예요. 대상은 고3이죠? 올해 졸업하는 거죠? 뭐 그러면 내년부터는 다시 1등일 테니까 별 신경 쓸 필요 없겠네요.
사실 졸업 안 해도 별 상관 없기는 해요. 이번에는 운이 좀 나빴던 거죠. 미국에서 온 그 교수님이 억지를 부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안전한 게 좋으니까 확인 정도는 해보려구요. 이름이 뭔가요?”
“유서하.”
“제가 우리나라 수학 상위 20명은 이름을 다 외우는데 처음 들어보네요. 역시 이번엔 그 사람한테 운빨이 터진 거였어요.”
평소엔 조용해서 몰랐다. 이렇게 말이 많은 아이인지.
이제는 짐작이 간다.
조용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즐기고 있었겠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수정의 말에 영호의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는 이 대화를 속히 끝내기로 했다.
“초등학생이야.”
수정의 뇌가 정지한 듯 눈을 깜빡인다.
“네?”
“유서하, 대상 받은 애. 초등학생이라고.
대상 받은 답안은 나도 받아서 읽어봤는데 솔직히 다 이해를 못했어. 능력이 부족한 선생이라 미안하다.”
진심을 담은 사과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눈에 초점이 없다.
“···말도 안 돼.”
15년 수정의 인생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왔다.
딩동뎅ㅡ
수업이 끝났다.
서하는 교과서와 필기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올라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빨리 해결 해야 하는데···.’
어젯밤부터 붙잡고 있던 문제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골드바흐 추측의 변형 문제였는데, 새로운 접근법이 떠올랐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서하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하루는 1,440분, 지금까지 사용한 시간 521분.
잠자는 시간(가족의 소등 시간이 정해져 있다) 480분을 빼면 순수 활용 가능 시간은 289분.
‘이 정도면 충분해. 거의 5시간이니까.’
서하는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중요한 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서하는 정확히 3시 19분 58초에 학교 정문을 나섰다. 횡단보도까지 1분 12초. 3시 21분 8초에 도착.
신호는 3시 21분 10초에 바뀔 예정이다.
서하는 이 패턴을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학교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파악한 것이었다.
신호등의 주기는 120초였다. 청신호 40, 적신호 80.
점심시간에는 보행자를 우선하는지 특별 신호조정이 있다.
이 조건을 파악하기 위해 쉬는 날 하루 종일 시간을 재며 신호를 지켜보던 날도 있었다. 덕분에 완벽한 타이밍을 알게 되었으니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다.
지금 한 발을 걸으면 바로 신호가 바뀔 것이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새로운 규칙이 추가됐나? 혹시 신호등 고장?’
하지만 자신만 제외하고는 신호를 기다리는 모두가 평온한 얼굴이다.
‘어디서 틀린 거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2년 동안 완벽했던 패턴이 깨졌다.
서하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서하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11초 후에 신호가 바뀌었다.
오전 8시를 기준으로 지금까지 몇 주기가 지난 거지?
8시부터 15시 21분 21초까지 7시간 21분 21초.
초로 환산하면 26,481초.
나누면?
서하의 걸음이 느려진다.
220.675
소수점이다.
‘0.675.’
27/40. 서로소. 더 이상 약분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이런 복잡한 분수가 나올 리 없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 될 리가 없다.
혼란을 느끼는 와중 몸이 휘청한다.
“어?”
서하의 몸이 강제로 멈춘다.
누군가 뒤에서 가방을 잡고 끌었다.
“빠아아아앙ㅡ”
순간 요란스럽게 경적을 누르며 자신의 눈앞으로 트럭이 지나간다.
위험했다. 정말로 죽을뻔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뒤를 돌아보는데···.
“서하야. 괜찮니?”
걱정스러워 하는 엄마의 얼굴. 뛰어온 것인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서은이도 뭔가 불안한 듯 울먹이는 표정이다.
“엄마?”
뜨거웠던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엄마가 왜 여기에···.”
서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서 있던 곳은 학교 앞 횡단보도 앞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집 근처 큰 길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은이랑 장보고 집에 가는 길이었지! 서하 널 발견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사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멀리서도 미영은 아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싶어 아이를 안고 힘껏 뛰었던 것이다.
“오빠, 안아줘!”
어느새 엄마 품에서 내려온 서은이 서하를 향해 두 팔을 내민다. 서하가 동생을 가볍게 안는다.
익숙한 무게와 포근한 냄새.
서은이 두 팔로 오빠의 목을 감싸안는다.
서하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맴돌던 숫자들이 사라지고, 쉴 새 없이 멈추지 못했던 계산들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빠, 괜찮아? 얼굴이 하얘.”
서은이 작은 손으로 서하의 뺨을 만진다.
“당연히 괜찮지. 오늘 조금 피곤해서 그래.”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서하가 애써 웃으며 대답한다.
“얼른 집에 가서 쉬자.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집에 가는 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졸졸졸.
개천에 흐르는 개울물 소리.
근처에는 여러 들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빠, 저 꽃 이름이 뭐야?”
“데이지랑 수국.”
5세,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할 나이.
서은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지만 백과사전을 모두 외운 서하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아! 평온하다. 평소 우리 가족의 모습 그대로.’
비로소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 * *
토요일 오전 10시,
서하는 705번 버스에 몸을 맡기고 대전 시내로 향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며칠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기억의 공백, 건널목에서 트럭 앞으로 뛰어들뻔했던 순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촉발한 신호등 패턴의 붕괴.
‘진짜 죽을 수도 있었어.’
서하는 그때 일어났던 일을 과소평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더 정확히는 그로 인해 슬퍼할 가족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원인을 밝혀내자.’
주어진 조건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가설을 세워 증명한다.
서하는 수학자다운 논리적 사고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기로 했다.
버스가 시내 중심가에 도착해 사람들을 쏟아낸다.
서하는 미리 조사한 대로 곧장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 안에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수필, 소설, 문제집 코너를 지나서 서하의 발이 멈칫한다.
수많은 의학서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현대 정신의학, 임상심리학 개론, 신경정신의학, 청소년 정신건강···.
천천히 제목을 훑어보다 마침내 자신이 찾는 정보가 담긴 책을 발견했다.
「강박장애의 이해와 치료」
강박사고(Obsession), 강백행동(Compulsion), 여러 가지 증상이 나와 있었지만, 자신의 케이스와 딱 떨어지는 설명은 없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춘다.
서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산수 강박증(Arithmomania)과 수학적 사고장애.
-산수 강박증은 숫자와 계산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특징으로 한다. 환자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거나 특정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며 수학적 패턴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주요 증상.
-시간, 거리, 개수 등을 강박적으로 계산.
-특정 숫자나 패턴에 대한 과도한 집착.
-수학 문제 해결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욕구.
-계산이 틀렸을 때 극심한 불안감.
-일상생활 기능의 현저한 저하.
각 항목을 읽을 때마다 자신을 대입해 생각해 본다.
밤새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골드바흐 추측.
수년간 신호등의 패턴을 연구하는 것은 정상인가? 패턴이 무너졌다고 패닉상태가 된 것은?
하루를 분과 초로 나누어 쓰는 것이 과연 평범한 일인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생긴 거지?’
서하는 조용한 구석 의자에 앉아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 사람, 심각하네.”
쿠르트 괴델.
20세기 최고의 논리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수학계에 혁명을 일으켰으나 말년에는 심각한 강박증과 편집증에 시달렸다. 음식이 독에 노출되었다고 믿어 아내가 준비한 음식만 먹었으며,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결국 굶어 죽음.
“쯧쯧.”
‘나보다 훨씬 심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어떻게···.’
하지만 다음 문단을 읽으며 서하의 안도감은 사라졌다.
‘괴델의 초기 증상은 미미했다. 20대에 그의 증상은 단순히 수학적 정확성에 대한 집착 정도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치료받지 않고 방치된 강박증은···.’
‘아···. 제기랄.’
‘아니야, 나는 다르지. 이미 문제를 인식했으니까.’
서하는 다른 수학자들의 케이스를 살펴보았다.
게오르크 칸토르.
집합론의 창시자. 1904년 한 학회에서 자신의 이론이 반박당하자 강박증이 양극성 장애로 발전. 끝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생을 마감.
아이작 뉴턴.
평생 양극성 장애를 앓음.
하루에 수십 번씩 손을 씻었으며 환각을 보기도 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
모든 수학자들의 스승, 1771년 백내장 수술 후 실명.
그러나 그는 강박적으로 계산을 멈추지 못함. 죽기 직전까지 천왕성 궤도 계산에 몰두.
장례식에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콩도르세 후작이 남긴 추도사는 ‘죽음이 드디어 오일러의 계산을 멈추게했다.’
여기도, 저기도 환자들 천지.
다수의 수학자들이 많건 적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섹션을 옮겨 이에 대한 진단과 치료법을 상세히 공부했다.
* * *
“하핫!”
서점에 온 것이 정답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치료.
90% 이상의 환자가 완치, 진단이 빠를수록 유리하다.
‘괴델이나 칸토르 시대에는 그런 증상이 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희망적인 숫자가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현대 의학 만세!’
집으로 걸어가는 길, 서하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재지 않았다. 평소라면 정확했을 도착시간이지만 오늘만은 그와 상관 없는 얘기였다.
‘기다리면 되지. 이게 뭐 별거라고.’
현자가 된 기분이다.
신호가 바뀌자 서하는 자연스럽게 길을 건넜다. 어렵지도, 괴롭지도 않다.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어.’
많은 위대한 수학자들이 숫자의 감옥에 갇혀 평생 벗어 날 수 없었지만 자신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서하는 다짐했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시계를 보지 않는다. 그냥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가 무엇이 중요한가?
평소라면 습관적으로 버스에서 내린 시간과 집 도착시간을 확인해 걸음 속도를 계산해 봤겠지만, 이런 것은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라, 밥 먹어야지!”
저녁 시간이다.
서하는 서둘러 손, 발을 닦고 상차림을 도왔다.
“우리 서하는 항상 수저를 반듯하게 놓는다니까?”
“맞아, 맞아! 어릴 때부터 그랬어.”
부모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
서하는 자신이 놓은 수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저의 끝과 사각 밥상의 끝이 정확히 맞닿아 있다.
완벽한 직각.
불안한 마음이 엄습한다.
“소시지 가져가라.”
접시를 받던 서하가 자신도 모르게 집게로 하나를 덜어낸다.
“왜 그러니? 소시지 안 좋아해?”
철호의 질문에 서하의 말문이 막혔다.
“아, 여보! 서하는 원래 접시에 7개만 올려. 서은이가 잘 안 먹으니까 그런가 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신은 단순히 8이라는 숫자가 싫었을 뿐이다.
그게 다인가?
왜 일곱 개를 고집했지?
7은 2^p-1로 표현 할 수 있는 메르센 소수다. 동시에 (7-1)/2=3도 소수가 되는 안전 소수(Safe Prime)이기도 하다. 정 칠각형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가 불가능한 첫 번째 정다각형이다.
서하는 쉽게 표현 되는 6 같은 완전수(1+2+3=6)나 8 같은 세제곱 수(2³=8)가 싫었다.
7은 7일뿐 다른 조합으로 깔끔하게 표현 할 수 없다.
“아아아아!”
서하는 절망했다.
“왜 그러니?”
미영이 머리를 쥐어뜯는 아들을 보며 묻는다.
“아..아니에요. 숙제를 깜빡한 게 생각나서요.”
서하는 밥을 급하게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쉰다.
‘완전히 망했다. 다르긴 개뿔···.’
그때 문득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하가 무의식적으로 옷장 문을 연다.
옷장을 가득 채운 체크무늬 옷들.
‘서..설마.’
급히 서랍 안에 있던 자를 가져와 체크무늬에 가져다 댄다.
1 : 1.618
황금비였다.
자신이 그동안 마음에 들어 했던 옷들은 모두 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수에 대한 서하의 강박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뿌리가 깊었다.
“아아악! 완치율 90%라며! 쉽다며!”
서하가 이불을 덮고 비명을 내지른다.
‘설마 내가 나머지 10%?’
기분이 좋아 긍정적인 면만을 보았었지만 이는 수학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옥천군청 2층, 교육문화과.
“어? 교장선생님! 웬일로 직접 나오셨어요?”
군청 교육공무직 주무관 고길영이 놀란 표정으로 김재형 교장을 맞았다.
“이보시오, 예산 신청을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답이 없어요!”
재형이 책상을 탁 치며 사무실로 들어선다.
“아, 그 건 말입니까? 아직 검토 중이라서···.”
“검토? 일주일 전에 삼일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건강이 좋은지 목청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소리를 듣고 옆 사무실의 직원들이 하나둘씩 나와 고개를 내민다.
“교장선생님, 목소리 좀 낮춰주시죠.”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 옥천군의 보물을 이런 식으로 대해요? 이것 좀 보시오!”
작정하고 왔는지 재형의 가방에서 신문 스크랩이 쏟아진다.
대부분은 지역신문, 빨간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놓은 것은 전국지였다.
아래 직원을 시켰는지 출력한 인터넷 기사에도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옥천 투데이]
-옥천 도담초 5학년, 전국 수학 경시대회 대상 수상. 시골 학교 출신이 명문고 선배들을 제치고 이루어낸 쾌거!
[고조선 일보]
-초등학생이 사교육 없이 초중고 전국 1등, 시골에서 피어난 수학 천재.
“보세요! 지난달부터 전학 문의가 오기 시작했어요.”
교장이 더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네?”
주무관은 이 사람이 대체 왜 교육청을 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도담초의 자랑, 5학년 1반 유서하 학생이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탄 이후 말이오! 글쎄 근처 학교에서 전학을 온다고 하지 않겠소? 영동, 금산에서도 문의 전화가 오고 있어요!”
“정말입니까?”
처음 듣는 얘기인 듯 주무관의 눈이 동그래진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민족이란 말이오. 좋은 교육환경이라고 하면 부모는 자식을 위해 어디든 이사 갈 준비가 되어있어요.
지금 옥천 인구가 얼마요? 한 4만쯤 되나? 지방 소멸 위기다 뭐다 해서 이쪽에 들어가는 예산이 얼마요? 그런데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서 성과가 있기는 한 거요?”
답답한지 재형이 가슴을 쿵쿵 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옥천의 명예를 드높인 학생이 돈이 없어 대회를 못 간다고 하지 않소! 이게 말이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시오?”
이는 물론 과장이었다.
기사가 난 이후 뒤늦게 서하의 존재를 알아차린 교장은 부랴부랴 교실로 찾아가 그를 만나보았다. 어린 나이에 중앙지 신문에 까지 얼굴이 실렸으니 한껏 성취를 뽐내리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그가 마주한 것은 세상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평범한 아이였다. 기삿거리라고는 ‘멧돼지 출몰’ 정도 밖에 없는 시골 바닥에서 전국구 천재가 나오자 몸이 단 지역 기자들이 이미 실컷 서하를 괴롭힌 이후였던 것이다.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또 대회에 참석하라는 교장을 보며 서하가 눈을 껌뻑거린다.
“네? 대회요?”
“그래! 내가 알아보니 충북지역만 해도 매달 경시대회가 있다고 하던데. 또 저기 경북이나 충남에도 많아요. 기왕이면 다 나가서 상을 받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 학교 이름도 빛낼 겸.”
교장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이를 눈치를 챈 서하가 눈을 반짝였다.
일단 표정을 관리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뒤 공손히 대답한다.
“그게, 일단 저는 시도 대회는 나가지 않기로 했어요. 다음 달에 전국 대회가 있기는 한데 그것도 좀···.”
‘시도 주관 대회는 상금도 없고.’
서하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교장의 마음이 급해진다.
“이유가 뭔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서하는 얼마 전 우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장학금 준다니까 왜 거절을 해? 나 신우현이야. 한두 명 후원하는 거로는 잔고에 기스도 안 난다고!
우현은 후원을 빌미로 서하에게 무엇을 요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완고한 부부는 여러 차례 그가 내미는 돈을 거절했다.
“부모님이 받지 않으시겠다네요. 책이랑 논문 보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요.”
이는 부부 두 사람의 뜻이었다.
-그래도 공부하려면 돈이 들 텐데? 경시대회 다니는 것도 다 있는 집에서나 가능한 거야. 차비, 숙박비 그거 무시 못 한다? 나중엔 해외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건 그때 생각해 보려구요. 부모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죠.”
사실 서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얼마 전 대대로 내려오던 선산을 부동산에 내놓았다는 것을.
아무리 고맙다 해도 우현은 남이고, 자식 교육은 본인 돈으로 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공무원 월급으로 네 가족 부양도 만만치 않은데 서하에 이어 둘째까지 공부에 재능을 보이자 큰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럼 나중에 국가 장학금이라도 알아보자. 그건 뭐라고 안 하시겠지.
“상금 말고 또 있어요?”
-사실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다 봐야지. 기업 장학금은 학자가 될 사람들이 절대 받아선 안되는 돈인데 그것마저도 초등학생들한테는 안 줘. 하물며 정부나 지자체가 성과도 없는 개인에게 장학금을 내줄리가 없지.
“에이, 그럼 어차피 안 되는 거네요.”
-대신 내년에 올림피아드에서 1등 하면 다 방법이 있어. 그때까지만 좀 참자.
서하는 부모님을 사랑했다.
아버지는 소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신다. 그것도 부족해 부부는 자식들 먹는 건 직접 키워야 안심이 된다며 상당히 큰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자신과 동생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모두 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뜻을 존중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서하는 자신으로 인해 집이 힘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1등을 해서 상금을 받아오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음 달 대회는 왜?”
교장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도담초가 언론에 보도됐다. 그는 이 일이 단발성으로 끝나길 원하지 않았다.
“제가 어린 동생이 있어서요. 저는 혼자 가도 되는데 부모님이 허락해 주지 않으세요. 그럼 전날 가족이 전부 이동해야 하는데 서울은 물가도 비싸고 해서···.”
서하가 미묘하게 말끝을 흐린다.
“뭐라고?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며칠만 기다려 보거라. 내가 방법을 찾아보마.”
사무실로 돌아온 교장은 즉시 행정실장을 불렀다.
“김 실장, 우리 학교 예비비가 얼마나 남아있나?”
“예비비요? 잠깐만요.”
실장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교장선생님, 이번 달에 냉난방비 추가 지출이 있었고 화장실 수리비까지 나갔습니다. 예비비는 없다고 보셔야 해요. 있다고 해도 돈 나갈 곳이 한가득입니다.”
“그럼 다른 항목에서 빼서 쓸 수 있는 건 없나?”
“교육청에서 내려온 예산은 모두 사용처가 정해져 있어요. 임의로 변경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교장이 사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를 들은 행정실장이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됩니다. 학교 예산으로 학생 개인을 지원하다니요! 큰일날 일입니다. 감사에 걸릴 수도 있어요.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다른 학부모가 교육청에 민원이라도 넣는다면 줄줄이 옷 벗을 수도 있습니다.”
듣고 보니 그의 말이 옳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재형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때 교장실 전화가 울렸다.
따르르르릉.
“네, 도담초등학교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아이를 그쪽 학교로 전학 보내고 싶어 전화드렸는데요.”
전교생 120명.
도담초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충북 초등학교의 40%가 전교생 60명 이하니까.
지방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폐교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전학?
교장의 눈이 번쩍 뜨인다.
“네..네! 어디서 오시는 건가요?”
-영동에서요. 저희는 옥천이랑 멀지 않은데요, 신문에서 봤는데 유서하라는 학생이 있다면서요? 저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데···. 혹시 그 학생이 어떤 선생님께 배우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쪽으로 이사를 하고 애 아빠는 조금 멀리 운전해 출근하면 되니까요.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
무려 세 명이나 전학 문의를 해 왔다.
교장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하를 대회에 보내야겠다고.
* * *
옥천의 인구는 가파른 하락세를 그리고 있다.
대전의 베드타운으로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것도 잠시.
최근 10년간의 극심한 인구 유출.
아무리 예산을 쏟아부어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인구 유입?
“이보시오, 내가 나 혼자 살겠다고 이러는 것 같소? 학부모가 애를 전학시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란 말이오. 이사를 온다는 말이잖소.”
교장의 지적에 주무관의 눈이 확 뜨인다.
지방에서는 지자체 예산의 상당 부분이 인구 유치에 쓰인다. 최근 정부에서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인구 한 명을 유치하기 위해 지자체가 쓰는 비용은 최소 2천만 원에서 최대 4천만 원까지.
그런데 가족이 통째로 이사온다? 별다른 비용을 투자하지 않고도?
그는 즉시 이것을 과장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30분 뒤, 김재형 교장은 생전 처음으로 군수를 만나게 되었다.
* * *
다음 주,
학교에 간 서하는 깜짝 놀랐다.
[수학 명문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도담 초등학교]
[5학년 1반 유서하, 전국 수학 경시대회 대상]
학교 교문에 요란하게 걸려있는 현수막.
부끄럽다. 촌 동네다 보니 아마 군 전체에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 도담초가 수학 명문이었던가?
서하는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교무실로 달렸다. 그러나 발견한 것은 해탈한 듯한 표정의 담임선생님.
자리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서..선생님?”
무슨 일인지 설명을 구했지만 얼굴이 벌게진 윤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하아···. 나도 미치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자세히는 모르겠어. 우리 학교에 있는 과학고 출신 교사가 수학을 기똥차게 가르친다고 주변에 소문이 났다네. 전학 문의가 꽤 있었다고 들었어.
다 네가 대상을 탄 덕분이겠지. 이거 내가 말하고 다닌 거 아니다?”
억울한 듯 어금니를 꽉 깨문 윤미를 보며 서하는 의심을 풀기로 했다.
“지원금은 무슨 얘긴데요?”
어젯밤, 퇴근한 철호가 기쁜 듯 가족과 소식을 공유했다.
군에서 새로 조례가 통과되었는데 서하가 그 대상이라는 내용이었다.
“옥천군 우수인재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래. 어제 군의회에서 통과됐다고 하더라.”
철호가 설명을 이어간다.
“조례 내용을 보니까 군에서 정한 전국 단위 학술대회에서 입상한 학생에게 연간 200에서 1,000만 원을 지원한다는 거야.”
미영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그녀도 자식들 교육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탓이다.
“서하는 대상이니까 천만 원이겠네?”
“응! 소급 적용해서 올해 대상자도 바로 입금해 준다네. 대신 지원금을 받으면 대회를 꾸준히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설명을 들은 미영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거참 이상하네. 상금 성격도 아니고···.”
“뭐가 됐든 우리한텐 다행이지.”
두 사람이 웃는 것을 보니 서하도 좋았다.
서은이도 가족의 밝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꺄악거리며 마당을 뛰어다닌다.
‘설마 이게 교장선생님 나비효과는 아니겠지?’
어른들의 사정을 서하는 알 수 없었다.
“자, 모두 다 탔지? 서은이 안전벨트 제대로 맸어?”
철호가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보며 확인한다.
그런 아버지의 말투에서 서하는 약간의 들뜸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서하의 경시대회 일정은 가족여행 비스름한 것이 되어있었다. 옥천군의 지원으로 더 이상 비용을 걱정하지 않게 된 덕분이다.
“네!”
서은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대답한다.
“여기 서하 가방 있고, 서은이 옷도 잘 챙겼고···.”
미영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차에서 내려 다시 한번 트렁크를 확인해 본다.
“어차피 하룬데 이렇게 큰 가방이 필요할까?”
시골 남자인 철호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전국 단위 경시대회는 주로 서울에서 열린다.
서울은 도시인들이 여행 하기 좋은 장소는 아닐지 모르지만 서하네 가족 같은 촌사람들에게는 몇 번을 가도 새로운 별세계였다.
특히 미영과 서은은 서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미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정리하더니 트렁크를 닫는다.
부르릉.
차가 출발한다.
서은이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겠는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하가 잘한다고 칭찬해 주자 우쭐해져서 율동까지 시작한다.
‘벌써 네 번째.’
서하는 서울대에서 열리는 이번 경시대회를 끝으로 일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했다.
지난 세 번의 대회에서 모두 대상을 탄 서하는 수학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폭풍의 눈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는 학계에 국한되어 있었고 일반 대중들에게 수학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올림피아드에서 죽을 쑨 것도 이유 중 하나려나···.’
한국의 올해 성적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이란, 헝가리에 이은 종합 7위다.
임수정만 개인 3위로 겨우 체면치레했을 뿐.
수학적 성과는 없어도 시험은 잘 봤던 과거에 비추어 보아도 많이 부족한 결과다.
관광호텔에 짐을 풀자 서은이 바로 침대로 뛰어든다.
커다란 침대가 신기했는지 트램펄린처럼 폴짝폴짝 뛰다가 옆으로 데구르르 구른다.
미영이 살 것을 적어 둔 쪽지를 꺼내더니 엎어져 있는 서은을 들쳐메고 밖으로 나갔다.
서하는 가족들을 위해 조금 더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지만 우현의 말을 떠올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충분해. 더는 낭비야.”
서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엔 즐거웠지만 모두 비슷비슷한 문제들 뿐.
이제는 조금 더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문제를 풀고 싶었다.
서하가 오른손 엄지를 가져대 자신의 맥박을 확인한다.
'다행이다. 아무 문제 없다.'
강박증은 불안 장애의 일종.
대부분의 경우 증상을 보일때 심박수가 증가한다.
서하는 끊임없이 이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 * *
“오빠! 시험 잘 보고 와!”
날이 추운지 서은의 볼이 빨갛다.
서하가 양손으로 동생의 볼을 잡고 추위를 녹여준다. 따뜻한 촉감이 좋은지 서은의 얼굴이 풀어진다.
“금방 올 거야. 이따가 맛있는 거 먹자.”
“응!”
무거운 강당 문이 열리고 서하가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힐끗, 힐끗.
여기저기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서하가 어색한 기분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안쪽으로 걸어간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골적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쟤가 그 애 맞지?”
“생각보다 키가 크네. 중학생인 줄.”
지난 대회 결과가 알려졌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서하는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애착 연필과 커터 칼을 꺼내 심을 다듬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허리를 돌리며 뒤를 보는데···.
“히익ㅡ!”
서하가 급히 입을 막고 앞을 쳐다본다.
뒤에서 귀신 같은 얼굴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누구지?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야?’
창백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
째려보는 눈빛이 범상치 않다. 무시무시한 적의에 소름이 돋았다.
딩동뎅ㅡ
종이 치고 시험이 시작된다.
서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강박증세를 인지한 이후로 서하는 그동안 무던히 노력해 왔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계산을 의식적으로 끄는 훈련은 마치 물 속에서 숨을 참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생각을 마음껏 종이 위에 펼치면 된다.
서걱서걱.
서하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인다.
수정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시험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하의 연필이 종이 위를 춤추듯 움직인다.
마치 오랜 주박에서 풀려난 죄수처럼 자유롭게 생각의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수식들이 살아 움직인다.
함수 공식의 곡선이 퍼져나간다.
포물선이 우아한 아치를 그리며 솟구쳤다가 부드럽게 내려앉고, 삼각함수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진다.
지수 함수가 처음엔 바닥을 기듯 완만하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치솟아 올랐다.
‘아하!’
출제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볼록함수의 성질을 이용하면 이 복잡해 보이는 식이 한 줄로 정리될 수 있다.
하지만 서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문제의 본질은 대칭성이지.’
머릿속에 곡선이 펼쳐지며 끝없이 나아가 출제자가 의도한 구조를 돌파한다. 그리고 결국 그 안의 깊고 깊은 곳에 숨겨진 순환 대칭성을 찾아냈다.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부등식을 n 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객체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서하가 흥분된 마음으로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수식을 기하학적 언어로 변환하자 문제의 본질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출제자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증명이 서하의 손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 *
수정이 시험지를 훑어본다.
문제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모두 다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다행이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안심하고 있지?’
과거의 자신에게 시험은 손꼽아 기다릴만한 즐거운 이벤트였다. 시험이 끝나면 달콤한 과실이 여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젠가부터 그녀의 내면에 이상한 감정이 자리 잡아버렸다.
패배감, 열등감.
수정이 거칠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이런 게 두려울 리 없지.’
수정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저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은 결코 약하지 않다. 혹시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금방 일어나 웃으며 극복 할 수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라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것.
그 아이에게 처음 진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집중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언제부터 수학이 좋았지? 이유는 뭐였고?’
답은 어려워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걸 쉽게 척척 해내는 자신이 좋았다.
물론 그 뒤에 쏟아지는 찬사도.
아빠, 엄마···.
겉으론 말리는 척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1번 문제.
[실수 a, b, c > 0에 대하여 a + b + c = 3일 때, √(a² + 1) + √(b² + 1) + √(c² + 1) ≥ 2√3 의 공식이 성립함을 증명하시오.]
라그랑주 승수법이나 산술 - 기하 평균을 쓰면 쉽게 풀리는 문제다.
하지만 수정은 연필을 들지 않았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아이가 무언가에 빠져 신나게 연필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수정이 이를 악문다.
‘나도 할 수 있어.’
안전한 길을 택하지 말자. 모범 답안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만점이 아니다.
수정은 문제를 다시 응시했다.
√(a² + 1)···. 이 형태를 벡터의 놈(Norm)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민코프스키 부등식을 써볼까?’
아마 이 안에 있는 누구도 이것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각사각.
수정의 연필이 바쁘게 움직인다.
시간이 흘러간다.
아무리 계산을 이어가도 자꾸만 오류가 난다.
‘부호를 잘못 적었나? 계산 실수?’
아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
‘집중해, 임수정.’
수정이 가볍게 자신의 뺨을 두드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조금 더 신중하게.
째깍째깍.
‘왜 이렇게 안 풀리지?’
평소라면 이런 문제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냥 하던 대로 풀까?’
안된다.
그렇게 하면 또 저번과 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심사위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충격적인 답안을 제출하고 싶었다. 유서하의 답안을 보고 학교 선생님이 보였던 반응처럼.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머리가 자꾸 딴 생각을 강요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뭐지?’
20년 만에 국제 올림피아드 최연소 진출자였던 자신이 저 초등학생 보다?
올림피아드 모든 기출 문제의 풀이법과 응용까지 길을 다 꿰고 있다 자신한다.
동년배 중 자신보다 더 많은 대회에 나간 사람은 없다고 감히 단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마음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부정한다.
문제는 지금이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분명히 풀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모든 계산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간단해 보이는 부등식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연필 끝에서 나온 수많은 수식이 종이를 가득 채웠지만 정작 증명은 완성되지 못했다.
째깍째깍.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간다.
“시험 종료까지 30분 남았습니다.”
감독관의 차분한 목소리가 시험장에 울려 퍼진다.
수정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1번 문제에 매달린 지 2시간 30분이 되었단 소리이니.
수정은 순간 평소대로 모든 것을 풀어버리고 그만 개운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동시에 그렇게 하면 자신은 유서하를 평생 이길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든다.
‘만점은 포기한다.’
수정은 모든 것을 던지고 1번 문제의 증명에 매달렸다.
세 살 때부터 수학의 신동이라 불려 왔던 수정이다.
같은 조건 이라면(나이) 국제 올림피아드에서도 반드시 1위를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다. 또 그럴 예정이기도 하고.
사각사각.
연필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들 자신의 답안을 마무리 하고 있다. 하지만 수정의 손은 허공에 멈춘 채 떨리고 있었다.
작은 물방울이 시험지 위로 떨어졌다.
뚝, 뚝.
빼곡히 적혀있던 수식들이 번지기 시작한다.
수정은 결국 마지막까지 증명을 끝낼 수 없었다.
“시간 다 됐습니다. 모두 손 내리세요.”
수정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눈물이 번져 못난 모습이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차분하게 시험지를 정리하는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그의 손이 움직여 연필을 소중하게 집더니 필통에 넣는다.
연필 끝에 매달려 있는 못된 표정의 오리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망할 오리···.”
수정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대로 보내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그가 걸어 나간다.
“잠깐만!”
그가 자신을 스쳐 가는 순간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서하의 손을 잡고 말았다.
서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은 시험 중에 자신을 째려 보고 있던 사람.
“어?”
급히 손을 빼내려는데 이 사람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아마도 중학생?
참가 자격이 따로 없는 대회이지만 응시자는 대부분 고등학교 2,3학년이다.
그중에서 서하는 유독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눈앞의 학생도 충분히 눈에 띄었다.
서하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울음을 꾹 참고 있는 표정.
무엇인가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얼굴에서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진다.
간절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결국 서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저기···. 무슨 일이세요?”
“아···음···. 그러니까.”
수정의 입이 몇 차례 달싹거렸지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대체 무어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목구멍이 메어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다시 떨어질 뿐이었다.
두 사람에겐 안됐지만 오해를 부르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주위에서 웅성거린다.
“쟤 왜 저래?”
“몰라, 사랑 고백?”
“임수정 아냐? 공부해야 한다고 남자는 다 깠다던데 저런 취향이었어?”
그제야 찬물을 끼얹은 듯 수정의 정신이 확 돌아왔다.
‘어떻게 저렇게 저열한 말을···.’
분노로 수정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여기서는 모두를 향해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서하의 말이 한발 빨랐다.
“저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서하가 눈으로 책상 위를 가리킨다.
엉망이 된 시험지. 종이 위에는 그녀가 세 시간 동안 길을 잃고 헤맨 흔적이 가득했다.
‘아..안돼!’
수정은 아이들이 수군거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그녀는 급히 몸으로 책상을 가렸다.
“이거 제출용 답안지 아냐! 오늘 그냥 시험 삼아 써 본 건데?
지..진지하게 봤으면 당연히 만점이지. 하하하! 오늘은 친구가 꼭 같이 가자고 해서 온 거거든. 혼자 대회에 가기 무섭다나? 내가 제대로 쓰면 친구 순위가 한 단계 밀리기도 하고.”
사실 수정에게 친구 따윈 한 명도 없었다.
그녀가 급하게 시험지를 집고는 가방에 쑤셔 넣는다.
‘뭐지? 이 안타까운 사람은?’
얼굴은 예쁜데 사람 대하는 것이나 감정 표현이 지나치게 서툴러 보였다.
“그러니까···내가 사람을 착각했어. 이만 갈게. 미안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도피를 선택했다.
수정이 가방을 들고 급히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강당 안의 책상 간격이 그리 넓지 않았다. 바닥에는 응시생들의 가방이나 짐들이 가득했고.
우당탕ㅡ
수정의 발이 누군가의 가방끈에 걸려 넘어진다.
아무런 완충도 없이 철퍼덕 하는 소리를 내며.
“괜찮아요?”
서하가 급히 따라붙어 그녀를 살핀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줘.”
“네?”
“쪽팔려 죽고 싶어. 제발 그냥 가줘.”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수정이 고개를 푹 숙인다.
아까부터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주변 학생들이 하나둘씩 몰려든다.
수정은 수치사에 혹시 조건이 있다면 바로 지금 자신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일단 나가요. 저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았어요?”
몇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서하는 그녀의 시험지를 보았다.
답을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해석학을 적용한 풀이가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 문제는 분명히 민코프스키 부등식을 이용하여 증명 할 수 있다.
‘지금 수준이라면 무리겠지만.’
여러 가지로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하의 물음에 수정의 눈이 커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 * *
“너 혹시 내 이름 아니?”
강당 밖 벤치에 앉아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수정이 서하를 보며 묻는다.
하지만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아니요.”
울컥 하는 감정이 몰려왔다.
자신만 상대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임수정. 이번 수학 올림피아드에 대표로 나갔었어.”
자신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했지만 그의 표정이 시큰둥해 보인다. 그러다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는다.
“아!”
서하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20년 만의 최연소 진출자.
하지만 수정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알아. 망한 거. 선생님 말씀이 올해는 멤버가 특히 좀 약했다더라. 잘하는 선배들이 다 졸업해서. 내년엔 다를 거야. 적어도 내가 개인 1위는 할 생각이니까.”
수정이 작은 주먹을 꽉 쥔다.
하지만 서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 내년에도 나가는구나. 그럼 선발전에서 만날 텐데.’
“그런데 저한테는 왜···.”
“아! 이거 봐봐.”
이미 버린 몸.
더 이상 피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수정이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낸다.
“이 증명, 어떻게 생각해?”
서하가 그녀의 답안을 유심히 살핀다.
생각했던 대로 괜찮은 접근 방식이었다.
“방향은 옳았다고 봐요. 그런데 여기···.”
서하가 펜을 꺼내더니 수식을 적기 시작한다.
벤치 위에 종이를 대고 쪼그려 앉아 문제를 푸는 두 사람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학생들이 한마디씩 하며 지나간다.
하지만 수정은 그런 것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각사각.
"여기서 벡터 공간을 L² 놈으로 정의하셨는데 이 부등식에서는 조건이 조금 달라요."
서하가 연필로 수식을 적어 가며 설명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내린 결론과 다른 지점에 도달했다.
"√(a² + 1)를 벡터 (a, 1)의 놈으로 본 건 좋은 아이디어예요. 그런데 민코프스키 부등식을 직접 쓰려면···."
서하가 새로운 수식을 적는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벡터···.”
총명한 수정은 알아듣기 어려운 서하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했다. 자신이 의도했던 증명이 타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더 완전한 형태로.
수정의 마음속에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
자신의 이론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력으로 완성 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그저 시험지를 힐끗 보았을 뿐.
그런데 자신이 실패한 증명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히 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서하는 수정이 만나보지 못한 벽이었다. 어쩌면 평생을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너 수학 어디서 배워? 어느 대학 교수님이 가르쳐주시니?”
대학 수학까지 진도를 나간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두려웠다.
“아니요? 책을 보내주시는 분은 계시는데 기본적으로 혼자 해요. 누가 답을 알려주면 재미없기도 하고···.”
독학으로 여기까지?
이 나이에?
하긴 시골에 살고 있으니 마땅한 선생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분한 마음이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개운한 느낌.
모든 의문이 풀렸다.
‘역시 나는 특별해.’
그저 이 아이가 자신보다 조금 더 특별할 뿐이다.
꼬르륵.
긴장이 풀려서인지 뒤 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요거트 한 컵 외에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시험 전에는 대체로 그랬다.
떡볶이라도 같이 먹자고 할까 고민하던 찰나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서은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와 오빠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앞을 막듯 서하의 옆에 섰다.
“오래 기다렸어?”
서은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런데 이 언니는 누구야?”
서하가 상황을 설명 하려는데 수정이 무릎을 굽혀 서은과 눈높이를 맞춘다.
“너 완전 예쁘다. 뭐야뭐야!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수정은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다.
빵빵한 볼에 땡그란 눈, 작은 입술까지. 서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순간 서은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오빠를 차지한 언니에게 화를 내려고 했는데 칭찬을 들으니 망설여진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서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헤헤. 난 유서은. 언니는?”
셋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미영과 철호는 조금 떨어져 이를 지켜보았다.
시험 시간이 끝났는데 서하가 나오지 않자 입구까지 찾으러 온 것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자애와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모습.
서하만큼은 아니지만 저 아이도 충분히 조숙해 보였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밥 먹으러 가자!”
수정이 한사코 거절했지만 부부는 기어이 그녀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시골에서는 원래 밥 대접은 꼭 해야 하는 법이니까.
식당으로 가는 길,
서은이 숫자 놀이를 하자며 서하를 졸랐다.
그래서 시작된 게임.
“2.”
서하가 말하자마자 서은이 뒤를 잇는다.
“삼!”
서은이 같이 하자며 자신을 쳐다본다.
해보진 않았지만 수정은 이것이 무슨 게임인지 알 것 같았다.
“5.”
계속 이어지는 소수의 행렬.
서은은 이것을 숫자 잇기라고 불렀다. 부서지지 않는 숫자를 하나씩 키워가며 말하는 놀이.
“47.”
“오십 삼!”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제법이다.
아마도 자주 해봤겠지.
수정은 장난으로라도 져 줄 생각이 없었다.
어느새 숫자는 100을 훌쩍 넘어갔다.
“173.”
“백 팔십 일!”
“땡! 틀렸어. 179를 빠뜨렸네.”
아이랑 놀다 이렇게 열을 올린 적은 처음이었다.
“에잉, 전에는 300도 넘었었는데···.”
서은이 울상을 짓는다.
“오빠랑 평소에 이렇게 노니?”
“응! 숫자 뽀개기도 하고, 이것도 하고!”
어느새 친밀해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는다.
수정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애들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강남에서 배운 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부부가 모두 순박한 얼굴이라 깜빡 속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저들이 조기 교육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을.
‘무섭다, 유씨 집안.’
수정의 오해가 풀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 * *
삐삐삐삑.
한 달 만에 돌아온 집.
익숙한 냄새와 정돈된 책상이 자신을 반긴다.
부모님은 저녁에나 오실 것이다.
가방을 바닥에 던지고 허물을 벗듯 옷을 훌훌 털어낸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녀를 편안하게 받아준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수정이 갑자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쪽팔려 죽겠어, 정말!”
다음 주 학교에 가면 대체 무슨 소문이 퍼져있을까?
발이 이불속에서 허공을 가른다.
그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이딴거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수정이 이불을 훌훌 털어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노력의 흔적들.
수정의 눈에 투지가 돌아왔다.
'먼저 오늘 걔가 했던 증명을 복기해보자.'
수정이 가장 어려운 해석학 교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찾는다.
세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접근법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서울, 강남구 소재 스튜디오.
카메라 앞에 선 우현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화면을 바라본다.
깔끔하게 정돈된 헤어스타일, 캐주얼 하지만 결코 저렴하지 않은 복장 그리고 얼굴에 드러나는 자신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타 수학 강사의 위엄이 물씬 풍긴다.
최근 그는 최상위권 학생을 위한 새로운 강의를 런칭했는데 시작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역시 신우현’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과거 그의 강의는 지나치게 효율만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곤 했었다.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도 정답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노하우,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그를 순식간에 스타 강사로 만들어준 원동력이었지만 수강생들의 실력 자체를 올려주지는 못한다는 지적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수강생 불신’의 아이콘이었다.
‘너희들의 머리 따윈 믿지 않으니 이해하려 하지 마라. 내가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따라와라.’
물론 그의 팬덤과 수강생 베이스가 워낙 탄탄해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신우현 강의 듣다 보면 레알 빡침]
-내가 빡 대가리인 건 사실이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 할 필요까진 없잖아.
└하지만 올랐죠?
└그래서 안 들을 수가 없음.
└니가 신우현이라고 생각을 해봐라. 프린스턴 수학과에서 필즈상 수상자한테 배웠잖아. 수포자들이 같은 인간으로 보이겠냐?
└노노, 신우현은 2등급도 벌레 취급함.
└1등급 되면 겸상 가능하냐?
└1등급이면 프레임 시리즈 강의 들어도 됨. 거기서부터 인간.
“요즘 내가 2등급 이하는 인간 취급도 안 한다는 썰이 돌더라.”
우현이 새로운 교재 프레임을 강의하다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다.
수강생이 워낙 많아 실강은 거의 나가지 않게 되었지만 라이브 강의는 학생들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들을 수 있어 그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건 사실 아닌가요?
└정보 : 신우현은 과거 ‘이걸 왜 못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풀리는데 이걸 틀려? 너희가 사람이야?’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왈왈!
└크앙! 크르릉!
└냐오오오옹.
└아옳옳옳옳옳옳옳!
“진정들 해. 오해니까. 나도 몇 년 전에 깨닫게 된 건데 본질적으로 너희와 나는 그렇게 다르지 않아.”
└아니 선생님,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또 이러다 능욕ㅋㅋㅋ 한두 번 속냐.
└신우현 기만질 또 시작이다.
“어휴. 업보가 있으니 진실을 말해도 제대로 전달이 안되네. 내 잘못이다, 인정해.”
└그렇습니다. 업보 청산은 인정에서 시작하는 거죠.
└ㅋㅋㅋㅋㅋㅋㅋ
└집어치우고 첫사랑 이야기나 해보세요.
“오늘은 그래도 제대로 얘기를 해보고 싶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철학자랑 수학자라고 생각해. 본질적으로 논리적 사고라는 면에서 둘은 같거든. 그래서 과거 두 분야에서 동시에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거야.”
└근데 왜 우리랑 쌤이 다르지 않다는 건가요?
└또 말 돌리기?
“이건 먼저 지극히 주관적인 내 의견이라는 단서를 달고 시작할게. 이 세상엔 자칭 혹은 타칭 천재들이 너무 많아. 다 모으면 10만 명쯤 될지도 모르겠다.
수학계 인사들로 한정 지으면 한 1,000명쯤 될 거야. 학계에서 유의미한 논문을 발표한 사람들이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천재인가 하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그럼 대체 누가 천재라는 건가요?
“천재. 하늘 천(天), 재목 재(材). 라틴어 지니어스(genius), 신이 부여한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야. 고대부터 동서 대륙이 서로 짠 것도 아닐 텐데 정확히 같은 의미의 단어를 만든 거지. 이런 사람이 수천수만 명이나 될 것 같아?”
└그럼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천재는?
“내가 항상 얘기하지. 천재는 업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다섯 살에 미적분을 풀어서 천재라고? 웃기지 마. 열일곱 살 애들은 대부분 미적분을 풀 줄 알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숙(早熟)한 애들을 천재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저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한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아이큐가 180, 200이라고? 멘사 공인이라고? 뭐 어쩌라고? 그래서 걔들이 그걸로 뭘 했는데? 암기가 조금 뛰어나면 천재야? 인터넷에 쳐보면 다 나오는 정보를 외우고 있으면 대단한 거니?”
└어헣헣. 설득 된다.
└제군들, 속지 마라!
└갓직히 저 말이 맞긴 하지. 개나 소나 다 천재야.
└그래서 결국 누가 천재인거임?
“천재는 100년, 자주 나오면 50년 정도에 한 명씩 나와. 한 명도 없던 시기가 길었던 적도 있었고 동시에 몇 명이 존재하기도 했어.
고대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텔레스, 근세에는 뉴턴, 오일러, 가우스, 현대에 와서는 아인슈타인, 라마누잔 정도가 천재라 부를만하지.”
└기준 ㅈㄴ빡세네.
└이거 기만질 같은데?
└결국 저 정도 위인이 아니면 다 같은 휴먼이란 소리?
“여기에 천재를 도울만한 조력자 레벨이 있어. 천재는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1,000명이야. 그중에는 필즈상, 노벨상 수상자들도 다수 있겠지.
나는 내가 여기에도 속하지 못할 거라는걸 알았어. 그래서 수학자가 되는 걸 포기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너희와 나는 다를 게 없어. 이건 내 진심이니까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럼 인류는 아인슈타인 이후 수십 년간 천재가 없었네요?
“정확히 봤어. 현대 수학과 물리학은 아직 아인슈타인의 이론 너머의 것을 찾아내지 못했거든. 아인슈타인이 왜 위대해?
상대성 이론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포용하기 때문이야. 뉴턴이 지구에서 적용되는 법칙을 알아냈고 아인슈타인은 그걸 우주까지 확장한 거지. 그다음은 뭐다?”
└양자역학.
└양자!
└뭐야, 이거 무서워.
└이상하게 빠져든다.
“이건 너희가 대학 가서 스스로 알아보도록 해.
아무튼 그 뒤로 천재는 없었다. 이게 내 결론. 하지만 천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존재할지도 몰라.”
└누군지 알 것 같은데.
└프린스턴에 있는 그 사람?
└신우현 스승 아냐?
└요즘 밀레니엄 문제 해결 중이라는데···.
“그 분도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어쩌면, 만약에 어쩌면 말이야.”
우현이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한국에서 그 천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거의 천재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이건 아이큐만 높은 놈들이 왜 천재가 될 수 없는지와 맞닿아 있는데···.
지능은 기본이야. 거기에 창의성, 직관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학적 구조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이걸 다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 이런 사기 조합을 다 갖추어야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이라 할 수 있겠지.
나는 여기에 아주아주 가까운 한국인을 한 명 알고 있어. 하지만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어.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천재는 뭐로 말해야 한다?”
└업적!
└논문?
└한국인이라니ㄷㄷㄷ 사실이라면 대단한데.
└제자 중 한 명?
└선배나 후배일 수도 있지.
└그 까다로운 신우현이 이렇게 말하니까 기대가 되긴 한다.
“자자! 그건 나중에 그 사람이 업적을 세우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썰도 풀어줄게. 니들이 이상한 얘기해서 시간 다 썼잖아!”
스트리밍이 종료되고 우현이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본다.
“천재라···.”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게 된다.
우현은 서하를 만난 순간부터 이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가 수강생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진 재능을 다 펼쳐보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천재들이 적지 않다는 것.
우현은 적어도 서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 * *
“너 뭐하냐?”
오랜만에 시간을 내 옥천을 찾은 우현이 서하의 책상을 보더니 기어코 한마디 내뱉는다.
올림피아드 1차 예선이 곧이다.
그러나 그동안 보내준 기출문제집은 모두 가지런히 한쪽에 쌓여있다. 딱 봐도 신품 상태 그대로. 한 페이지도 넘겨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 저거요?”
서하가 민망한지 머리를 긁는다.
“그래, 왜 안 풀어봤어?”
“사실 풀어보려고 했는데 재미있는걸 발견해서요.”
문제를 푸는 중인지 서하의 책상 앞에는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우현이 다가가 무엇을 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IMO 1988 Problem 6,
[Let a and b be positive integers such that ab+1 divides a²+b². Show that (a²+b²)/(ab+1) is the square of an integer.]
악명 높은 1988년 올림피아드 6번 문제.
보내기 전 빼려고 했는데 실수로 들어간 모양이다.
올림피아드에서는 절대 난제 수준의 문제를 출제하지 않는다.
이는 1959년 루마니아에서 처음 대회가 개최된 이후로 현재까지 내려오는 절대적인 규칙이다.
‘단 한번, 1988년만 제외하고.’
이 문제는 호주 문제 위원회의 전문가들조차 제한 시간 내에 풀지 못했던 괴물이다. 심지어 수론 전문가 4명이 6시간을 투자해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중 별표(**) 표시와 함께 ‘너무 어려워서 출제하기에 부적절함’이라는 경고 까지 달렸던 문제였다. 하지만 위원회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며 출제를 강행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그런데 지금···.
“서하야, 이거 어디까지 풀었니?’
우현의 목소리가 떨린다.
참지 못하고 그가 다가가서 서하의 풀이를 보았다.
「···특별히 b가 충분히 클 때, a'
0임도 증명 가능하다.따라서 (a', b)는 원래 해 (a, b)보다 작은 새로운 해가 된다. 이는 (a₀, b₀)의 최소성에 모순이다.」
‘이런 미친!’
서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잘못됐나요? 논리에 빈틈이 있었나?”
이 증명의 핵심은 이차형식 이론(Theory of Quadratic Forms) 이라고 불리는 접근법.
서하는 이미 이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아니, 완벽해.”
기존의 증명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비에타 점핑(Vieta jumping)이라고 불리는 무한 하강법을 이용해 답을 도출했다. 가능한 가장 간결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따라서 k는 반드시 완전제곱수여야 한다.」
“왜 이렇게 증명한 거야?”
우현의 질문에 서하가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최소원소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보다 더 작은 원소를 만들어 모순을 도출하는 방식이 가장 깔끔하잖아요.”
수학사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불리는 증명 기법.
서하는 본능적으로 여기에 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떻든 답만 찾아내면 된다는 자신 같은 범인의 사고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현이 의자에 주저앉는다.
‘저런 책 따위는 서하에게 필요 없었네.’
'이 천재를 어서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
강렬한 열망을 참을 수가 없다.
'이제 조금, 아주 조금만.'
우현은 내년 올림피아드 문제가 최대한 어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월요일,
서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새벽 공기가 차갑다. 11월 중순, 벌써 겨울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오늘은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예선일.
서하가 이불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연다. 시원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어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가벼운 운동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문을 나선다.
새벽 6시, 마을은 조용하지만 곳곳에서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서하는 가벼운 보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하가 러닝을 시작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수학자 라마누잔,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32세에 요절.
원인은 극도로 불규칙한 생활 패턴과 운동 부족. 매일 장시간 앉아 수학 연구에만 몰두.
수학사는 서하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 책이었다.
동서양 수학의 발전 과정을 따라가며 위대한 수학자들의 생애를 엿보는 것은 무엇보다 즐거웠다.
가우스가 어떻게 일곱 살의 나이에 1부터 100까지의 합을 순식간에 계산해 냈는지, 오일러가 시력을 잃고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던 이야기, 갈루아가 결투를 앞두고도 자신의 수학 이론 정리에 매진했던 황당무계한 야사까지.
그들도 자신처럼 어린 시절이 있었고, 수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순간이 있었으며,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희열을 느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서하는 때때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들과 대화하고 호흡하는 감각마저 느꼈다.
‘라마누잔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죽음이 수학계에 미친 손실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라마누잔이 32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남긴 3,900여 개의 공식과 정리 중 상당수가 그의 사후 60년,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컴퓨터가 발달한 후에야 그의 직관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밝혀진 것이다.
‘그가 만약 70살까지 살았다면 어땠을까?’
짧은 생애에도 그가 연구하던 무한 급수와 연분수 이론은 현대 암호학과 컴퓨터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편지에서 남긴 세타 함수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큰 화두인 초끈 이론과 M 이론의 중요한 차원을 결정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세타함수에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성격 진짜 안 좋네.’
수학자들은 왜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을 증명도 없이 그냥 툭 던져놓고 가는 걸까?
서하는 그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당당하게 미완성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공개 할 수 있는 것인지.
특히 라마누잔은 꿈에서 여신 나마기리가 공식을 알려줬다며 증명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써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거의 틀린 부분이 없으니 서하는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
그가 읽은 수학자들의 역사는 그야말로 건강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니 달린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막상 시작해 보니 달리는 것에는 건강적인 면 외에도 이점이 많았다.
자동으로 걸음을 세던 머리가 어느새 계산을 멈춘다. 그리고 달리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앉아서 끙끙대며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앉던 해답들을 때로는 달리는 중에 생각해 내곤 했던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십분도 채 못 뛰고 헥헥거렸는데 이제는 30분도 거뜬하다.
‘이게 엔돌핀인가?’
저 멀리 누군가가 보인다.
“서하야! 오이랑 토마토 좀 가져가라!”
하우스를 하시는 최 아저씨가 서하를 보며 손을 흔든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엄마가 좋아하실 거예요!”
서하는 이미 옥천의 유명인이었다.
마을을 한바퀴 돈 서하가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에 적당한 열기가 돌았고 머릿속도 깔끔히 정리된 기분이었다.
“어서 와라! 또 뭘 이렇게 주셨대? 얼른 씻고 아침 먹자!”
미영이 서하의 손에서 봉지를 받아 든다.
샤워를 하고 식탁에 앉자 평소보다 푸짐한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부모님이 오히려 긴장하신 것 같네.’
“엄마, 그냥 평소처럼 차려도 되는데···.’
“그래도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니. 제대로 먹고 가야지.”
사실 미영은 어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이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그랬다. 선잠을 자다 깨서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샌가 찬 수가 많아진 것이다.
“와! 맛있는 거 엄청 많아!”
일찍 일어나 힘든지 눈을 반쯤 감고 있던 서은이 비명을 지르며 상 앞에 앉는다.
그런 서은을 보며 철호가 말했다.
“오빠 시험 잘 보라고 엄마가 준비하신 거야.”
“그럼 걱정할 거 없겠네. 오빠는 모르는 게 없는데? 내가 물어보면 뭐든지 다 대답해 주잖아. 엄마도 선생님도 모른다고 자주 그러신단 말야!”
서은의 말에 가족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 *
대전 시내 한 고등학교,
서하가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와 있었다.
‘와! 이렇게 사람이 많구나.’
올해 국내 KMO 참가자는 총 8천여 명.
전국 16개 시도에 시험장이 마련되었는데, 서하가 배정받은 대전 지역만 해도 5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렸다.
한 곳으로 부족해 고등학교 3개 동에 나누었다니, 전국에서 수학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두 참가하는 것 같았다.
1차 시험에서 선발할 인원은 200명인데, 이 안에 든다면 대학 입시에서 특기자나 과학 영재 전형에 지원할 스펙이 된다.
복도와 교실 곳곳에서 이미 많은 학생들이 마지막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다.
또 다른 학생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공책에 적어둔 공식을 반복해서 되뇌고 있다.
전에 본 적 없었던 긴장감이었다.
감독관이 들어온다.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예선을 시작하겠습니다. 시험 시간은 3시간, 문제는 총 25문항, 모두 오지선다 객관식 문제입니다.
한국을 대표할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시험이니 만큼 모두 후회 없이 보길 바랍니다.”
문제지와 답안지가 배포되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문제가 있을까?’
올림피아드 1차에서는 해마다 아주 뛰어난 학생을 골라내기 위해 기발한 문제가 나온다고 들었다.
서하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문제 1.
[동전 4개를 동시에 던질 때, 앞면이 2개 나올 확률은?]
확률 문제다.
조합이나 이항을 이용하면 쉽게 풀 수 있다.
서하는 풀이도 적지 않고 바로 답을 골랐다.
문제 2.
[정사각형의 4개의 꼭짓점을 빨강, 파랑, 초록으로 칠할 때 서로 다른 색칠 방법은 몇 개인가?]
‘하하!’
색칠 문제라니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4색 정리가 떠오른다. 서하는 지금까지 증명에 실패한 문제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단서가 떠오를 때마다 적용 가능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시험해 보는 중이다.
‘4색 정리에 비하면 이런 문제쯤이야.’
번사이드 보조정리를 적용하면 쉽게 풀 수 있다. 회전 군의 크기는 4, 각 회전에 고정되는 색칠방법을 계산하면···.
서하의 손이 거침없이 정답을 골라 나간다.
문제를 풀어나갈수록 난도가 올라갔다.
7번은 교묘하게 조건을 놓치기 쉽도록 함정을 파놓았지만 서하에겐 소용 없었다. 그는 숫자를 파편이 아닌 패턴의 군(群)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건이 바뀌어도 군 전체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10번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수의 양쪽 해를 다 계산한 뒤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 그러나 서하는 근을 수가 아닌 그래프의 궤적으로 인식했다.
11번부터는 본격적인 고난도 문제였다.
복소수를 이용한 기하 문제, 수열의 극한을 다루는 해석학 문제, 그래프 이론 등등.
‘어?’
문제를 풀던 서하의 펜 끝이 멈춘다.
‘이상한데?’
1, 4, 2, 5, 3, 2, 5, 3, 1, 4, 3, 1···.
서하가 반쯤 마킹한 답안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1에서 5까지 고르게 분포한 번호들.
서하의 머릿속에 5 x 5 정사각 격자가 그려진다. 그리고 마킹된 수에 좌표가 달려 그 안에 새롭게 배열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서하는 수평과 수직으로 배열된 숫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직교 배열?’
우연이 아니다.
우연으로 이런 숫자가 나올 확률은 50만분의 1. 직교 패턴까지 고려해 보면 천억분의 1도 안 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모든 문항의 정답을 하나의 조합 구조 안에 심어 둔 것이 분명했다.
서하는 문제를 제쳐두고 퍼즐을 풀기 시작했다.
머릿속 체스판 비슷한 모양의 격자에 숫자가 채워진다. 세로줄을 따라 내려가면 숫자들이 겹치지 않는다. 가로줄을 따라가도 오묘하게 다섯 숫자가 빠짐없이 분포한다.
‘라틴 정사각형.’
서하는 곧바로 가설을 세웠다.
문제를 격자 위의 좌표 (I, j)로 보고 계수 a, b가 어떤 값인지 찾으면 모든 답이 복원될 것이다.
‘정답은 (a·i + b·j) mod 5 + 1.’
서하가 펜을 내려놓는다.
25칸이 모두 숫자로 채워졌다.
어떤 행에서도, 어떤 열에서도 질서를 보이는 아름다운 구조다.
서하는 다음 문제의 답을 알 것 같았다. 좌표 (3, 3)에 해당하는 위치.
‘4번.’
가설을 검증해 본다.
문제를 푸는 그의 손이 빨라진다.
정답은 여지없이 4번.
서하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시험의 설계자가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이 규칙이 보이니?’
KMO 1차 시험의 만점자는 한 해 10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정답을 모두 맞춘 학생들에게만 출제자가 전하는 찬사의 메시지. 물론 그는 학생들이 이것을 알아차릴 것이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하는 그것을 시험 중간에 모두 채워버렸다.
14, 15, 16번···.
문제를 풀 필요도 없이 답은 이미 눈앞에 있다.
계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답을 대입한다. 확인해 보면 언제나 정확했다.
그렇게 24번까지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25번.
‘5번?’
분명히 1번이어야 할 정답이 다른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서하의 오른쪽 눈꺼풀이 떨렸다.
격자 공식이 틀렸을 리 없다. 24문제 동안 완벽했는데 25번에서만?
‘내가 뭔가를 놓쳤나?’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되짚어본다. 하지만 어디에도 오류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펜을 꽉 쥐고 25번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보았다.
폴리큐브.
회전과 반사, 대칭을 이용하는 조합론 문제.
하지만 여전히 답은 5번이었다.
두근, 두근.
서하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진다.
‘이건 수열이나 퍼즐 문제가 아냐. 답을 써야 하는 시험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킹을 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냥 빨리 5번 마킹하고 끝내자.’
눈을 질끈 감고 사인펜을 답지에 가져다 대본다.
하지만 칠 할 수가 없었다.
완벽하지 않은 패턴, 설명되지 않는 예외.
이것을 인정하고 배열을 망칠 수가 없다.
서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카이스트 수리과학과 교수 연구실,
김지윤 교수가 의자에 앉아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다.
그녀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조합론과 설계 이론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내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학자였다.
김 교수는 조합설계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유한체 위의 조합 구조에 관한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암호학과 통계학 분야에서 그녀의 논문 인용 수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고, 국내에 몇 명 되지 않는 차기 필즈상 후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올해 KMO 1차 출제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단순한 봉사 차원이 아니었다.
전국에 있는 수학 영재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녀는 시험을 빌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특출난 재능이 있는 학생이 있는지 알아볼 심산이었다. 답안을 완성하면 메시지를 이해하는 학생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것은 직관력과 숫자 감각, 그리고 논리력을 테스트하는 또 하나의 숨겨진 시험이었다.
그런데···.
“ 아아악! 대체 누가 내 작품을 망쳐놓은 거야! 너냐?”
그녀의 히스테리를 피해 숨어있던 조교가 움찔한다.
답안 변경 전화를 받은 것이 그였다.
“교수님, 그거 제 탓 아니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수학회에서 결정한 거예요.”
“망할 꼰대들! 그럼 나한테 맡기지를 말던가! 왜 시켰다가 자기들 맘대로 바꿔?”
그녀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한다.
“위원회 측도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 했어요. 정답 번호가 다섯 개씩 균등하게 분포되면 숫자를 세서 찍는 놈들이 꼭 나오니까 적어도 하나는 바꿔야 한다고요.
그리고 솔직히 누가 그걸 알아보겠어요? 다들 문제 푸느라 바빠서 답안 안에 숨긴 배열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할걸요? 애초에 숫자만 보고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조교가 억울한지 교수를 보며 항변한다.
그는 이 순간 뛰어난 수학자들은 왜 모두 정상이 아닐까 상관 관계를 고민했다.
자신은 지극히 노멀한 인간이어서 연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럼 미쳐야 하는데 이런 식은 곤란하다.
저 변태 같은 교수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사람이라니···.
“만약 있으면 어쩔 건데?”
“네?”
“만약 그걸 알아보는 애가 있으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당연히 1번이어야 할 답이 5번인데! 네가 그 고통을 알아? 내 손으로 질서를 훼손해야 하는 고뇌를?”
그딴 거 모른다.
조교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없어요, 없어. 제가 장담합니다. 우리나라 애들은 그런 거 못 해요. 맨날 기출 문제집이나 푸는 애들이 무슨···.”
당장 조교 자신도 KMO 출신이다. 그것도 2차 통과자.
이 대학만 해도 1차 통과자들이 널려있는데 무슨···. 존경하는 교수님의 과대평가는 황송하지만 절대 그럴 일 없다고 그는 단언 할 수 있었다.
“그..그런가?”
조교의 단호한 부정에 교수가 한발 물러난다.
‘설계 이론에 재능이 있으면 보일 텐데?’
자신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낸 트릭이었다.
“네, 만약 있으면 교수님이 우리 과로 데리고 오세요. 제가 선배로 모실게요.”
“음···.”
“박군아. 그래도 말이야···.”
“네.”
“혹시 배열을 완성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
“완성이요? 그건 불가능한 거 아닌가요?”
이미 25번 문제의 답이 5번으로 바뀐 시점에서 교수가 의도한 라틴 스퀘어가 나올 확률은 0에 수렴하게 되었다.
난이도가 가장 높은 23번과 4번까지 모두 맞춘 학생이라면 분명 비교적 쉬운 마지막 문제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배열을 완성한다?
‘그거 고의로 틀려야 하는 거잖아?’
“있어 그런 게. 너 같은 아이들은 모르는 세계가 있단다.”
의문투성이인 조교의 얼굴을 보며 김 교수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준다.
그러자 조교가 발끈했다.
“또 그러신다. 저 노원구 천재 박형주라니까요? 그때 중계동 학원가에서 절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는데···. 제가 랩에서 이런 대접 받는 거 아시면 우실 거예요.”
“그러니까 왜 대학원을 와서 그래. 의전원에 가거나 좋은 데 취업 하지.”
조교가 입을 삐쭉 내밀고 들리지 않게 구시렁거린다.
암호가 좋아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데 재능이 없다니···. 하지만 담당 교수의 성과를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어차피 저 교수의 마음에 차는 학생은 그동안 한 명도 없었기 때문. 그래서 KMO 시험 문제를 직접 내겠다고 하신 건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김 교수가 커피를 마신다.
‘아,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엔 자신의 배열을 망친 수학회에 화가 났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답안으로 라틴 스퀘어를 만드는 놈이 있다면 그야말로 제대로 미친놈일 테니까.
“그래, 수학적 미학을 모르는 놈들은 어차피 뭘 해도 안돼.”
“네?”
“아니, 너 말고.”
조교는 진지하게 이 랩에서 탈주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 * *
시험을 마치고 나온 서하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커트라인은 여유 있고.’
만점보다 마음의 평화가 서하에게는 훨씬 중요했다.
완성한 답안은 그야말로 흠결 하나 없는 아름다운 형태. 답이 하나 틀렸다는 것은 그에게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서하야!”
우현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스포츠카 앞에서 손을 흔든다.
“선생님! 여긴 웬일이세요?”
서하가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뛰어갔다.
“너희 아버지 오늘 바쁘시다며? 대신 내가 픽업 왔어.”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었던 서하의 표정이 밝아진다.
배차시간이 길어 난감한 처지였다.
“타라.”
우현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외제 차가 낯선지 서하가 차 안을 신기하게 둘러본다.
부아앙ㅡ
우현은 동승자를 생각해 최대한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시험은 어땠어? 너한텐 쉬웠지?”
사실 그는 결과가 궁금했다.
그래서 오늘 픽업을 자청한 것이기도 했고.
서하의 수학적 능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워낙 엉뚱한 짓을 자주 벌이는지라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음···.”
서하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또 왜?”
객관식이라 틀릴 여지도 없을 텐데 이 미적지근한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에요. 잘 본 것 같아요.”
서하가 우현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얼버무린다. 그러더니 눈을 슬쩍 돌려 창밖을 본다.
“같아요는 뭐야? 너는 그런 애매한 표현 안 쓰잖아?”
“하나 틀렸는데 후회는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틀릴 가치가 있었다고 할까요?”
“아! 진짜!”
우현이 혀를 찬다. 하지만 곧이어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말해봐야 뭐하겠냐? 그냥 너를 믿어야지.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서하가 우현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 오후를 즐기는 사람이 많은지 도로에 차가 많다.
“하나 틀렸으면 1차 통과는 문제 없겠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난이도는 어땠어?”
“음···. 임수정 누나 정도면 다 맞을 것 같아요.”
“너 정도는 아니지만 걔도 원래 유명했어. 그 정도면 괜찮겠다.”
“2차 끝나면 합숙한다면서요?”
서하는 벌써 동생과 떨어질 일이 걱정이었다. 많이 속상해할 텐데···.
“응, 3차 시험 준비해야 하니까. 너 그런데 영어는 좀 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하가 깜짝 놀란다.
“네? 읽는 건 문제 없는데 왜 그러세요?”
“내년 대회는 영국이야. 참가자들은 모두 한 건물에 있는 숙소를 쓰거든. 영어를 할 줄 알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야.”
“말은 자신 없네요. 외국인은 가끔 오시는 원어민 선생님 밖에 만나본 적 없어서···. 그래도 필담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말이 유창하지 않아도 의미 정돈 통할 것 같고.”
“다들 못하니까 괜찮아.”
“100개국에서 수백 명이 모이면 엄청 재미있겠네요.”
한 반에 20명도 되지 않는 교실에서 공부한 서하에게는 이것도 무척 기대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현이 고개를 젓는다.
“그럴 것 같아?”
“아닌가요?”
“생각해 봐. 거기 오는 애들은 대체로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야. 불쾌한 일들투성이지.”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야. 말이 안 통한다고 가만 놔둘 것 같아? 그것 말고도 두뇌를 자랑하는 방법은 많잖아?”
“어···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이고(Ego) 와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똘똘 뭉친 10대를 과소평가 하지 마라. 그러고 보니 넌 이상하게 그런 게 없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강한 건가?”
우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봐왔지만 그는 아직도 서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튼 암산 배틀, 님(Nim), 도트 앤 박스(Dots and Boxes), 루비스 큐브 맞추기 등등 여러 가지 게임이 있지. 널 이기겠다고 여기저기서 달려들걸?”
“암산 배틀이랑 큐브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들어본 적 없어요.”
“룰은 간단해. 따로 연습 하지 않아도 너라면 한두 번 해보면 잘할 거야. 그런데 진짜 메이저는 따로 있어.”
“뭔데요?”
“체스.”
“불공평하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바둑이면 한중일이 압도적일 텐데. 그래도 체스는 직관적인 데다 모두가 룰을 아니까.”
“선생님도 하셨어요?”
우현이 한숨을 쉰다.
“IMO 기간에 열리는 비공식적인 체스 토너먼트가 있어.
나는 꽤 강한 편이었지만 8강에서 러시아 애한테 졌지. 그놈이 우승까지 했으니 별 불만은 없지만 우쭐대는 게 아주 꼴 보기 싫었다고.”
“고작 체슨데요?”
“그런 분위기가 아냐. 그것도 엄연한 국가 대항전이니까.
러시아나 동구권, 유럽에서는 체스가 국민 스포츠야. 대회도 많고 상금도 크지. 날 이긴 놈은 러시아 고등부 챔피언이었어.”
“저도 선생님처럼 적당히 하다 지면 되겠네요.”
서하의 의욕 없는 모습에 우현이 발끈한다.
“안 되겠다. 당장 체스를 배워두는 게 좋겠다.”
“네? 지금요?”
“그래. 생각해 봐.
네가 나중에 아주 훌륭한 수학자가 돼서 밀레니엄 문제를 풀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러시아 놈팡이가 티비에 나와 ‘유서하 별거 아니던데요? 체스로 저한테 상대도 안 됐어요.’라고 인터뷰하는 거야.”
서하가 얼굴을 찡그린다.
“그건 좀 싫네요.”
“그렇지?”
끼이이익ㅡ
우현이 급하게 차를 돌렸다.
도착한 곳은 서하도 와본 적이 있는 대전의 대형서점.
우현은 그곳에서 프로페셔널 플레이어를 위한 체스 교본과 고급 체스 세트를 하나 샀다.
“자! 일단 나부터 이겨보자. 이래 봬도 체스 동아리 출신이라 만만치 않을걸?”
집으로 가는 길에 서하가 차 안에서 체스 교본을 훑어본다. 그러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시실리안 디펜스 백 승률 52%, 흑 승률 27%, 무승부 21%.’
이 책은 각 수마다 가능한 응수 유형별 경우의 수를 계산해 놓았다. 3수 후에는 이미 수천만 가지 변화가 존재하지만 승률에 영향을 주는 유의미한 수는 한정적이다.
서하는 조용히 책에 빠져들었다.
우현이 옆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영과 짧게 대화를 나눈 우현이 체스판을 펼친다.
서하는 교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기본 룰부터 설명해 줄까?”
“아니요. 대충 이해했어요.”
서하가 책을 덮으며 자리에 앉는다.
‘체스는 확률론과 닮았다.’
각 수마다 승률이 할당되어 있다.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처럼 상대방의 이전 수들을 관찰해서 다음 수의 확률 분포를 추정할 수 있다.
서하의 머릿속에 8 x 8 크기의 체스판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서하가 각 말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경로를 시뮬레이션 해 본다.
“그럼 시작해 보자.”
우현이 퀸 앞의 폰을 두 칸 밀었다.
‘1. d4, 퀸스 갬빗 계열.’
확률 계산이 시작되었다.
‘일단 첫판이니 가장 확률이 높은 1. d5.’
서하가 둔 첫수의 기대 승률은 44.2%.
우현이 묘한 미소를 짓더니 바로 다음 수를 두었다.
서로의 말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음?’
서하의 눈썹이 올라간다.
우현이 가장 승률 기대치가 높은 수 대신 f5를 두었다.
클래시컬 더치.
여기서 파생되는 변화는 거의 무궁무진하다.
우선순위를 두고 방어해 보지만 전투에선 이겨도 큰 흐름을 보면 어느새 말들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새 손해가 누적되어 간다.
우현이 마지막 수를 둔다.
“체크메이트.”
“졌어요. 다음 판이요.”
서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이 체스의 모든 확률을 계산할 수는 없다.
상대가 나의 의도대로 두게 만들어 경우의 수를 좁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서 승률을 계산 할 수 있다.’
첫판을 가볍게 이겼던 우현의 표정이 어느새 진지해졌다.
체크메이트를 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불과 다섯 판을 두었을 뿐인데 더 이상 게임을 쉽게 끝낼 수가 없다.
‘점점 이기기가 어려워.’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도 지금의 서하를 보고 겨우 오늘 하루 체스를 배운 애송이라 생각지 못할 것이다.
서하가 완전한 집중 모드로 들어갔다.
스미스 모라 갬빗.
진행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선생님의 수 선택이 균등분포를 따르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거야. 하지만 표본이 쌓이고 있다. 폰이 자유롭게 활개 치지 못하도록 동선을 제한하는데 집중.’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미영이 믹스커피에 얼음을 동동 올려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를 듣지 못했다.
서하의 손끝에서 나이트가 움직였다.
‘Nc6에서 Ne5로. 중앙 장악과 동시에 선생님의 비숍 라인을 차단.’
우현이 움찔한다. 서하가 둘만한 수를 다섯 개 정도 생각해 뒀었지만, 이것은 그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선생님도 상대가 예측 가능한 수를 둘 때 강해진다. 하지만 패턴을 벗어나면 계산 시간이 길어져. 의외의 수를 두고 수싸움으로 몰고 가면 이길 수 있어.’
우현은 어쩌면 이 판이 평생 마지막으로 서하를 체스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난 서하라고 해도 이는 그의 자존심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첫날은 아니지.’
우현이 교환을 강요한다.
물론 자신이 손해다. 하지만 이는 서하의 계산에 없는 수일 것이다.
역시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교환을 받아들인다.
‘어른스럽지 못하네.’
우현이 쓴웃음을 짓는다.
지기 싫어서 판을 엎어버리려는 선생이라니.
그래도 이것 역시 엄연히 체스의 한 부분, 이런 전략도 있다는 것을 서하는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현은 승리를 포기하고 무승부를 노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서하가 비숍을 후퇴시킨다. 그답지 않은 소극적인 무브.
‘그래, 그럴 줄 알았어.’
15년의 경험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아무리 천재라도 하루라면 바짓가랑이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보수적인 방어가 계속된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말이 좀 부족해도 분명히 서로 끝낼 수 없는 시기가 온다.
그런데 15수째,
서하의 퀸이 갑자기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어?”
‘아, 이런···.’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서하가 지난 몇수 동안 수비적인 무브를 보였던 것은 실제로 퀸의 은밀한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순간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우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드로우 트랩.”
상대가 무승부를 노릴 때 사용하는 역심리 전략이었다.
서하의 퀸이 우현의 킹을 위협하기 시작하며 체스판에 긴장감이 감돈다.
무승부를 위해 길목을 잡으려 했던 것이 실수였다.
“Qd5+.”
서하의 차분한 목소리.
우현이 킹을 피했지만 파국은 정해진 수순이다.
지금부터는 외길.
서하의 강요를 회피할 방법이 없다.
“체크메이트.”
정적이 흘렀다.
우현이 멍하니 체스판을 바라본다.
“어이가 없네. 아무리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지만.”
불합리한 결과에 우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럼, 다음 판 할까요?”
서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오늘은 그만두자. 다음에 만전 상태로 하자고.”
하지만 우현은 확신했다.
앞으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날은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저 빛나는 서하의 눈빛이 자신에겐 너무 눈부셔 보였다.
* * *
토요일 오후, 서하는 방에서 체스 교본을 보는 중이었다.
옥천의 겨울은 뼈가 시릴 만큼 춥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이불을 덮고 책을 읽다 때때로 동생의 그림을 봐준다.
"귤 먹을래?"
둘을 흐뭇하게 보고있던 미영이 찬장을 뒤진다.
"응!"
"네."
아들, 딸이 사이 좋게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서하가 상 위에 귤 놓을 자리를 정리하는데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하야ㅡ”
‘날 찾아올 사람이 있나?’
미영이 손을 멈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서하야! 친구 왔나보다!”
‘친구?’
어릴 때 가끔 동네 친구들이 축구하자고 찾아오긴 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대문이 열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저 김준식이라고 하는데요, 서하랑 같은 반이에요.”
쭈뼛거리는 몸짓과 목소리.
“어머! 어서 들어오렴.”
아들에게 친구가 찾아온 것이 기쁜지 미영의 표정이 밝아진다.
하지만 서하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무슨 일이지? 쟤랑은 대화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때 서하의 시선이 준식의 손으로 향한다. 문제집을 들고 왔다.
“마실 거 가져다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네. 감사합니다.”
준식이 거실에 앉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은이도 낯을 가리는지 어느새 오빠 뒤로 숨어 빼꼼 그를 내다본다.
서하는 준식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지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저기···.”
막상 오긴 했는데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준식은 한 달 전 도담초로 전학 왔다. 이 학교에 수학을 아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수업은 모두 알고 있는 기초.
더 어려운걸 하고 싶다고 말해도 선생님은 고개만 젓는다.
“아직 기본이 부족해서 안돼.”
선생님의 말에 화가 났다.
“그럼 서하는요? 걔는 왜 맨날 우리처럼 보충도 안 하고 그냥 가는데요?”
수학 경시에서 전국 1등을 했다는 5학년.
엄마는 되도록 그 아이와 친해지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같은 반인 것이 무색하게 말 한마디 붙여볼 기회가 없었다. 평소에는 항상 다른 애들과 얘기 중인 데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간다.
준식은 지금까지 금산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였다.
모든 선생님들이 자신을 칭찬했고 언제나 주변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은 자신이 강남 8학군에 가도 충분히 잘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여기선 모든 것이 처음부터다.
“음···. 서하는 좀 달라. 준식이 너는 엄청 똑똑한 아이야. 그러니까 서하하고 비교하면 절대 안 된다?”
까칠한 자신의 물음에도 자상하게 타이르는 선생님.
그 모습에 준식의 속이 오히려 뒤틀렸다.
이곳 아이들 대화의 중심은 언제나 서하였다.
“대박!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서하 미국 간다더라?”
“아니라던데? 바로 대학 간다고 들었어.”
“중학교 가면 이제 누가 숙제 알려주냐? 서하가 있으면 걱정 없었는데.”
유서하는 항상 조용하다.
잘난척하지도 않고 친구를 차별하지도 않는다.
준식은 반 여자애들이 대부분 서하를 좋아한단 걸 전학 온 지 며칠도 지나기 않아 알게 되었다.
‘전국 대회 1등?’
‘나도 나가면 입상할 자신 있어.’
준식은 자신을 증명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어제 내내 집에 있는 문제집을 뒤져 가장 어려운 문제를 찾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용기!
서하를 보자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준식은 용기 있게 말을 꺼냈다.
“너 수학 잘한다며?”
“어?”
준식의 말에 허를 찔린 듯 서하가 움찔한다.
“내가 문제를 하나 가져왔는데···.”
준식이 주섬주섬 책을 펼친다.
그때 뒤에 숨어 있던 꼬마 아이가 기쁜 듯 튀어나왔다.
“와! 오빠도 숫자 좋아해?”
갑자기?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준식의 머리가 멈춘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으..음. 좋아해.”
“와아! 그럼 나랑 놀자. 숫자놀이!”
다섯 살 아이와 놀이라니. 하지만 기대하는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빨리 놀아주고 보내면 되니까. 게다가 숫자라면 자신 있다.’
“그래. 뭐할 건데?”
“숫자 잇기!”
으스대는 다섯 살 서은의 표정.
준식이 보기에도 귀여웠다.
난처해하던 서하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럼 같이 하자.”
서하의 말에 준식이 급히 묻는다.
“자..잠깐만. 숫자 잇기가 뭔데?”
“소수를 말하는 거야. 어릴 때 이러고 놀았거든. 작은 수부터 차례대로 말하면 돼”
“응! 엄마, 아빠는 내가 다 이겨. 오빠랑 수정 언니는 못 이기고 유치원 애들은 나랑 안 해줘.”
서하는 부모와 다르게 동생에게 져주지 않나 보다.
준식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거라면 문제 없지. 빨리 하자.”
그렇게 놀이가 시작되었다.
“2.”
“삼!”
“5.”
“7.”
금방 끝난 거라 생각했는데 쉽지 않다. 어느새 숫자는 100을 넘어갔다.
“101.”
“백 삼!”
“···107.”
조금 늦었다.
준식의 등에 땀이 흐른다.
어느새 숫자는 200을 넘었다.
“227.”
“이백 이십 구!”
순간 준식의 얼굴이 밝아진다.
꼬마가 실수를 했다.
“어? 그거 소수 아니지 않아?”
“헤헤. 이겼다!”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서은이 일어나 꿀렁꿀렁 이상한 춤을 춘다.
묘하게 마음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그거 소수 맞아. 잘 계산해 봐.”
나눠보니 소수.
부끄러움에 준식의 얼굴이 빨개진다.
“다..다시 하자!”
틀린 부분부터 이어지는 지옥의 숫자 잇기.
그동안 패자는 모두 준식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자신만 틀린다.
준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분명히 서하에게 문제 배틀을 신청하러 여기 온 것이었는데.
“439.”
“사백 사십 삼!”
준식의 차례. 머리가 하얘진다.
‘467? 469? 471?’
여러 가지 숫자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돈다.
“사..사백···.”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다.
“오빠 왜 그래?”
서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준식을 바라본다.
준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아냐. 나 이만 갈게.”
준식이 문제집을 집어 들고 서둘러 일어난다. 그리고 음료수가 오기도 전에 신발을 신고 도망치듯 밖을 향해 달렸다.
“어? 서하야, 친구는?”
쟁반에 콜라와 주스를 가져온 미영이 떠나는 준식의 뒷모습을 보며 묻는다.
“서은이랑 놀아주다 갔어요.”
딸을 보니 뭐가 좋은지 빵긋빵긋 웃고 있다.
“착한 애구나?”
미영의 말에 서하와 서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준식은 그날 이후 다시는 서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KMO 2차 시험은 카이스트에서 열린다.
혹시 서울에 가야 하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각 도마다 시험장이 마련되어 다행이었다.
서울이 싫은 건 아니지만 차가 너무 막히고 공기가 좋지 않아 갈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다.
“잘 보고 올게요.”
“그래, 이따 끝나고 전화해!”
대학 정문 쪽이 너무 번잡해서 들어가지 않고 미리 내렸다.
아빠를 보내고 터벅터벅 길을 걸어간다.
새벽부터 엄마가 음식을 만드시는 바람에 나도 눈이 일찍 떠졌다. 시험은 총 6문제. 2시간 30분씩 두 번에 나눠서 본다. 중간에는 물론 점심시간이 있고.
‘이런 거 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손에 쥔 보온 도시락이 조금 부끄럽다.
그래도 맛있는 게 잔뜩 들어있을 테니 점심시간이 기대된다.
길을 걷다 보니 연못이 보였다.
“오리 연못?”
성의 없는 이름이다.
다가가 보니 물 위를 한가로이 떠다니는 오리들이 많았다. 멍하니 한참을 바라본다.
선한 눈망울과 넓적한 노란색 부리.
부드럽고 따뜻한 털과 유체역학적으로 매끈하게 뻗은 몸.
닭과는 다르게 오리는 먹이를 서로 나눌 줄도 안다.
거기에 뒤뚱뒤뚱 걷는 귀여움까지.
‘발가락도 귀엽지.’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자연 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진 조화라는 것이 환상적이다.
백과사전을 탐독하던 시절부터 나는 오리가 좋았다.
‘기념품이 있을까?’
서둘러 가게에 가보니 멍청하게 생긴 파란색 인형들 천지다.
보다 보니 묘하게 귀여워서 오리 굿즈와 함께 구입했다.
‘서은이 줘야지.’
“아!”
나도 모르게 오리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선생님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시험 보러 가기 전에 이미 여러 번 당부하셨다.
“채점자가 네가 쓴걸 다 이해할 거라 기대하지 마. 200장이나 되는 답안을 채점해야 하는데 그걸 교수들이 다 하겠어? 조교 중에는 진짜 머리 나쁜 놈들도 많으니까 꼭 기억해야 한다?
답을 적을 땐 어떻게 쓰라고?”
“쉽게 풀어서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래, 네 머리에서 자동으로 생략된다고 답도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설교를 들었다.
후다닥.
강의실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진다.
자연과학동에 도착해 시험장을 찾았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익은 사람들이 많다.
“유서하! 역시 너도 올 줄 알았어.”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던 수정 누나가 반갑게 손을 든다.
부끄럽다. 애써 시선을 무시하고 수험표에 적힌 자리를 찾았다.
“쟤가 걔지?”
“초등학생이 IMO에 나가도 되는 거야?”
“외국에선 있었잖아. 엘리야 크로넨은 10살부터 나갔었다던데.”
이제는 익숙해진 수군거림.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하다못해 몇 년만이라도.
일행인 듯한 학생들이 모여 일부러 큰소리로 떠든다.
아! 백과사전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사회적 안전망, 동조 압력, 상징적 과시.
낯선 장소에서 패거리를 형성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행위.
다들 불안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저들이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중 덩치가 큰 학생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묻는다.
“야! 최유진. 이젠 네가 최연소가 아니네?”
“형! 그럼 내가 언제까지 초딩일줄 알았어?”
신경질적인 목소리.
이럴 줄 알았으면 기념품 가게에서 시간을 더 보낼걸 그랬다.
“가서 인사라도 하지? 너넨 앞으로도 자주 볼 거 아냐.”
“에이, 귀찮게.”
저벅, 저벅.
그동안 시험장에 가면 사람들은 나를 못 본 척해왔다.
그래서 불편함에도 시험 자체에는 별 지장이 없었는데 이곳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마치 이너 서클?’
그들은 나에게도 일정량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잘 봐줘도 오고 가다 가끔 얼굴이나 봤을 텐데.
“야, 유서하!”
최유진이 나를 부른다. 이젠 모른 척할 수도 없게 되었다.
“네?”
“너 5학년이라며? 어디 출신이냐?”
갑자기 웬 호구조사?
반발심이 들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형들은 무서우니까.
“충북 옥천군이요.”
“아니, 거기 말고 있잖아!”
그가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깨가 움츠러든다.
“도..도담 초등학교?”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뭐? 너 영재원 출신 아냐?”
“아닌데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와! 이거 웃기는 놈이네. 영재원 출신도 아닌데 그 나이에 여길 왔어? 이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이상한가요?”
“이상하지. 여기 있는 중학생들은 다 같은 영재원이었어. 저기 수정 누나도 그렇고.”
전혀 몰랐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수정 누나가 어깨를 으쓱 한다.
“아무튼, 앞으로 형이 잘 해줄게. 서울대 경시대회 1등이었으니까 2차 통과할 거지? 형만 믿고 있어. 우리 스터디에도 끼워줄 테니까. 그거 엄청나게 도움 되거든? 진짜 아무나 해주는 거 아니다? 내가 지금까진 계속 막내였는데 이제야 내 밑이 들어왔네.”
어딜 들어왔다는 거지?
그리고 언제 봤다고 형?
싫다는 티를 팍팍 내던 처음과는 다르게 말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다른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꾸벅 인사를 했다.
그가 만족한 듯 내 어깨를 두드린다.
드르륵.
“다 왔지? 시험 시작하자.”
감독관이 들어오자 강의실이 정리되었다.
안경을 쓴 여자와 추레한 차림의 젊은 아저씨.
묘하게 어울리는 콤비였다.
벨이 울리고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이제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
[6명이 참석한 파티에서, 임의의 3명을 택했을 때 서로 모두 아는 사이이거나 서로 모두 모르는 사이인 3명이 반드시 존재함을 보여라.]
비둘기 집(pigeonhole principle)을 이용한 고전적 램지 이론을 묻는 문제다.
사각사각.
오전 시간 문제는 대체로 사고의 깊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것 같다.
‘2시간 30분이나 필요한가?’
선생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최대한 시간을 들여 친절한 설명을 적으려 애썼다.
「··· 따라서 어떤 경우건 조건을 만족하는 3명이 반드시 존재한다.」
[연속하는 1000개의 자연수 중에는 소수가 아닌 수가 반드시 존재함을 보여라.]
정수론 문제다.
소수에 관련된 문제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요즘 서은이가 숫자놀이를 좋아하더니 500 안에 있는 소수를 전부 외워버린 것 같다. 재미가 없을 테니 다음부터는 1,000부터 시작해 내려가는 방식으로 놀아줘야겠다.
사각사각.
「···따라서 1001! + k는 k로 나누어지므로 합성수이다. 이렇게 연속하는 1000개의 합성수를 구성할 수 있다.」
3번은 어릴 적 벽에 붙어있던 행성 궤도에 관한 문제였다.
눈을 감으니 아름다운 우주가 펼쳐진다.
극좌표로 표현되는 타원 궤도의 아름다움. 두 개의 초점을 가지지만 행성에서 두 초점까지의 거리 합은 항상 일정하다.
이런 단순한 수학적 규칙으로 펼쳐지는 태양계 행성들의 복잡한 운동.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완전한 코스모스.
이것을 계산으로 알아냈을 때 케플러는 얼마나 기뻐했을까?
나도 이러한 희열을 느껴보고 싶다.
고민거리를 던져주려 노력한 문제였지만 천체 운동을 잘 파악하고 있으면 어렵지 않다.
“그만! 답안지 제출한 뒤에 점심 식사하고.”
감독관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야, 3번 너무 어렵지 않냐?”
“나는 2번부터 망했는데?”
“3번 실화냐? 대학원 레벨 아냐?”
스르륵.
도시락을 들고 조용히 일어났다.
겨울이라 밖은 힘든데 어디서 먹어야 할까?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야!”
임수정 누나?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부른다.
“네?”
“밥 같이 먹자고. 나 말고 아는 사람도 없을 거 아냐.”
“고맙습니다.”
나는 얌전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지리를 모르는 데다 주변에 혼자 먹을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도착한 곳은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다.
자리에 앉아 가져온 보온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푸흡ㅡ. 애는 애네.”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있었는데···.
수정이 알록달록한 캐릭터 도시락을 보자마자 웃는다.
얼굴이 빨개진다. 다음부턴 동생에게 물려줘야겠다.
“영재원 다닐 때 우리 아빠도 자주 싸주셨었는데. 그립다.”
그녀가 아련한 표정을 짓는다.
“누난 뭐 먹을 거예요?”
“난 저기서 사 올게.”
고개를 돌려보니 푸드코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팔고 있다.
도시락을 풀며 잠시 기다리는데 아까 그 무리가 다가온다.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똑바로 이쪽을 향해 오는 것 같았다.
“유서하! 뭘 그리 빨리 가고 그래? 같이 먹자.”
순식간에 세 명이 몰려와 내 주위에 식판을 내려놓는다.
자리에 사람이 있다고 거절해야 하는데 그들이 벌써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야! 니들은 왜 또 여기 있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수정이 다가오며 화를 낸다.
“같이 좀 먹자. 얘도 혼자잖아. 임수정 너도 오랜만이고. 영재고는 다닐 만하냐?”
“몰라!”
친한 사이였는지 덩치가 큰 학생이 옆자리를 권한다. 하지만 못마땅한 표정의 누나가 그 자리를 피하더니 반대쪽으로 돌아와 내 옆에 앉았다.
모두 배가 고팠는지 밥을 먹기 시작한다.
“맛있네.”
“우리 학교 급식보다 훨씬 낫다.”
“근데 3번 풀었냐?”
“우리 선생님이 1교시 3번이랑 2교시 6번은 풀라고 내는 게 아니래. 접근법만 찾아도 충분히 고득점이야.”
“나도 그렇게 들었어.”
“난 제대로 푼 것 같은데?”
덩치가 피식 웃더니 노트를 꺼내 문제를 적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묻는다.
“야! 유서하. 넌 아직 이거 안 배웠지?
우리 아빠가 대학 교수라 알려주신 건데 이 문제에 궤도 공식을 구하려면 천체역학이랑 궤도 역학을 알아야 해. 항공 우주공학에서 나오는 건데···.”
그가 나를 끌어 당긴다.
그러면서 눈치를 보는 것이 수정 누나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임수정, 넌 이거 풀었냐?”
“아니. 나도 가정만 적었어.”
“그럼 너도 들어봐. 그러니까 이 여섯 개 궤도 요소가···.”
“잠깐!”
그가 자신의 답을 적은 뒤 궤도 역학을 설명하려는데 누나가 덩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유서하, 솔직히 말해. 너 이거 맞췄지?”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럴까?
하지만 푼 것을 틀렸다 할 수도 없고.
“네···.”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더니 턱으로 덩치의 노트를 가리킨다.
“얘가 쓴 게 맞아?”
난잡한 공식, 잘못된 유도.
자기가 적은 수식의 궤도가 보이지 않는건가? 저렇게 돌면 언젠가 행성끼리 서로 충돌한다.
“아니요. 그 문제는 궤도 역학까지 필요 없어요. 기초 천문학이랑 뉴턴 역학, 케플러의 법칙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도출할 수 있거든요.”
내 말에 덩치의 얼굴이 빨개졌다.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그의 목소리에 위협이 섞였다.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 끼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말을 시작한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묘하게 태도가 안 좋기도 했고.
“네, 보여드릴게요.”
가방에서 노트와 오리 연필을 꺼냈다.
“일단 케플러 제1 법칙에 의하면 행성의 궤도는 태양을 축으로 하는 타원입니다.”
사각사각.
“그리고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과 원심력을 이용하면···.”
[F = GMm/r² = mv²/r]
“여기서 각속도(angular velocity)를 구하고 케플러 제3 법칙을 적용하면 궤도의 장반경과 공전주기의 관계를 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차근차근 식을 전개해 나갔다.
문득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내 손끝을 주시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에서 주어진 조건들을 대입하면···.”
계산을 마치자 정확한 답이 나왔다.
“이렇게요.”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의 정적.
덩치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내가 써놓은 답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옆의 학생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이게 진짜 맞아?”
풀이를 봐도 모르는 건가?
“대입해서 검산 해보세요.”
무리가 황급히 가방에서 계산기를 꺼낸다.
틱, 틱, 틱.
그리고 잠시 뒤 정확히 내 노트에 적힌 것과 같은 숫자가 그들의 계산기에 찍혔다.
“진짜네···.”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진짜 웃겨! 누가 누굴 가르친다고.”
하이톤의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
누나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내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IMO 두 자리는 나랑 얘니까 나머지는 니들끼리 알아서 잘해봐.”
그녀가 나를 끌고 자리를 떠난다.
아!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아직 다 못 먹었는데.
서하가 수정을 따라 걷는다.
카페테리아를 나가 건물을 반쯤 돌자 음료 자판기가 나왔다.
수정이 거기서 걸음을 멈춘다.
“음료수 뭐 마실래?”
“콜라요.”
수정이 콜라를 하나 뽑고는 자신의 것으로 커피를 누른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서하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수정이 자신 때문에 화를 내준 것 같아 조금은 기쁘기도 했지만.
서하의 굳은 표정을 오해했는지 수정이 부드럽게 웃는다.
“쟤들 너무 미워하지 마. 사실 그렇게 나쁜 애들은 아니거든.”
변명하는 것이 멋쩍은지 어색하게 커피를 마신다.
“네?”
“민호, 아! 그 키 큰애. 원래는 진짜 착했거든. 초5 때부터 봤었는데 영재원에는 처음에 적응 못하는 애들이 많았어. 민호가 그때 걔들 많이 도와주고 그랬는데.”
“좀 무서워 보이던데···.”
수정이 고개를 젓더니 조용히 말을 내뱉는다.
“초조해서 그래.”
“뭐가요?”
“영재원에 있던 애들은 어릴 때부터 특별하단 소릴 워낙 많이 들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거든. 민호도 더 나이 들기 전에 뭔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거야. 옆에 있던 성찬이도 마찬가지고.”
차라리 민호가 영재원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수정은 부담과 중압감으로 망가지는 아이들을 정말 많이 보아왔다.
“누나도 그랬어요?”
서하의 물음에 수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검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나? 아니? 난 한 번도 자신을 의심한 적 없었어. 널 만나기 전까지는.”
“제가 뭘 했다고···.”
“그런 게 있어. 나는 저 애들이 조금 이해가 가.
영재원 출신도 아니고, 자기들보다 한참 어린애가 지금 엄청 주목받고 있잖아.
서하 너 꽤 유명하다? 이 바닥에서 이제 널 모르는 애는 아마 거의 없을 거야. 나도 널 만나고서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 안주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서하는 잠자코 수정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의식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응?”
이 사람들은 대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타인이 특별하다고 말해주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건가요? 제가 아는 과거의 특별했던 사람들은 한 명도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 물어봤어요.”
수정이 멍한 눈으로 서하를 바라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특별함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정은 자신이 생각해 왔던 명제가 특별함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찬사는 단지 결과로써 주어져야 하는 것. 명성만을 추구한다면 파멸은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그렇기에 미리 인정을 갈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땔감 삼아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빚쟁이 같네.’
주변 사람들은 곧 그동안 베푼 인정의 대가를 자신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의 차례니 어서 특별함을 보여달라고.
서하가 등을 보이며 걸어간다.
수정은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굳은 듯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 *
2교시가 시작되었다.
대수, 미적분, 기하에 관한 문제들이다.
‘이 기하 문제는 좀 재미있네.’
첫 두 문제를 빠르게 푼 서하가 마지막 6번을 두고 미소 짓는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 즐거운 문제였다.
사각사각.
서하가 손끝의 연필을 굴리며 답안지를 채운다.
머릿속에는 이미 좌표 평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반사각을 이용한 문제.’
외접원 위에 균등하게 배치된 세 점. 그리고 그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수심 H.
서하에게는 남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수심의 위치벡터는 세 꼭짓점 위치벡터의 합과 같다.’
OH를 지름으로 하는 원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서하의 눈이 번쩍 뜨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좌표계를 외심 중심으로 설정하면···.’
세 교점이 만드는 삼각형의 대칭성.
외심에서 각 교점까지의 거리가 모두 같다는 것, 그리고 이 점들이 원래 삼각형의 수족삼각형(pedal triangle * 주어진 점에서 삼각형의 세 변에 내린 수선의 발들로 이루어진 삼각형)과 아름다운 관계를 이룬다는 것.
단순해 보이는 도형에 풍부한 기하학적 구조가 숨어있다.
출제자는 필시 이 아름다운 반사변환의 대칭성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응?’
답안을 작성하는 중에 서하는 기묘한 인기척을 느꼈다.
후두둑.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아 천천히 눈만 돌려 옆을 본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여자 감독관이 자신의 뒤에 서서 답을 보고 있다.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아마 본인은 자신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하가 몸을 돌려 눈을 맞추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짓는다.
“흠..흠.”
단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감독관의 수상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지나가는 척 하면서 서하의 답을 물끄러미 본다던가 멀리 있을 때도 수시로 눈을 돌려 서하쪽을 살핀다.
마치 화장실이 급한 강아지처럼 주변을 얼쩡거리는 형국이다.
뒤에 있는 조교가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뻥긋뻥긋 입 모양을 내며 교수를 진정시킨다.
서하가 이들을 지켜보는 사이 2교시가 끝났다.
교수가 단상 위로 급히 걸어오더니 표정을 싹 바꾼다.
“시간 다 됐습니다. 답안지 제출하세요. 결과는 2주일 내에 통보될 겁니다.”
학생들이 떠나기 전 김지윤 교수가 서하를 힐끔 바라본다.
며칠 전 조교가 전해준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교수님, 1차 시험 답안지로 라틴 스퀘어를 만든 학생이 있답니다!”
“뭐라고?”
김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신상을 알아보니 초등학생.
지윤은 경악했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라도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마치 유서하라는 존재만 이 법칙에서 빗겨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엘리야 크로넨도 있으니까.’
마치 신이 인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듯 예외적인 존재들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항상 존재해 왔다. 만약 그런 행운을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면?
수학회에 물어보니 참여한 대회마다 대상을 휩쓸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고등부에서.
김지윤 교수는 결심했다. 유서하를 무조건 수학계에 잡아두기로.
그리고 급히 문제를 수정했다.
아주 어렵겠지만 해결하면 기하 도형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흠뻑 젖을 수 있는 문제였다.
‘이번만은 절대 안 된다.’
한국 수학계의 현실은 참담했다.
쓸만한 인재들은 하나같이 의대나 공대로 진학한다. 이과의 근본인 수학을 택하는 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대부분 졸업 후 의전원으로 가거나 복수전공으로 빠져 기업을 선택한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가 수학자를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껏 올림피아드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던 프랑스가 어떻게 수학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사회가 수학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수학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미지를 향한 끝도 없는 여정, 진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의 고통을 그들은 인정하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학문인데.’
김 교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똑똑한 학생이라면 우주의 법칙을 탐구하고 절대적 진리에 다가서는 이 순수한 지적 쾌락을 절대 포기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유서하는 일부러 정답을 틀리면서까지 자신이 의도했던 라틴 스퀘어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그가 수의 미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
저 나이에 이 정도의 수학적 재능을 보인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수학계는 수십 년간 미국과 중국이 이끌고 있다.
지윤은 그들의 연구를 받아 분석하는 하청업자가 되어버린 한국 수학계의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엘리야 크로넨 같은 인물이 한국에도 있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었다.
지윤은 1교시 내내 그 아이와 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성공적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그가 점심시간 전 제출한 답안지를 보자 결국 인내심이 끊어졌다.
너무나도 완벽한 증명.
적은 답안 하나하나가 그녀의 심금을 울렸다.
유서하만 잡을 수 있다면 그동안 한국 수학계가 잃어버린 수많은 재능들을 벌충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차피 이 바닥은 진짜 천재 하나가 학계 전체를 이끌어가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지윤은 한 번도 학생을 설득해 본 일이 없었다.
잡을 가치가 있는 학생이 그동안 없었기에.
서하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떠난다.
“박군!”
지윤은 습관적으로 조교의 이름을 불렀다.
조교란 모름지기 교수의 어려움을 대신해 주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네, 교수님!”
조교가 어느샌가 달려왔다.
“지금 당장 따라가서 저 애 붙잡아.”
“네? 붙잡아요? 그 뒤엔 어쩌시게요?”
지윤은 패닉에 빠졌다.
수학과로 오라고 말해야 하는데 제시할 만한 메리트가 자신이 봐도 부족했으니.
“아니다, 당장 내 방 가서 기념품으로 쓸만한 것 좀 다 가져와라. 알았지?”
김지윤 교수가 급히 코트를 입더니 차 키를 챙겨 나간다.
조교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였다.
“하아, 교수님. 저한테는 한 번도 이러신 적 없었잖아요.”
하지만 저 애가 적어놓은 답안을 보니 숨이 턱 막혀왔다. 박사 과정인 자신이 쓰더라도 저것보다 더 나을 자신이 없다.
조교는 눈물을 삼키며 초등학생이 좋아할 만한 기념품이 뭐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 * *
서하가 교내를 걸어간다.
‘멋진 문제였지.’
서하의 머릿속에 아직도 6번 문제를 풀고 느꼈던 감동의 여운이 가득하다.
뒤에서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서하가 깜짝 놀라 옆으로 비킨다. 하지만 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서하와 나란히 서서 창문을 내린다.
위이이이잉ㅡ
“어머? 아까 시험 봤던 애지? 마침 나가려던 길인데 집까지 태워다줄까?”
서하의 눈이 가늘어진다.
시험 시간에도 행동이 이상했던 사람.
“엄마가 모르는 사람 차에 타면 안 된다고 하셔서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김 교수가 말을 버벅인다.
“어? 아..아! 그렇지? 초면에 이건 좀 무리였나?”
“아빠가 곧 오실 테니까 괜찮아요.”
“자..잠깐만! 솔직히 말할게. 선생님한테 5분만 줄 수 없겠니?”
“네?”
“딱 5분이면 돼. 아까 2교시 마지막 문제를 내가 출제했거든. 뭐 궁금한 건 없었어?”
서하가 생각에 잠긴다.
그런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라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네! 좋아요.”
“잠깐만 기다려!”
김 교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금방 옆에 차를 세우고 돌아온 지윤이 서하와 벤치에 앉았다.
“인사가 늦었네. 나는 수리과학과 김지윤 교수라고 해. 널 잡은 건 내가 보기에 너의 수학적 재능이 평범하지 않아 보여서야.”
“감사합니다.”
“많이 들어 봤구나?”
“전에 신우현 선생님이랑 에드워드 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한 선배? 설마 그 사람을 만난 거야? 뭐라 그러디? 설마 미국으로 오래? 아니 전에도 싹수 보이는 학부생을 데려가더니 또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김 교수가 에드워드의 이름을 듣더니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낸다.
“아..아니에요. 물론 미국에 오는 게 좋을 거라고는 하셨지만 저는 가족이랑 살고 싶어서요. 지금 같이 쓰는 논문이 있어서 오신 거였어요.”
“논문? 허! 이거 가만있었다간 눈 뜨고 코 베일뻔했네.”
“네?”
“아니야 아니야! 서하 넌 수학을 꽤 깊게 공부한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야?”
자신이 최초 발견자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어..음···.”
평범한 질문에 의외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서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세상이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윤의 눈이 커진다.
‘오, 마이 갓!’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라니.
지윤의 머릿속에 팡파르가 울린다.
“수학(mathmatics)의 어원이 혹시 뭔 줄 아니?”
모를 거로 생각했지만 정답이 나왔다.
“마테마티코이(mathematikoi).”
“그래.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름이야.
피타고라스는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어. 반쯤은 성직자라 봐도 무방했지. 기원전 얘기니까 물론 우리가 아는 그 신은 아니고.”
지윤이 서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간다.
“피타고라스는 네 대답처럼 세상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어. 그래서 수학을 연구하는 것이 신의 섭리에 다가가는 거라 생각했고.”
“어릴 때부터 그 부분을 읽을 때 너무 좋았어요.”
서하의 대답에 지윤이 환하게 웃는다.
“그렇지? 마치 너는 수학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구나. 그 마음 앞으로도 절대 변하면 안된다?”
괜한 걱정이었다.
수학에 관심이 없는데 이런 통찰력을 보일 리 없다.
의대나 공대에 서하를 빼앗기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네! 저도 수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으니까요. 세상엔 아직 인간이 해석하지 못한 신비가 너무 많잖아요.”
“역시 뭘 좀 아는구나! 수학만이 인간에게 진리를 줄 수 있다는걸 다들 왜 모르는 걸까?”
서하가 교문 쪽을 바라본다.
멀리서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다.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마지막으로 하나만.”
지윤은 이걸 서하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
“네.”
“1차 시험 때 25번 문제는 왜 틀린 거니?”
서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지윤을 돌아본다.
그리고 알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출제자가 그걸 간절히 원할거라 생각했거든요.”
친밀감이 생겼는지 서하가 귀엽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간다.
지윤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12월 어느 토요일 새벽,
서하는 평소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깼다.
창밖이 이상할 정도로 환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평소와 달랐다.
“어?”
창문을 열어보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있었다.
첫눈이었다. 그것도 제법 많이 내린.
마당의 감나무, 대문 앞 화단 그리고 지붕 위까지 모든 것이 푹신한 솜이불을 덮어놓은 양 눈에 덮여있었다.
“와아!”
옆방에서 서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곧이어 쪼르르 달려오는 발소리.
“오빠! 눈이야 눈!”
잠옷 차림의 서은이 서하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볼이 상기되어 연지처럼 분홍빛이 올라왔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여간 흥분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의 오지 않았는데 밤에 펑펑 내린 모양이네.”
“나가서 놀자!”
서은이 기대에 찬 얼굴로 서하를 올려다본다.
서하는 동생의 이런 표정이 좋았다. 오빠가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해줄 거라 철석같이 믿는 얼굴.
“아침 먹고 나가자!”
“진짜지?”
서은이 폴짝폴짝 뛰며 기뻐한다.
어느새 다가온 미영이 흐뭇한 눈으로 남매를 바라본다.
“서은이는 눈이 그렇게 좋아?”
미영은 밤부터 눈 치울 일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풀렸다.
“응! 엄청 좋아, 엄마도 같이 놀자!”
“엄마는 고구마 구워놓고 기다릴게. 오빠랑 다녀와.”
아침을 먹은 후 남매는 방한복을 단단히 차려입었다.
서은은 베이비핑크 패딩에 털모자, 벙어리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했다.
“준비 됐어?”
“응!”
마당으로 나가자 찬 공기가 볼을 스쳤다. 하지만 눈 덮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둘은 추위조차 잊었다.
“와아아아아!”
서은이 신기한 듯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뒤뚱거리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펭귄 같네.”
두꺼운 옷을 여러 겹 입어 빵빵해진 서은이 팔을 파닥거리며 기뻐한다.
처음엔 그저 동생과 놀아줄 생각이었던 서하도 어느새 열중해 함께 뛰어다니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한참 놀다 보니 두 남매 모두의 옷에 눈이 잔뜩 묻었다.
“에취!”
서은이 코가 빨갛게 되어 훌쩍거린다.
“이만 들어가자.”
서하가 동생의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는 가볍게 안아 든다.
서은이 오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니 구수한 군고구마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많이 놀았구나? 어서 옷 갈아입고 와.”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은 서은이 신이 난 목소리로 밖에서 오빠랑 놀았던 일을 엄마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달콤한 군고구마의 맛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서하는 즐거웠던 오늘을 오래 기억하도록 이 모든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아두었다.
‘서은이가 나중에 크면 오늘 일을 잊어버리게 될까?’
나이를 먹으며 서하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보통 4세까지 발생하는 유아기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을 겪지 않았다.
어른들조차 어려워하는 개념들을 그는 한번 보면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서하는 그저 이 순간이 행복했다.
나중에 서은이가 오늘 일을 잊어버리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말해주겠다고 서하는 생각했다.
* * *
“오빠아아아아! 가지마아!”
해가 바뀌고 1월,
서하는 KMO 2차 합격 통보를 받았고 겨울 학교에 입교하라는 편지가 집으로 날아왔다.
“엄마아아아! 나도 갈 거야. 오빠 따라 갈거야아아!”
서은이 오빠의 옷을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마치 평생 영영 못 볼 것처럼 대성통곡하는 서은의 모습에 부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서은아, 오빠 2주 뒤면 올 거야. 열네 밤만 자면 온다니까?”
미영이 서은을 다정하게 달래본다.
“싫어어어어! 서은이도 오빠 따라 갈거야아!
서은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서하의 셔츠를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서은아···.”
서하가 울컥한다.
태어난 이래 둘은 한 번도 오래 떨어져 본 일이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서하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얼마 전 기념품 가게에서 산 작은 오리 인형이었다. 노란색 털에 주황색 부리가 귀여워 보인다.
‘혹시 이럴까 봐 준비했는데 다행이네.’
“이거 서은이 줄려고 산 건데···.”
서하가 몸을 낮춰 서은과 눈을 맞춘다.
오리 인형을 손에 쥐어주자 서은의 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물기 가득한 눈을 똑바로 뜨고 서하를 바라본다.
“오리?”
“응! 얘하고 놀고 있으면 금방 돌아올게. 약속해.”
서은이 울음을 참고는 앙증맞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 * *
KMO 겨울 학교는 2차 시험과 마찬가지로 카이스트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선발된 영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흔치 않은 이벤트.
위이이이잉ㅡ
고급 독일 세단이 기숙사 앞에서 부드럽게 멈춘다. 주위는 이미 고가의 차량들이 즐비하다.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소녀가 육중한 차문을 열고 내린다.
윤기 넘치는 흑발, 청초하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
후우우.
수정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기숙사 주위는 학생들과 학부모로 분주했다.
대부분 아는 얼굴들.
초등학교 때부터 참 질긴 인연이라고 수정은 생각했다.
기숙사 방에 짐을 들여놓고 하나둘씩 보호자들이 떠나간다.
수정도 떠나가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다 집합 장소인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니 광활한 칠판이 보인다.
거대한 칠판 네 개가 하나처럼 서로 붙어있다.
다행히 위아래 레일이 달려 사다리 없이도 이용 가능해 보였다.
수정이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곧장 한쪽을 향해 걸었다.
“왔네?”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의자를 끌어와 옆자리에 앉는다.
감은지 얼마 되지 않은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퍼졌다.
“안녕하세요.”
듣기 좋은 목소리.
서하에게는 처음이라면 으레 당연할 것 같은 긴장과 흥분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강의실이 신기한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수정은 그런 서하의 여유로운 태도에 조금 심통이 났다.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한 명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정이 무심한 듯 한마디 말을 툭 던졌다.
“고창석, 고3. 제주도 전체 1등이야.”
서하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수정이 눈짓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키가 작은 마른 체격의 학생이 조용히 앉아 있다.
딱 봐도 모범생이다 싶은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진한 뿔테 안경. 손에는 이미 노트와 펜을 준비하고 있다.
“저긴 부산 1등 서지예 언니.
수학보단 물리가 특기라던데 올해는 IMO에 나갈 건가 봐.”
수정이 경쟁자가 늘었다며 투덜거린다.
모두 그녀가 비밀리에 쓰고 있는 수학 상위 20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다.
주요 인물들을 설명해 주던 수정이 누군가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그리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상대는 확실히 수정을 봤던 모양이다.
“여! 임수정! 오랜만이다.”
상대가 성큼성큼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온다.
큰 키에 흰 피부, 서글서글한 눈매와 탄탄한 체격까지.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라고 서하는 생각했다.
“알았으니까 저리가!”
수정이 질색이라는 듯 그를 보고 손사래 친다.
하지만 상대는 능글맞게 웃으며 가볍게 이를 떨쳐냈다.
“오호! 얘가 걔 맞지? 유서하.”
서하가 일어나 머리를 꾸벅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형들한테 얘기는 들었어. 너 때문에 많이 물먹었다던데? 반갑다 야! 난 성지훈.”
“유서하라고 합니다.”
주위를 봐도 모르는 사람들투성이다.
서하는 그나마 수정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얘는 나랑 같은 영재원 나왔어. 이번에 경기도 대회에서 1위 했을 거야.”
최근 몇 년간 고교생들의 올림피아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수정의 세대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지훈도 그중 한 명.
“할 말은 그게 다야? 너랑 라이벌이라고 해야지.”
둘은 이전부터 또래 사이에서 유명한 영재들이었다.
“난 IMO 도 못 나간 찐따랑은 겸상 안 하는데?”
수정의 말에 지훈이 멋쩍게 웃는다.
“그땐 좀 그랬지? 충격받아서 인생 처음으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부했잖아. 그러고 바로 1등. 봤어? 이게 나야.”
“네 네, 그러시겠죠. 전 전국대회만 나가서 동네 1등은 취급 안 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정은 지훈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수정의 냉담한 반응에 지훈이 혀를 차더니 그대로 옆의 책상에 앉는다.
곧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학생들이 자리를 찾아 앉자 긴장감이 감돈다. 모두의 얼굴에 기필코 최후의 6인까지 남아 IMO에 선발되겠다는 결의가 보인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회색 머리에 인상 좋은 얼굴, 차분한 분위기의 교수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수리과학과 박철민 교수입니다.”
박 교수가 칠판 앞에 서서 학생들을 둘러본다.
“다들 전국 각지에서 온 수학 영재들이니 굳이 긴 소개는 필요 없겠네요. 앞으로 2주간 여러분과 함께 할 예정입니다.”
교수가 칠판 위쪽 모서리에 작게 날짜를 적는다.
“이번 겨울학교의 목적은 단순 문제 풀이가 아닙니다.
수학의 본질, 증명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것이 목표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량이 향상될 거라 믿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여러분 중 6명을 선발해 IMO 국가대표 팀을 구성할 겁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국가대표.’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울림인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해 보죠.”
박 교수가 첫 번째 칠판 전체를 사용해 복잡한 수식을 써 내려간다.
[정수론 - 디오판토스 방정식 해의 존재성]
사각사각.
강의실 안에는 오직 분필 소리와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모든 학생들이 집중해서 필기를 받아적으며 설명을 이해하려 애쓴다.
지훈도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표정으로 교수의 설명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옆을 보았다.
‘응?’
유서하가 뚱한 표정으로 칠판을 보고 있다.
노트가 펴져 있었지만 백지상태.
그의 손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잘한다고 해도 역시 초등학생인가? 고차원적인 개념은 아직 못 따라가나 보네.’
지훈은 곧 서하를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기에는 지금 풀고 있는 증명이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서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교수님은 저런 방식을 사용할까?’
서하의 머릿속에는 이미 훨씬 더 간단하고 우아한 증명법이 떠오르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을 뿐.
‘타원함수(elliptic function)를 이용하면 훨씬 깔끔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참지 못한 서하는 결국 수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증명법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박 교수가 긴 설명을 마치고 학생들을 돌아본다.
“자, 여기까지가 고전적인 접근법입니다. 혹시 질문이 있나요?”
정적이 흐른다.
그때 박 교수의 시선이 서하에게 머물렀다. 유일하게 필기를 하지 않고 있던 학생이다.
“유서하 학생?”
갑자기 호명 당한 서하가 깜짝 놀라며 몸을 세운다.
“네?”
“노트를 안 하고 있네요. 혹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강의실에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이 유서하라는 이름만 들어봤을 뿐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학생들이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서하를 바라본다.
서하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거린다.
수정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이다.
한숨을 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서하의 눈빛이 흔들린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
모두가 서하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목을 받아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일단 대답을 해야. 교수님이 증명하신 방법대로···.’
이제 겨우 첫날이다.
서하는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교수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서하가 빠르게 칠판을 눈으로 스캔한다.
네 개를 이어 붙인 거대한 칠판. 그곳에 막대한 양의 수식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디오판토스 방정식.’
서하가 좋아하는 분야였다.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디오판토스(Diophantus)는 산술론(Arithmetica)이라는 저서에서 정수해를 갖는 다양한 방정식들을 체계적으로 다뤘다.
알렉산드리아가 불타며 한동안 잊혔던 이 공식은 페르마, 오일러, 가우스 등의 근대 수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부활하게 된다.
서하의 눈이 엄청난 속도로 수식을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칠판 왼쪽 상단의 정의부터.
뇌가 즉시 반응한다. 일차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기본형, 베주 항등식을 적용해 본다.
확장 유클리드 호제법.
뇌가 알고리즘을 순식간에 재구성한다. 역산 과정까지 한 번에 시뮬레이션을 끝냈다.
두 번째 칠판.
더 복잡한 형태들이 펼쳐진다.
두 제곱수의 합으로 표현되는 정수. 페르마의 두 제곱수 정리가 머릿속에서 전개된다.
시선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머릿속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오일러의 무한 하강법이 순식간에 적용되며 수식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박 교수가 사용한 전개식들이 보인다.
야코비의 삼중곱 정리를 적용하면···.
여기까지 단 몇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응?’
거침없이 읽히던 수식이 마치 장벽을 만난 듯 턱 막힌다.
서하의 눈이 멈췄다.
뭔가 잘못됐다.
세 번째 칠판 상단 부근, 복잡한 전개식의 중간 지점에서.
부호가 틀렸다.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여야 한다.
펜타곤 수 정리를 이용한 오일러의 분할 함수 전개에서 부호가 바뀌어야 공식이 성립한다.
서하가 칠판을 빤히 보고 있자 교수가 잠시 시간을 갖도록 기다려준다.
유서하는 2차 시험의 유일한 만점자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따라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 유서하 학생이 앞에 나와서 설명을 해볼까요?”
‘너무 긴장했나? 발표 울렁증이라도 있으면 큰일인데···.’
박 교수는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발표는 수학도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
경험을 쌓도록 도와줘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하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판서의 오류가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 뒤의 수식 진행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교수의 단순한 표기 실수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거슬렸다.
‘이걸 지적해도 괜찮나?’
서하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특출났던 아들이 잘못된 인간으로 성장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과하리만치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 존중을 강조했다.
경험이 부족했던 서하는 학생이 교수의 공식을 고치는 것이 허용되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잘 억제해왔던 증상이 이 모든 것들에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 거세게 발현됐다.
두근두근.
“···네.”
서하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떻게 발표해야 할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세 번째 칠판의 그 잘못된 부호가 마치 고장난 네온사인처럼 반복해서 깜빡였다.
‘마이너스여야 하는데.’
한걸음, 한 걸음씩 단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걸어갈수록 호흡이 가빠진다.
‘수식을 수정하고 싶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플러스를 마이너스로 바꾸는 동작을 반복한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상에 오르자 더 많은 학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기대, 호기심, 우려, 조소, 동정.
다양한 감정들이 그들의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자, 시작해 볼까요?”
박 교수가 격려하는 미소를 지으며 분필을 건네준다.
서하가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받아서 들었다.
여전히 부호가 깜빡인다.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기본적인 접근은···.”
말을 시작했다.
첫 번째 칠판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하려 했으나 시선이 자꾸만 오류를 향한다.
삐뽀삐뽀ㅡ
이제는 환청마저 들려오는 것 같다.
더는 참을 수 없다.
하얗게 질린 얼굴.
학생들이 서하의 이상을 감지했다.
“쟤 왜 저래?”
“어디 아픈 거 아냐?”
“불쌍해. 너무 긴장했나 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속삭임.
교수가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무리라 생각하고 나중을 기약하며 들여보내려던 찰나 서하가 움직였다.
뚜벅 뚜벅.
공황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서하가 순간 고개를 들더니 주저없이 세 번째 칠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까치발을 들고 판서를 고치려 한다.
하지만 너무 높은지 키가 닿지 않았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풍경.
하지만 이 기괴한 광경에 누구도 웃지 못했다.
“유서하 군,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건가?”
교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부호를..부호를 고쳐야 해요.”
박 교수가 미간을 좁힌다.
그리고 세 번째 칠판을 한참 응시했다.
복잡하게 얽힌 수식들 사이에서 기호 하나의 오류를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서하가 무언가를 지우려 하고 있었기에 빠르게 특정할 수 있었다.
“아···.”
박 교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다.
정말로 부호가 틀렸다.
“서하 군의 말이 맞군요.”
박 교수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살짝 문질러 부호를 고친다.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서하의 행동이 멈춘다.
네온사인이 꺼졌다.
휴우우ㅡ
서하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사라지고, 호흡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서하가 환하게 웃는다.
박 교수는 그 모습을 보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유서하 군. 정말 예리한 지적이었어요.”
교수들도 인간인지라 다른 생각을 하며 수식을 적을 때면 가끔 부호나 숫자를 틀리기도 한다.
서하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박 교수는 경험이 많은 학자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뛰어난 수학자들 사이에는 온갖 기인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의실이 조용하다.
학생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박 교수가 몸을 돌려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단번에 표정이 굳어졌다.
“여러분들은 충실하게 노트를 했지만 아무도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군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아 적기만 했던 겁니까?”
박 교수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전국에서 선발된 영재들이라면 이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지훈이 주먹을 꽉 쥔다.
자존심이 상했다.
고창석이 안경을 고쳐 쓰며 노트를 뒤적거린다.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수정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 이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하 군.”
“네.”
“아까 고민했죠? 이런 건 언제든지 지적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깊게는 광활한 수학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이기도 합니다. 서로 간의 생각의 교류 없이 수학은 발전할 수 없어요.
오히려 의문이 있을 때는 나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반드시 얘기해야 합니다. 알겠나요?”
“네! 교수님.”
서하가 기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박 교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서하가 자리로 돌아가고 수업이 재개되었다.
부담에서 벗어난 서하가 교수와 증명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는다. 서하는 박 교수가 왜 이런 접근법을 써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고등학생들에게 해석적 정수론(Analytic Number Theory)은 아직 너무 일러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박 교수의 이 말이 학생들을 자극했다.
모두가 질 수 없다는 듯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업에 활기가 돈다. 박 교수는 이러한 분위기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유서하는 되고 우리는 안된다는 건가?'
‘난 고급 정수론을 공부 했는데? 우리가 못 알아들을까 봐 쉽게 설명한 거였다고?’
평생 누구도 그들을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은 없었다.
“지훈아. 너는 이 정리를 이해하지만 다른 애들은 아니잖니. 그러니까 너무 앞서가지 말자.”
항상 들었던 소리.
어디를 가도 특별한 존재였던 자신이 이곳에선 배려를 받아야한다.
학생들은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하에게 자극받은 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연분수를 이용해서 디오판토스 방정식을 푸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고창석도 질세라 끼어든다.
"피타고라스 수를 구하는 것도 디오판토스 방정식이죠? 일반적인 공식이 있나요?"
강의실이 뜨거워졌다.
학생들의 눈에 경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서로가 서하처럼 더 깊이 있고 예리한 질문을 던져 눈도장을 받으려 노력한다.
박 교수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채 칠판을 종횡무진 누비며 답변에 열중했다.
첫날부터 서하가 경쟁심이라는 촉매를 부어 전국 굴지의 영재들 안에 잠자고 있던 잠재력을 깨웠다.
하지만 수정은 서하를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니들이 암만 그래봐야···.’
수정이 코웃음 친다.
그녀는 확실한 2등 전략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저걸 어떻게 이기냐고.’
오늘 보여준 모습조차 유서하의 참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서하의 진정한 수준은커녕 밑바닥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강의가 끝날 시간이 되었다.
박 교수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미소를 짓는다.
“오늘 첫 수업이었는데 정말 활발했네요. 여러분들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학생들이 다행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면 심심할 테니 수업이 끝나기 전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박 교수가 칠판을 깨끗하게 지우더니 새로운 문제를 적었다.
[합이 2077인 자연수들의 곱 중 최댓값을 구하시오.]
“이 문제를 빨리 푸는 학생들에게 특권을 주겠습니다.”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문제를 바라보았다.
겨울 학교에서는 아무리 적은 특권이라도 선발과 관련된 만큼 반드시 챙겨야 한다.
“선착순 절반에게 룸메이트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드릴게요.”
학생들의 눈이 커진다.
2주간 함께 생활할 룸메이트를 선택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곳에서 휴식은 없다.
방에서도 모두가 공부를 할 것이다. 공부 환경을 좌우하는 최우선 핵심 요소가 룸메이트란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코고는 소리는 양반이다.
매일 샤워를 하지 않아 냄새가 난다거나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이라도 있다면 큰일이다.
학생들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훈의 시선이 한 학생에게 머무른다. 손톱을 물어뜯어 책상 위에 올려둔다.
‘웩! 쟤는 무조건 피해야겠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누굴 선택해야 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경험 많은 고3들은 아니었다.
바로 노트에 머리를 박고 맹렬히 문제를 푼다.
‘아차!’
지훈과 수정도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본다.
합이 2077인 자연수들의 곱 중 최대수.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 있지만 적절한 접근법만 찾는다면 30분 내에 풀 수 있으리라.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서하는 아니었다.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자신을 바라보며 신호를 보낸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수줍게 말했다.
“어···. 교수님. 저 풀었는데 룸메이트를 고르면 되나요?”
정적이 흐른다.
부단한 노력으로 수업 시간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학생들도 이번에는 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지훈아,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해보렴.”
어린 성지훈이 검사실 의자에 앉아 테스트지를 받아 들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 그의 표정이 차분하다.
이를 보고 있던 의사가 부모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보통 아이들은 이런 환경에서 많이 긴장하는데 지훈이는 참 의젓하네요.”
의사에 말에 모친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네, 가끔 보면 저희 아이는 지나치게 똑똑한 것 같아요. 부모로서 걱정이 될 정도라니까요? 글쎄 얼마 전에는···.”
“흐..흠흠.”
‘부모들이란···.’
의사가 속으로 혀를 찬다.
하지만 입을 꽉 다물고 검사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범상치 않아 보이는 아이였다.
30분 후, 지훈이 연필을 내려놓았다.
“다 끝났어요.”
검사 담당자가 놀란 표정으로 시계를 확인한다.
“벌써? 보통은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데?”
지훈이 어깨를 으쓱한다.
며칠 뒤, 부부와 아이는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차트를 들여다보더니 감탄한다.
“지훈이는 이례적으로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군요.”
긴장된 얼굴로 앉아있던 부부의 얼굴이 활짝 핀다.
“역시 그렇죠? 구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인가요?”
“IQ 라는 건 평균을 100으로 하는 상대적 지표입니다. 85에서 115 사이가 일반적인 범위고요. 전체 인구의 68%가 여기에 해당하죠.”
“그럼 저희 아이는···.”
“155. 상위 0.01% 수준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1만 명 중의 1명이라는 뜻이에요.”
“정말요?”
지훈의 어머니가 놀라서 입을 가린다.
“일반적으로 130 이상을 영재, 145 이상을 천재급으로 분류합니다. 지훈이는 그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의사는 높은 지능지수가 의미하는 바와 주의할 점을 길게 설명했지만 부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아이가 천재 중의 천재라는 사실만이 중요했을 뿐.
지훈은 어린 나이에도 인생이 즐거웠다.
어딜 가나 사랑받았고 무엇을 해도 잘했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까지.
인생 이지모드.
친구들이 지훈에게 부러움을 가득 담아 붙여준 별명이다.
그리고 세상에 마음먹어 이루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던 시기, 그녀를 만났다.
“네? 제가 2등요?”
영재원에 들어온 지 1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2등을 경험했다.
하지만 충격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1만분의 1.
한 해에도 나랑 비슷한 애들이 수십 명씩은 태어날 테니까.’
동등한 재능을 가졌다면 더 노력한 쪽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동등할까? 난 너와 다르게 공부를 거의 안 한다고.
1등을 차지한 아이는 그야말로 노력의 화신이었다.
자신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그래도 성적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었기에 지훈에겐 여유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정을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 성지훈! 너 이번에도 1등이네?”
중학교 친구들이 교실에서 지훈을 둘러싼다.
“너 시험 기간 내내 나랑 게임만 했잖아! 왜 1등인데?”
“그러게. 그냥 대충 본 건데.”
지훈이 멋쩍게 웃는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멋지지 않다.
적은 노력으로 죽을 만큼 발버둥 치는 상대를 이기고 그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이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간들의 특권이니까.
하지만 영재들이 모인 수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이전의 방식이 통용되지 않았다.
임수정이 자신을 제치고 한국 대표로 뽑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1년, 부끄럽지 않은 노력을 한 끝에 이 자리에 왔다.
그런데···.
“헤헤헤!”
서하가 자기 침대 옆 창가에 오리 피규어를 올려두고 있다.
세 개.
각기 다른 표정의 오리들.
뭐가 좋은지 턱을 괴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가끔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내가 이런 꼬마한테 져서 선택당하다니···.’
꼬마가 암산으로 문제를 풀어버리자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크게 동요했다.
‘아, 임수정은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두 번째로 답을 낸 것이 그녀였다.
나머지는 엉망진창.
허둥대다 시간을 꽤 날려 먹었다.
자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괜찮다. 자신은 이제 겨우 노력 1년 차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꼬마도 앞지를 수 있다. 그땐 오늘의 굴욕도 한 줌 추억이 되겠지.
지훈이 전의를 불태우는 사이 서하가 침대에서 내려와 가방을 뒤진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다가왔다.
“저, 혹시 이거 드실래요?”
윤기 나는 주황색 곶감.
지훈이 어이가 없어 서하를 빤히 쳐다본다.
“웬 곶감?”
“저희 부모님이 직접 따서 말린 거예요. 기숙사에서 나눠 먹으라고 싸주셨거든요.”
서하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건네듯.
가장 먼저 문제를 풀고도 이런 표정은 짓지 않았던 것 같다.
“어..어! 그래. 고마워.”
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나를 집어 든다.
곶감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촉촉했다.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맛있네.”
“그렇죠? 저 이거 엄청 좋아해요. 아기 때부터 엄마가 해주셨거든요.”
서하가 곶감을 앙 물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대표 선발을 놓고 경쟁해야 할 사이인데 경계심이 없는 건가? 뭐,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이지.’
지훈이 자신의 책상을 세팅한다.
수트케이스 안에 빼곡하게 들어있는 기출문제집.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소화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마음 단단히 먹자.’
지훈은 겨울 학교 기간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일정은 단순했다.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체조를 하고 함께 아침을 먹는다.
오전에 두 시간씩 강의를 듣고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문제 풀이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면 다시 개인학습.
잠을 제대로 자지 않는지 모두의 얼굴이 퀭하다.
한 명만 제외하고.
사각사각.
지훈은 오늘도 방에서 문제를 풀다 곁눈질로 서하를 관찰했다.
‘무슨 책을 보는 거야?’
서하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방에 들어와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다만 기출문제집을 풀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괴로워하며 캠퍼스 노트에 수식을 휘갈긴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 건가 싶었지만 페이지를 색연필로 알록달록 색칠해 놓은 것이 아무리 봐도 기출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수업 중에는 모르는 것이 없었고 문제 풀이 시간에도 두각을 나타낸다. 서하를 만난 모든 교수들이 그를 사랑했다. 누구도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지훈은 누구보다 이런 상황에 예민했다.
바로 자신이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에게 받아왔던 시선이었기에.
서하가 노트를 덮더니 다른 책을 꺼낸다.
이번에는 확실히 제목을 보았다.
[닐스 헨리크 아벨 전기]
‘위인전을 읽는다고?’
이것은 티배깅인가?
지훈은 혼란스러웠다.
밤새 친구들과 게임하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화가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난 네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얘기를 꺼내봐야 더 못난 사람이 될 뿐이다.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서하가 슬쩍 눈을 들어 자신을 본다. 그리고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땅콩 드실래요? 저희 텃밭에서 재배한 건데 엄마가 공부할 때 먹으라고 볶아주셨어요.”
양손 위에 가득 올려진 굵은 땅콩. 아무리 봐도 순수한 호의로 건네는 얼굴이다.
한때 기만 질을 자주 해봤던 자신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테스트해 보기로 한다.
“서하야, 이것 좀 알려줄래? 이해가 안 가는데.”
지훈이 땅콩을 받으며 노트를 편다.
저녁 내내 풀리지 않았던 문제였다.
서하가 문제를 힐끗 보더니 연필을 들어 빈 종이에 수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대칭성을 이용하면 쉬워져요.”
사각사각.
서하의 연필이 움직이자 일견 복잡해 보였던 문제가 단순한 형태로 변환되어 갔다. 마치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자연스럽게.
“여기서는 치환을 이용하면.. 이렇게 되구요.”
지훈이 놀란 눈으로 서하의 손끝을 따라간다. 자신이 세 시간 넘게 붙잡고 있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훈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질투심과 경외감이 뒤엉킨 복잡한 기분.
“서하야.”
“네?”
“넌 우리가 경쟁자란 생각이 안들어?”
이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서하가 고개를 갸웃한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모르는 걸 알게 되나요?”
“...뭐?”
“전 알고 싶은 게 많아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증명들도 잔뜩 있구요.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만···.”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사고.
지훈은 유서하라는 거울을 통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재능을 방패 삼아 숨어있던 비겁함.
상대적 우월감을 즐기며 안도하는 게으름.
사실은 노력하고 싶었다.
그저 도전하는 것이 두려웠을 뿐.
기껏 최선을 다 해보겠다고 온 겨울 학교인데 지훈은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언제든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한발쯤을 미리 빼고 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난 정말로 특별한가?’
눈앞에 있는 이 아이보다?
지훈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아무리 자신이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딱 한 번, 한 번만 전력을 다해보자.
그렇게 마음 먹었다.
발을 빼는 건 그다음에 해도 상관 없으니까.
* * *
겨울학교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교수 라운지,
창밖으로는 눈 덮인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올해 아이들은 좀 어떤 것 같아요?”
김지윤이 컵을 내려놓으며 박철민 교수에게 묻는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겨울학교 참관을 위해 종종 이곳을 찾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던데? 몇몇 애들은 확실히 눈에 띄어. 수정이는 원래 잘했지만 작년보다 훨씬 나아졌고.”
기대주였던 수정이 바라는 대로 성장하자 박 교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외모와는 다르게 정말 성실하죠.”
“솔직히 말하면 올해 IMO는 기대해 볼 만할 것 같아.”
우승은 무리라도 2위나 3위 정도는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얘길 하지 않으시네요?”
“무슨?”
“왜 이러세요. 아시잖아요, 유서하.”
박 교수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벌써 소문이 났어? 넌 대체 서하를 어떻게 아는 거야?”
“다 아는수가 있죠.”
“사실 굉장히 조심스러워. 우리나라는 한 번도 천재를 제대로 키워낸 적이 없었잖아.”
중국과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베트남마저 배출한 필즈상 수상자를 한국 수학계는 한 명도 내지 못했다.
“제 생각은 달라요. 천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거라 생각해요.
아벨은 당장 오늘 먹을 빵이 없고 결핵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잖아요? 키우지 못했다면 그건 애초에 그 정도의 재능이었다는 뜻이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괜히 기대하다 실망할까 무서워서 그래.”
“장담하는데 서하는 그 정도 레벨이 아니에요. 대수기하학(Algebraic Geometry * 수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어려운 이론으로 꼽히는 분야) 문제를 내봤는데 거침없이 풀더라니까요? 특히 수에 대한 수학적 직관은 정말···.”
다른 모든 것은 훈련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습득할 수 있지만 수학적 직관(Mathematical Intuition)만은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다.
지윤은 서하에게서 이것을 보았다.
“알아, 알아. 수업을 듣지도 않았으면서 판서에 부호하나 틀린걸 잡아냈으니까. 덕분에 올해 걱정 하나는 덜었지.”
“IMO 말씀이죠?”
“그래. 한국이 단체에서 상위에 못 들더라도 개인 1위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확실하죠.”
두 교수는 고교 레벨에서 서하보다 수학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순두부찌개, 제육볶음, 깍두기, 해초무침, 버섯볶음, 멸치 볶음.
식판 위에 음식이 정갈하게 담겨있다.
먹음직스러운 메뉴지만 서하의 젓가락질이 점차 느려진다.
‘엄마 밥 먹고 싶다.’
결국 서하는 저녁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처음엔 좋았다.
대학 식당에서 나오는 다양한 메뉴들이 신기했고,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들도 잔뜩 있어서 매일이 즐거웠다.
하지만 벌써 2주째.
서하는 평생 먹어온 엄마의 집밥이 너무 그리웠다.
카페테리아를 나선 뒤 주위를 한바퀴 돌고 방으로 올라간다.
‘서은이는 뭘 하고 있을까?’
동생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
어쩌면 울며 떼쓰던 동생보다 자신이 더 서은에게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를 가건 종종걸음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던 동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집에 가면 더 잘해줘야지.’
서하가 책상 위에 있는 캠퍼스 노트를 펴서 넘긴다.
노트 위에 빼곡하게 적힌 수식과 그래프.
[4색 정리(Four Color Theorem).]
평면 위에 그려진 어떤 지도라도 네 가지 색만을 이용해 모두 구분되게 칠할 수 있다는 이론.
서하는 아직도 이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1976년 케네스 아펠과 볼프강 하켄이 컴퓨터를 이용해 이 가설이 참임을 밝혀냈지만 서하는 도저히 그것을 올바른 증명이라 인정 할 수 없었다.
“124번째 시도.”
서하가 중얼거리며 연필을 든다.
서하에게 수학이란 인간의 직관과 치밀한 논리가 만나는 아름다운 언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드시 우아한 해답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켄과 아펠의 증명은 4색 정리에서 발생하는 1,936개의 특수한 예외를 컴퓨터로 하나하나 확인하는 무차별 대입법이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인간은 모두 확인할 수 없었지만 컴퓨터는 이를 가능케 했다.
“그건 증명이 아니라 그냥 확인.”
서하는 확신했다. 오늘날 오일러나 뉴턴이 살아있었더라면 결코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거라고.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서하가 연필 끝에 달린 오리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첫 번째 시도는 일곱 살 때였다.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기에 평면을 삼각 분할하고 오일러의 공식과 그래프 기초이론만을 이용해 도전했었다.
20번쯤 실패했을 때 확신했다. 그래프의 최소 차수와 크로매틱 수(chromatic number)의 관계를 이용하면 분명 돌파구가 있을 거라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
50번째에서는 위상수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결국 조합론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복잡한 경우의 수는 끊임없이 나타났고 그것을 모두 제어할 수 있는 단일 이론을 서하는 제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하에게 중요한 것은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돌파구가 생길 것이라 믿었다.
사각사각.
‘굉장한 집중력이다.’
지훈이 문제를 풀다 서하를 힐끔 바라본다.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지훈은 그를 방해하기 싫어 조심스럽게 문제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두 시간 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서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잠시 망설이다 들려오는 목소리.
“···나야, 임수정.”
서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오후에는 분명히 트레이닝복이었는데 어느새 치마와 코트를 입은 모습이다.
“잠깐 따라올래? 도움이 필요해.”
“어?”
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수정이 서하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간.
밖은 이미 어둠에 잠겨있다.
방학이라 건물이 많이 비었는지 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다.
계단을 내려가 라운지로 향한다. 그곳에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스터디룸이 나왔다.
수정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연다.
“제가 데려왔어요.”
수정이 서하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서하가 어리둥절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너무 오래 걸렸잖아!”
지예의 핀잔에 수정이 머리를 꼬며 딴청을 부린다.
고창석, 서지예, 성지훈.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문제 풀이 때 같은 조였던 사람이 한 명.
“우리 인사 했었지? 어서 앉아.”
작년 IMO에 나갔었던 고3, 김도경이다.
전에도 문제 풀이를 주도했었는데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다.
서하가 자리에 앉자 도경이 일어났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억지로 온 건 아니지?”
도경의 물음에 서하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IMO에 나갔을 때 우리 팀은 솔직히 엉망이었어. 경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도경이 한숨을 쉰다.
“팀워크가 제로였단 거야.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빴거든.”
수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최악의 성적을 거뒀던 작년 IMO는 겨울 학교에서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IMO는 개인전이면서 동시에 단체전이야. 각자 받은 점수가 합산되어 나라의 순위가 정해지거든. 그런데 우린 서로를 방해하진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았어.”
고창석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받는다.
“정보 공유도 전혀 안 됐고.”
“결과는 뭐 다들 알다시피···.”
도경의 목소리에 후회가 묻어난다.
“중국이나 미국 애들을 보니까 완전히 달랐어. 정말 한 팀처럼 움직이더라고. 공부할 때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고, 누군가 막히면 다른 사람이 도와주고.”
“솔직히 그때는 3학년 오빠들이 너무 존재감이 없던 게 문제였어요.”
수정이 입을 삐죽 내민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선배가 있었으면 우리도 묻어갈 수 있었겠지.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잖아? 너는 최연소였고 나나 창석이도 2학년이었으니까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어.”
“그래서 우릴 모은 거야?”
지예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일단, 나는 죽어도 작년처럼 망하긴 싫어. 내가 수학을 제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연장자로서 모임을 리드하고 싶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도경의 진지한 표정에 모두가 자세를 바로 잡는다.
“좋아.”
“저도 좋다고 생각해요.”
“상관없어.”
모두가 IMO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서하도 잘 모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여섯 명은 멤버로 선발될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내가 임의로 부른 거야. 사실 수정이랑 상의한 거지만.”
수정이 부끄러운지 딴 곳을 본다.
“뭐, 사심 없이 부른 거 같긴 하네.”
“어제 중간시험 결과대로 아냐?”
겨울 학교 기간에는 두 번의 시험이 있다.
시험 후에 피드백을 주고받기 때문에 여기 있는 모두가 서로의 성적을 알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올해 우린 작년에 비해 압도적인 강점이 있어.”
“그게 뭐죠?”
도경이 서하를 똑바로 쳐다본다.
“유서하. 바로 너야.”
“네?”
“서하야, 우리한테는 올림피아드 기출이 사실 어려워. 솔직히 말하면 정말 정말 어려워.”
도경의 고백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3년째 이걸 준비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막히는 곳 투성이야.”
창석이 안경을 벗어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 정수론이나 조합론은 그나마 접근법이 보이는데 기하는 답도 없어.”
지예도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올림피아드 스타일의 문제에 고전하는 중이었다.
“문제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단서조차 없으니. 그렇게 몇 시간을 고민해야 길이 보일랑 말랑해요.”
기하학은 올림피아드, 아니 수학의 가장 사악한 악마다.
“우리가 못난 게 아니야. 오히려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지 않을까? 유명 대학 석박사들도 올림피아드 유형의 문제에 익숙하지 않으면 태반이 풀지 못해.”
도경이 서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그런데 난 겨울 학교에 온 이래로 서하 네가 한 문제도 틀리는 걸 본 적이 없어. 설마 이게 너한테는 쉬운 거니?”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곳에 오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서하가 자신이 이틀간 고민하던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렸을 때 이 아이는 차원이 다르단 걸 깨달았다.
“저..전···.”
서하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솔직히 말해도 돼.”
다 안다는 듯한 수정의 목소리.
지예와 지훈도 서하를 보더니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서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저는 올림피아드 기하가 왜 어렵다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잘한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패기를 보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이는 결코 만용이 아니었다. IMO 문제에 대한 서하의 담백한 감상이었을 뿐.
“와! 살다 살다 이런 말을 들어보네.”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인 창석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기대는 했었는데 진짜? 막 보면 그냥 풀려?”
“이야! 이거 녹음해 뒀어야 했는데.”
“내가 하던 건 잘난 척도 아니었네.”
모두가 떠들며 왁자지껄 웃는다.
서하도 그 모습이 보기 좋아 함께 웃었다.
“서하 너 그거 진짜지?”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도경이 다시 한번 서하에게 다가가 확인한다.
“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는 사이 수정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도경 오빠! 그 문제 한번 시켜보죠. 작년 IMO에서 돌았던···.”
“아!”
도경이 노트를 펴더니 자와 컴퍼스를 가져와 도형을 그린다.
“이건 인도 공과대학(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 IIT) 입학시험 문제야.
작년에 인도 대표 중에 한 명이 수험 준비한다고 가져왔었거든.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풀렸는지 대회중에 각 나라 애들한테 돌렸어.”
IIT는 인도 14억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다.
졸업하면 바로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이 데려가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다.
입학 난도는 당연히 극악.
도경의 말이 이어진다.
“그런데 웃긴 건 마지막 날까지 이걸 푼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결국 인솔 왔던 칼텍 교수님이 풀어주셨어.”
오랫동안 연구한 문제인지 도경이 능숙하게 도형을 그렸다.
“자! 한번 풀어볼래?”
모두가 재미있는 쇼 프로를 보듯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부담 갖지 마. 그냥 장난 삼아 해보는 거니까.”
도경이 웃는다.
하지만 장난이라 하기에는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지예, 창석, 지훈, 수정 모두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고 있다.
서하가 노트를 받는다. 그리고 1분 정도 살펴보더니 연필을 쥐었다.
사각ㅡ.
도형 위에 보조선이 하나 그려진다.
도경은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바로 저기서 긋는다고?”
사각, 사각.
두 번째 선 그리고 세 번째 선.
연필 끝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그림이 전혀 다른 구조로 바뀌었다.
수정이 숨을 죽였다.
자신은 답을 알고도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하는?
서하는 계산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짧은 각도 표기, 몇 줄의 비례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에 동그라미를 치며 증명을 끝냈다.
“끝났어요.”
침묵이 흐른다.
지예와 창석, 지훈이 정답이 맞냐고 확인을 구하듯 도경을 바라보았다.
“마..맞았어. 저게 정답이야.”
떨리는 도경의 목소리.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용한 가운데 지예가 먼저 입을 연다.
“기하는 안 풀리면 백지, 풀리면 세줄.
우리 선생님이 자주 쓰던 말인데 진짜 눈앞에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네.”
지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서하를 바라본다.
서하를 잘 아는 수정조차 그가 이 정도 수준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하는 이것이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서하에게 있어 올림피아드는 그가 사랑하는 수학이 아니었다.
문제를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서술한다. 실제 풀이에는 쓰이지 않는 조건을 섞어 혼란을 조장한다. 도형을 일부러 복잡하게 그려 본질적 구조를 숨긴다. 핵심 조건을 다른 형태로 변장시켜 숨긴다.
서하의 뛰어난 수학적 직관은 이 모든 속임수들을 꿰뚫어 보았다.
트릭과 기교에만 의존하게 만드는 사기극.
그것이 서하가 바라본 IMO였다.
서하는 이것이 수학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게임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나? 올림피아드에서 논문을 쓰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니.’
주최 측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런 트릭에 속지도 않을 테고.’
서하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뒤늦게 감탄사가 터진다.
“대박!”
“나 말로만 들었던 수학적 직관이란걸 오늘 처음 본 것 같아.”
“너무 대단해서 이길 생각도 안 드네.”
“전 원래 알았어요.”
우리 편이면 무적!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루이첸 이라고 작년에 개인 1위를 했던 중국 애가 있어. 그때 2학년이었으니 올해도 나오겠네. 걔가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거든. 특히 기하에서.”
수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기억나요. 마지막 문제를 혼자만 풀었었죠. 지금 생각하니 서하처럼 직관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었나 봐요.”
“올해는 루이첸이 깜짝 놀라겠네.”
수정과 도경이 서로를 보더니 씨익 웃는다.
“자자! 서하가 있다고 해서 묻어갈 생각 말자. 우리도 메달 하나씩은 걸어야지.”
IMO에서는 대략 상위 10%에게는 금메달, 그리고 일정 비율로 은, 동이 주어진다. 최종적으로는 참가자의 절반 정도가 메달을 받게 된다.
“서하야, 괜찮다면 앞으로 우리 공부 좀 도와줄래? 어려운 게 너무 많아.”
“나도!”
“나도 부탁해!”
“네! 제가 도움이 된다면요.”
서하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도경은 다음날 겨울 학교 인원 모두에게 스터디의 존재를 알리고 참가자를 받았다.
남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던 서하는 스터디를 진행하며 의외로 큰 성과를 얻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언어화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직관으로 뭉뚱그리며 넘어갔던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겨울 학교가 끝나고 넉 달 뒤,
최종 선발시험이 열렸다.
합격자는 스터디에 참여했던 6인이었다.
어린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언제나 화제가 된다.
서하의 IMO 대표 선발 뉴스는 빠르게 전파를 타며 주요 일간지와 포탈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했다.
[12세 천재 소년,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선발]
-충청북도 옥천군의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한국 교육사에 길이 남을 기록이 탄생했다.
도담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인 유서하(12세) 학생이 20xx년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 한국 대표팀에 최연소로 선발된 것이다.
초등학생이 IMO 대표로 발탁된 것은 한국에서는 처음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필즈상과 아벨상을 수상한 수학자인 엘리야 크로넨에 이어 두 번째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서하 학생이 사교육의 도움 없이 방과후 수업과 독학만으로 이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중략)
이번 소식이 알려진 후 도담초등학교는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김재형 교장은 연일 쏟아지는 언론사의 취재요청에 업무가 힘들 정도라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후략)
└사교육 없이? 저게 가능한가?
└말로만 그런 거겠지. 저걸 믿냐?
└님들 저기 충북 옥천이에요. 인구 4만 깡촌이라고ㅋㅋㅋ 읍내에 학원도 없는데 무슨.
└촌이라뇨. 옥천 군민인데 듣기 불편하네요.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여러분들의 택배를 압수하겠습니다.
└공포의 옥천 허브ㄷㄷㄷ
└초6이지? 진짜 미쳤네. 과고, 영재고 애들 다 제끼고 뽑혔다는 거 아냐.
└얘 전에 신문에 나왔던 걔지? 전국 수학 경시대회 대상.
└ㅇㅇ맞음. 저 정도면 서울대 프리패스겠지?
└출전한 것만 해도 대단하긴 한데 그래도 결과는 두고 봐야지.
└작년 전체 3위 했던 학생도 나가네. 이번엔 좀 잘 해보자.
* * *
쪼르륵.
컵에 뜨거운 보리차가 담긴다.
우현은 대체 보리차를 마지막으로 마셨던 게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고소한 보리 향에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서하를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미영에게 우현은 은인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인데요.”
우현이 보리차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젓는다. 오랜 시간 옥천에 드나들다 보니 서하의 부모와도 친분이 쌓였다. 우현은 이들 부부의 순박함이 좋았다.
‘자식들로 장사하려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데.’
기사가 나간 이후 우현은 불안함을 느꼈다. 물론 이들 부부를 믿지만 세상엔 나쁜 놈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도 서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서하가 뭘 공부해야 할지 알려주시고 책도 보내주시고···.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네요.”
16살에 카이스트 석사가 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다 믿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유명한 강사라고 하니 자신들보다는 낫겠다 생각했을 뿐.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의 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실 오늘은 걱정이 돼서 왔습니다.”
우현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걱정이요?”
“기사가 나간 후에 벌써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어제부터 전화가 계속 와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미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역시 그렇군요.”
우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희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서···.”
보아하니 아직 계약을 하거나 진지한 만남을 가진 적은 없는 모양이다. 우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디서 왔습니까?”
“교육업체란 곳에서 몇 군데,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후원을 하겠다고 했어요.”
“교육업체요?”
“네. 교재를 만들고 강의도 하는 곳이라는데요, 서하한테는 그냥 공짜로 책이랑 강의를 제공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성과가 나오면 장학금도 주겠다고···.”
우현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눈빛이 사나워진다.
“아니, 이런 상도덕도 없는 양아치 새끼들이!”
“네?”
처음 들어보는 우현의 거친 말에 미영이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감정적이었네요.”
우현이 숨을 고르며 말을 정리한다.
“업계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앞으로 서하가 거둘 성공을 자기들 덕분인 양 포장하는 겁니다. ‘우리 강의를 듣고 우리 교재로 공부한 학생이 IMO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라고 홍보하는 거죠.”
심지어 돈도 제대로 주지 않으려고 하다니 아주 질이 나쁜 업자들이다.
“에구,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 회사일수록 손해나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나중에 서하가 성장하면 어떤 식으로든 족쇄가 될 겁니다.”
우현의 말에 미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지금처럼 하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서하 같은 천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환경이니까요.”
대화하는 중에 서은이 엄마 뒤로 몰래 다가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우현을 보며 외친다.
“아! 무서운 선생님이다!”
우현이 쓴웃음을 짓는다.
서하의 동생이라길래 신경이 쓰여 간단히 테스트만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놀라운 기억력과 암산 능력.
숫자 뽀개기를 하자길래 알려달라고 해봤더니 소인수분해였다.
욕심이 생겨서 조금 가르쳐보려 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기겁하고 멀리 도망친다.
그 후로 서은은 우현을 볼 때마다 절대 다가오지 않고 고양이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서하가 가르쳤다던가?’
서하는 동생을 대체 뭐로 키울 생각인 걸까?
문득 궁금해지는 우현이었다.
* * *
겨울이 지나고 봄이 스쳐 간다.
서하는 어느덧 6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벌써 5월, 초여름의 더위가 느껴지는 계절이다.
그동안 서하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키가 자랐다.
예전에 입던 옷이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서하가 책상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수식이 아닌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뭘 쓰고 있는 거니?”
미영의 물음에 서하가 노트를 덮는다.
“일기요.”
하지만 그것은 일기가 아니었다.
수학에 완전히 몰두하며 서하는 자신의 강박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할 수 밖에.
서하는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과학적 접근을 택했다.
심리학 책에서 찾아낸 내러티브 치료 기법이다.
문제를 자신과 분리해서 보는 외재화(Externalization)를 이용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박을 적이 아닌 동거인으로 생각해 보자.’
먼저 이름을 붙여주었다.
‘더키.’
분명 못된 성격일 테니 가장 성질이 나쁜 오리의 이름을 주었다.
더키는 완벽한 패턴과 아름다운 대칭을 사랑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수치로 정리하고 기록하려 한다.
서하는 하루 일정 시간을 더키에게 완전히 할당해 주었다.
더키가 하고 싶은 대로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그 시간 외에는 ‘지금은 네 시간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협상을 거는 것이다.
이렇게 대하고 보니 더 이상 더키는 성가시고 해로운 존재만은 아니었다.
수학 검산을 더키에게 시켜봤더니 즐거워했다.
문제의 답안을 적을 때도 더키는 아주 세세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이다. 자신이 습관적으로 빼먹는 부분까지 자세히 적는 것을 좋아했다.
서하가 옷장을 열다 연필 끝의 오리를 가만히 쳐다본다.
“너도 이해해 줄 거지?”
오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서하는 답변을 들은 것 같았다.
서하가 체크무늬 옷 대신 검은색 바람막이를 집는다.
순간 거부감이 밀려왔다.
“더키, 하나씩 서로 양보하는 거야.”
서하가 이를 악물고 바람막이를 꺼내 입는다.
견딜만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
더키는 변덕스럽다.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아 뭐든지 해줄 것 같다가도 다음날이면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둘 다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수학이었다.
[대수적 위상수학(Algebraic Topology)]
호모토피, 호몰로지 이론의 복잡한 구조들.
[Hₙ₊₁(X,A) → Hₙ(A) → Hₙ(X) → Hₙ(X,A) → Hₙ₋₁(A)···]
“더키, 이 수열을 같이 확인해 보자.”
더키의 강박적 정확성이 빛을 발한다. 복잡한 도표에서 모든 화살표의 방향과 조건을 순식간에 검증했다.
서하는 더키 역시 자신처럼 정확한 수열을 사랑하는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날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더키가 무한 급수의 모든 가산 구간들을 일일이 확인하려 했다.
“그건 끝이 없어. 적당히 끝내자.”
더키가 잠잠해진다.
효과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대성공이었다.
서하가 보고 있던 책을 덮고 라마누잔의 세타함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함수의 행렬.
완벽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예측 가능하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
수학자 프랑수와 비에트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출국일이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된 서하는 전날 긴장해서 잠을 설쳤다.
“서하야, 여권 가방에 잘 들어있지?”
미영도 아들을 해외에 내보내는 것이 불안한지 서하의 짐을 여러 번 확인한다.
“네, 엄마! 걱정 마세요.”
출국장 로비는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여행객들과 배웅 나온 가족들, 그리고 기자들까지.
“유서하 학생! 이쪽 좀 봐주세요!”
플래시가 터진다.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데 올해는 초등학생 IMO 출전자라는 화제성 때문인지 몇몇 언론사에서 취재진을 보냈다.
“긴장되시나요?”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말로 사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서하가 당황하자 인솔자가 앞으로 나선다.
“죄송하지만 서하는 아직 어리니 간단히만 부탁드릴게요.”
“네, 교수님.”
한 기자가 마이크를 서하에게 가져다 댄다.
“유서하군!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수학을 잘 하는데 서하군만의 특별한 비결이 있을까요?”
기자의 질문에 서하가 잠시 생각하더니 순박하게 웃는다.
“그냥 수학이 좋아서요.
아! 사실 저한테도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책을 보내주시고 조언도 해주시는 선생님이 계세요.”
“그분이 누구신가요?”
“이름을 알려드리고 싶은데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셔서요. 나중에 제가 세계 수학사에 기록될 큰 업적을 세우면 그때 말해달라고···.”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네요. 꼭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기자가 크게 웃는다.
박 교수가 시계를 보다 끼어들었다.
“저쪽으로 가자.”
조금 걸으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수정이 부모님과 함께 나와 있다.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빼입은 성지훈과 평소 모습 그대로인 고창석도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참 뒤에 미용실에서 막 나온 듯한 화려한 모습으로 지예가 나타났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의 도현까지.
6명의 대표가 모두 모이자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서하가 몸을 낮춰 훌쩍 커버린 서은과 눈을 맞춘다.
“이제 안 울 거지? 오빠 다녀올게.”
서은은 또 다시 오빠가 멀리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하루 내내 울었다.
하지만 서하가 꼭 금메달을 따서 목에 걸어주겠다고 약속하자 억지로 울음을 참는 중이다.
“응! 안 울어. 대신 금방 와야 해? 그리구 내 금메달도 잊지 말고 꼭 챙겨와야 해?”
서하가 동생의 작은 몸을 안고 등을 토닥인다.
‘정말 길었다.’
여기까지 6년.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서하는 재미없는 대회 문제보다는 세상에 수북이 쌓여있는 난제들과 씨름하고 싶었다.
‘이제 며칠만 더.’
110개국,
660명의 수학 영재들이 경쟁하는 올림피아드가 이제 곧 개막한다.
도착 시간이 거의 되어가자 모두가 창가에 달라붙어 밖을 구경한다.
서하도 신기한 듯이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영국의 풍경은 옥천과는 너무나 달랐다.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로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와, 정말 영국이다!”
지훈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서하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처음으로 밟는 외국 땅, 그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입국 심사를 통과하자 IMO 조직위원회에서 나온 안내요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Welcome to London! Korean Team]
박 교수가 피켓을 들고 나온 사람들을 찾아가 서류를 건네준다.
준비된 버스에 오르자 런던 시내로 향하는 길이 시작되었다.
템스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 빅벤과 런던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하는 코를 창에 대고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내일이 개막식이구나.”
수정이 가방에서 일정표를 꺼내 확인한다.
개막식은 런던의 로얄 알버트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버스가 도심을 벗어나 조용한 주택가로 들어서자 창밖 풍경이 바뀌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로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저기가 숙소다.”
박 교수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킹스톤 대학교 기숙사.
IMO 기간에 각국 대표단이 머물 숙소였다. 3층짜리 건물이 여러 동 늘어서 있고, 앞마당에는 각국의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습한 런던의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Korean team, this way please.”
조직위 직원이 일행을 안내한다. 로비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방 열쇠를 받았다.
“룸메이트는 임의로 정했습니다.”
서하는 겨울 학교에 이어 런던에서도 지훈과 같은 방이었다.
“또 형이랑 룸메이트네요!”
서하가 기뻐하자 지훈도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잘 부탁해.”
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다. 201호를 찾아 문을 열었다.
“우와!”
생각보다 넓은 방이었다. 침대 두 개와 두 개의 책상, 그리고 작은 냉장고까지. 창문으로는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서하가 창가 쪽 침대를 선택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리 피규어들을 꺼내 나란히 세워두니 그제야 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서하야!”
지훈이 검지를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한 뒤 서하를 부른다.
“들어봐.”
벽에 귀를 가져대자 옆방 학생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중국어네요?”
“응, 중국 애들이 옆방에 있나 봐.”
친목을 다지라는 의미였을까? 방을 여기저기 섞어놓은 배치였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지훈이 문을 연다.
학생들이 방에서 나와 서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금발의 서구권 학생들, 검은 머리의 동양인들, 그리고 국적을 특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인종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
“Hello. I am Hans.”
서하와 눈이 마주친 한 학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가슴에 달린 배지를 보니 독일 대표였다.
“Nice to meet you. I am Seo-ha”
서하가 영어로 대답했다.
‘공부 해두길 잘했다.’
서하는 출국하기 일주일 전에 영어 회화 사전을 두 권 샀다. 현지인의 음성이 담긴 CD가 부록으로 담겨 있어서 발음 교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상대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You look quite young. Is it only because you are Asian? I'm from Frankfurt, Germany. It's my first time in England, so are you? I'm worried that Asians are good at math.”
(너 상당히 어려 보이는구나? 동양인이라 그런가? 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왔어. 영국은 처음인데 너도 그러니? 동양인들은 수학을 잘한다는데 걱정이야.)
“I'm actually young, 12 years old. It's my first time in the U.K, too. It's also my first time being a foreigner, so I've been looking forward to it.
(저는 실제로 어려요, 12살이니까. 저도 영국은 처음입니다. 사실 외국에 나오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지훈이 서하의 유창한 영어실력에 깜짝 놀라서 다가온다.
“야! 너 뭐야! 사교육 받은 적 없다며. 영어는 왜 잘하는데?”
“책으로 공부했어요.”
사실이었다. 회화 사전을 전부 외웠으니.
서하는 사전에 담긴 온갖 상황에 대비한 수많은 문장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영어 회화를 뭔 놈의 책으로 공부해! 넌 책만 있으면 우주선도 직접 만든다 그러겠다!”
울컥했는지 지훈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첫날이라 모두가 흥분한 기색이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너드들이 금세 낯선 이들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한다.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옆방 문이 열렸다.
중국 학생들이 몰려 나온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리더로 보이는 키가 큰 학생.
날카로운 눈매에 차분한 표정. 그가 나와 주위를 둘러본다.
“쟤가 루이첸이야.”
도경이 서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느새 한국 대표들이 모두 복도에 모였다. 루이첸이 아는 얼굴을 발견해서 반갑다는 듯 도경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례한 말을 던진다.
“올해도 너희들이 왔네? 한국인 중에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없어?”
작년 노메달에 그쳤던 도경과 창석의 얼굴이 붉어진다.
화가 난 수정이 나서서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도경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올해 다른 건 몰라도 개인 1위는 한국이 가져갈 생각이야.”
루이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포기해. 너희들로는 가망 없으니까.
우린 너희하고 경쟁의 레벨이 달라. 중고등학생 수만 해도 너희 나라 전체 인구보다 많으니까.”
한해 대입 수험생 인구만 천 오백만 명.
중국 대표단은 그중에서 고르고 또 고른 인재들이었다. 단체는 물론 개인 1위까지 그들은 결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어렵다는 거 알고 있어. 그런데 올해 한국에는 말도 안 되는 몬스터가 있거든. 너도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도경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을까? 루이첸이 한국 대표단을 쓱 둘러본다. 그의 시선이 서하에게서 잠시 머물다 떠났다.
“곧 알게 되겠지. 행운을 빌게. 우리와는 달리 너희에게는 그게 필요할 테니까.”
작년 개인 1위라는 아우라 때문인지 거만한 발언조차 그의 입에서 나오니 그럴듯했다.
루이첸과 중국 대표들이 멀어져간다.
“후우와! 긴장했잖아요!”
지훈이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쟤들은 왜 저렇게 분위기가 살벌해?”
지예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중국은 진짜 장난이 아니야. 정부에서 대놓고 올림피아드를 밀어주니까.
일단 대표로 뽑히기만 해도 칭화대나 베이징대 중에서 어느 과든 선택해 들어갈 수 있어. 1위를 하면 분명히 더 큰 보상이 있겠지. 거의 목숨 걸고 하는 거라고 봐야 해.”
“단체 우승만 20회가 넘으니까. 미국도 잘하지만 중국은 IMO에서 정말 강해.”
도경의 설명에 창석이 덧붙인다.
중국은 작년 6명 전원 금메달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우며 IMO를 초토화시켰다.
짐을 정리한 뒤 잠시 쉬고 있자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Attention all participants. Lunch is ready at the dining hall."
“밥 먹으러 가자!”
지훈이 책상에서 일어난다.
식당은 1층에 있었다.
넓은 홀에 원형 테이블들이 놓여있고, 각국 대표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한국 팀도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가 뭐야?”
수정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피시 앤 칩스네요.”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단일 메뉴였다.
서하는 백과사전에 영국 대표 음식으로 소개된 메뉴를 맛본다는 생각에 흥분해 있었다.
“너무 기대하지 말지? 영국 음식이 맛 없단 얘긴 너도 들어 봤잖아.”
“그건 과장된 게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세계를 호령하던 선진국인데···.”
타국과의 교류가 많은 나라는 식문화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영국은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은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 라고 서하는 생각했다.
“난 미리 경고했다?”
서하뿐 아니라 해외가 처음인 지예와 지훈도 꽤나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잠시 후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대학생들이 음식을 서빙해 주었다.
“Here's your fish and chips! Traditional British cuisine at its finest!"
영화에서 들었던 멋진 포시(Posh) 억양.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다.
서하가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거대한 플레이트 위에 커다란 생선튀김과 굵직한 칩스가 담겨있다.
서하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생선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라?’
튀겼는데 전혀 바삭하지 않다.
튀김옷이 기름을 흠뻑 먹어 질척거린다. 그뿐 아니라 생선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는지 조금 먹었을 뿐인데도 강렬한 비린내가 올라왔다.
“으···.”
물을 벌컥벌컥 마셔봤지만 그 맛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지훈도 칩스를 하나 집어 먹더니 표정을 구겼다.
“감자튀김은 대충해도 맛있는 거 아니었어?”
눅눅한 식감의 칩스.
심지어 너무 두꺼워서인지 안은 제대로 익지 않았다. 감자튀김 위에는 소금과 식초를 뿌렸는데 처음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허들이 너무 높았다.
수정이 ‘내가 말했지?’라는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본다.
그때 뒤쪽 테이블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건 방해 공작이야. 시험 전에 우리 컨디션을 망쳐서 자기네 성적을 올리려는 수작이라고.”
서하가 뒤를 돌아본다.
미국인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던 영국 학생 중의 한 명이 기분이 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국 음식이 맛없는 건 우리도 아니까 그냥 먹지? 최소한 우린 전통이란 게 있잖아. 너희 미국인들한테는 뭐가 있는데? 햄버거?”
미국 학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최소한 햄버거는 맛있거든?”
그때 서하와 인사를 나눴던 한스가 미국 쪽 테이블을 보며 한마디 툭 던진다.
“햄버거는 사실 독일 함부르크에서 나온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쪽 요리는 아니지 않을까?”
근처에 있던 프랑스 테이블에서 곱슬머리 남자가 츳츳 거리며 일어나 검지를 흔든다.
“이런 친구들···. 이런 걸로 싸우지 말자. 우리 프랑스인들은 모든 나라가 요리라는 예술을 마스터할수 있는 게 아니란걸 이해하니까.”
이탈리안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혀를 차며 한 마디 한다.
“이탈리아 밖에서 먹는 음식들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야. 우리처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어야지.”
“우린 걱정 없어. 차이니즈 레스토랑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있으니까.”
미국인들이 가볍게 시작한 장난이 어느새 요리 강국들의 자랑 배틀이 되어버렸다.
내성적인(너드같은) 학생들도 이를 드러내며 키득거리고 웃는다.
대회 관계자로 보이는 신사가 포크로 글라스를 두드려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미안합니다. 대량 조리가 쉽지 않아 음식이 기대에 못미쳤군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운이 좋습니다. 적어도 오늘 장어 젤리나 키드니 파이가 나온 건 아니잖아요?”
“푸하하하!”
“하하하!”
근엄해 보이는 영국 신사의 자학적인 농담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오늘 우리는 모두 고통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음식에 좀 더 신경을 쓰라고 주방에 당부할 테니 안심하세요.”
서하도 긴장이 풀려 웃음을 터트렸다. 음식은 형편없었지만 분위기는 한결 편해졌다.
어색해하던 각국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대화를 나눈다.
식사가 끝나고 각국 대표들이 삼삼오오 흩어져갔다.
한국 팀은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습관처럼 모두 서하의 방으로 모였다.
“자, 그럼 시험 전에 마지막 점검을 해보자.”
도경이 가방에서 그동안 만들어온 자료를 꺼낸다.
겨울 학교 이후 대표 팀은 주기적인 만남을 가져왔다.
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항상 기억하세요. 기하는 숨겨진 대칭을 찾는 게 절반입니다.”
서하의 설명을 모두가 진지하게 듣는다.
서하와 함께 수개월간 트레이닝을 한 대표 팀은 이전과 다르게 자신감에 차 있었다.
꼬르륵.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모두가 눈치를 보며 식당에 내려가길 주저한다.
도경이 지훈에게 슬쩍 물었다.
“···컵라면 가져온 거 없냐?”
“교수님께서 많이 챙기셨다네요.”
“가서 좀 받아오자.”
대부분의 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개막식을 마친 다음날.
3문제 4시간 30분, 각 국가의 명예를 건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일이 밝았다.
서하는 일찍부터 일어나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창틀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오리 피규어들.
서하의 시선이 그중 하나에 오랫동안 머문다.
‘더키, 너는 무엇을 원하니? 나를 파괴하고 싶은 거야?’
오리가 고개를 젓는 것 같았다.
서하는 머릿속 동거인이 자신에게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니란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더키는 그저 순수하게 수학을 사랑할 뿐이다.
‘우린 함께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서하야, 아침 먹자!”
샤워를 마친 지훈이 서하를 상념에서 깨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 30분.
서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식당에 내려가니 한국 팀 모두가 모여있었다.
‘잠을 못 잔 사람은 없는 것 같군.’
박 교수가 학생들의 안색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3년 전, 충분히 금메달을 딸 것이라 기대받던 학생이 평소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긴장으로 인한 수면 부족이 원인이었다.
영국식 아침 식사는 호불호가 없을 만큼 평이 좋다.
베이컨, 소시지, 해시 브라운, 구운 토마토, 버섯, 베이크드 빈, 블랙 푸딩, 프라이드 브레드, 그리고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와 다양한 잼까지.
모두가 밝은 얼굴로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플레이트에 받아먹고 있다. 서하는 잘 몰라서 ‘전부요(Everything)’라고 주문했다가 플레이트가 넘칠 만큼 가득 담긴 음식에 놀라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
각국 대표들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 어떤 이는 마지막으로 공식을 되뇌고, 어떤 이는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달래고 있다.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백 개의 책상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학생들이 수험표를 들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 이동한다.
서하 역시 자신의 좌석을 찾았다.
[KOR-1]
한국 대표팀의 1번, 서하에게 주어진 자리였다.
책상 위에는 하얀 답안지와 연필, 지우개가 놓여있다. 서하가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오른쪽 뒤 대각선에 루이첸이 앉아 있다. 그가 서하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돌린다. 미미한 적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서하는 별다른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일 뿐이다. 싫어할 이유가 없다.
‘아, 꼭 그렇지도 않은가?’
뉴턴과 라이프니츠.
17세기 후반,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미적분 이론을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뉴턴이 10년 정도 먼저 이를 생각해 냈지만, 라이프니츠 역시 자력으로 독자적인 미적분 체계를 완성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땠을까?
라이프니츠는 죽을 때까지 평생 뉴턴의 업적을 도둑질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엄청나게 억울했겠네.’
문제지가 봉투에 담겨 배부된다.
감독관이 시계를 보고 있다.
"You may begin!"
감독관의 선언이 울려 퍼진다.
모든 학생들이 동시에 문제를 개봉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 * *
루이첸에게 수학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였다.
“넌 수학에 재능이 있다. 앞으로는 학교에 나가지 말도록.”
칭화대 교수인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홈 스쿨링이 법적으로 금지된 중국이었지만 고위층 자녀들을 위한 사립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의 아버지는 좀처럼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루이첸이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둬도 결코 그를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베이징 시 초등 수학 경시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도, 10살의 나이에 전국 중학생 경시에서 대상을 탔을 때도.
“재능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범재만도 못하다.”
그에게 1등은 그저 당연히 루이첸이 가져와야 할 결과물이었다.
14살이 되던 해,
지인들과의 연락이 모두 끊겼다.
게임, 만화, TV, 10대들이 당연하게 즐겨야 할 여가는 진작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에게 남은 모든 것은 오직 수학뿐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정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손가락 끝이 굳어지도록 연필을 잡았고, 눈이 침침해지도록 문제를 풀었다.
15살이 되었지만 루이첸의 생활은 더욱 극단적이 되었다.
국가대표 후보로 선발되어 특별 트레이닝 캠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베이징 교외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캠프,
루이첸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전국에서 모인 100명의 수재들과 함께 생활했다.
하루 16시간 공부,
주 7일.
휴식은 없었다.
그렇게 거머쥔 IMO 개인 1위.
온 중국이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던 순간의 감동을 루이첸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덧 상황이 역전되었다.
한때 자신의 재능을 증오했지만 이제 루이첸은 수학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루이첸이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서하를 힐끔 바라본다.
‘저 아이가?’
어제부터 중국 팀에 이상한 루머가 돌았다.
12살 소년이 한국 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했다는 소문.
확인해 보니 이는 사실이었다.
‘나는 12살에 뭘 하고 있었더라?’
아버지에게 지옥 같던 홈 트레이닝을 받던 시기,
IMO에 나올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몬스터? 한국에서나 그렇겠지. 저 아이는 절대 중국 예선을 통과하지 못한다.’
중국 수학 역사에서도 IMO 최연소 출전자는 15살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눈도 맞추지 못할 만큼 소심했던 도경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루이첸은 그때의 일이 묘하게 거슬렸다.
시험장 곳곳에서 봉투 뜯는 소리가 들려온다.
루이첸도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 문제지를 꺼냈다.
[Problem 1]
정수론 문제다. 지긋지긋하게 풀어봤던 분야.
하지만 문제를 읽으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루이첸이 슬쩍 고개를 돌려 서하를 바라본다.
‘이렇게 빨리?’
문제를 읽기 시작한 지 2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답안을 적고 있다.
‘집중하자. 빨리 푼다고 점수가 높은 것도 아닌데. 운이 좋아서 아는 문제가 나온 거겠지.’
정수론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변수 치환이다. 조건을 만족하는 해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체계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이 반드시 있다.
루이첸이 백지에 몇가지 케이스를 적어 가며 규칙성을 찾으려 한다. 작은 수부터 대입해 보며 패턴을 찾는 것이 정수론의 기본 접근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가 어려워졌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유형의 문제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몇 번이고 겪어본 일이다. 기본 정리들의 조합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보는 수 밖에.
루이첸의 머릿속에 대입해 볼 다양한 수들이 떠오른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결국 풀 수 있을 것이다.
‘응?’
종이 넘기는 소리.
‘말도 안 돼!’
유서하가 벌써 2번으로 넘어갔다.
‘어려워서 스킵한 건가?’
하지만 소년의 표정에 좌절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웃고 있다?
경쟁의 세계에서 너무 오래 살았던 탓인지 루이첸은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 * *
서하는 기분이 좋았다.
‘문제 퀄리티가 좋아!’
1번 문제를 읽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수 배열 안에 숨어있는 우아한 규칙성이 한눈에 보였다.
마치 암호처럼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을 꿰뚫어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완벽한 배열이 나타난다.
겉으로는 정수론처럼 보였던 문제가 서하의 수학적 직관에 의해 낱낱이 해체된다.
서하가 연필을 들어 계산을 시작했다. 복잡한 대수적 구조를 재구성하고 그 안에 숨겨진 패턴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일반적인 정수를 확장된 수체(number field)로 끌어올리고 그곳에서 주어진 조건들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러자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관계식들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구조를 드러냈다.
‘놀랍다.’
혼란 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질서.
서하는 이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좋았다.
2번은 조합기하(Combinatorial Geometry) 문제였다.
평면 위의 점들과 직선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문제.
이런 문제를 볼 때마다 서하는 출제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이 사람은 수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주어진 조건들을 만족하는 점들의 배치, 그리고 그 점들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대칭성.
힌트가 부족했지만 서하에게는 오히려 즐거운 과정이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도형들이 형태와 크기를 바꿔가며 문제의 점, 선들과 어우러진다. 그리고 조건에 맞는 후보를 찾아냈다.
‘사영 기하학?’
점과 선이 원뿔 곡선으로 바뀌어간다.
19세기 수학자들이 발견한 기하학의 놀라운 성질 중 하나.
문제를 풀던 서하가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200년 전의 수학자들도 이런걸 발견했는데···.’
서하는 수학과 수학사를 공부하며 과거의 수학자들이 수천 년간 이루어 온 성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자신도 그 역사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겨났다.
‘앞으로 남들이 모르는걸 잔뜩 발견하자.’
서하가 마음을 다잡는다.
“하아···.”
“젠장.”
“끄응.”
시험장 곳곳에서 신음과도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출제위원인 마르첼로가 이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진짜 시험이지.’
마르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 순수 수학과의 교수였다. 30년간 수학 연구에 몰두해 온 그는 올해부터 IMO 출제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최근 십여 년 사이에 발생한 IMO의 변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
‘너무 쉬워졌어.’
2010년대부터 IMO에서 만점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1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했던 만점자가 이제는 거의 매년 나오고 있는것이다.
난이도 조절에 크게 실패했던 2년 전에는 만점자만 10명이 넘었으니 이러다가는 올림피아드의 명성 자체가 의심받을 판국이었다.
물론 세계적으로 수학 교육 수준이 향상된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수십 년간 축적된 기출문제들과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유형화하는 교육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치 공식을 암기하듯 문제 패턴을 익힌다.
창의적 사고보다는 숙련된 기술.
수학적 직관보다는 훈련된 기억.
과거의 IMO 우승자들은 훗날 뚜렷한 수학적 성과를 남겼다. 밀레니엄 문제인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해 낸 그리고리 페렐만처럼.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과연 올바른 시험일까?
마르첼로는 의문을 품었다.
동시에 대다수의 참가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의 가치관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테니.
‘수학 올림피아드는 재능을 가려내는 시험이어야 한다.’
진정한 수학자가 될 재목을 찾는 것이 설립 초기 IMO의 본래 목적이었다.
이제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야 할 시간이다.
“오빠, 하늘은 왜 파란색이야?”
서은이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태양 빛은 사실 무지개색이 다 섞여 있는 거야. 근데 하늘을 지나올 때 파란색이 가장 많이 흩어져서 우리 눈에 파랗게 보이는 거지.”
6살이 된 서은은 그 나이 아이들이 보통 그렇듯 성장의 한 단계에 도달했다.
이른바 ‘Why stage’.
말 그대로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하지만 서하의 대답에는 언제나 막힘이 없었다.
“그럼 다른 색들은 다 어디 갔어?”
살짝 벌어진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댄 서은의 모습.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서하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빨간색이나 노란색은 쭉 직진해서 우리한테 바로 와. 그래서 해가 빨갛게 보이기도 하잖아?”
“아! 알겠다.”
서은이 기뻐하며 박수를 치다 마당을 뛰어다닌다.
서은은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서은의 질문에 서하는 한 번도 모른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뭐든지 알고 있는 자상한 오빠.
서은은 오빠가 집을 비울 때면 몰래 서하의 방에 들어가서 놀곤 했다.
서하의 예민함을 알고 있던 미영은 ‘오빠가 오기 전까지 거긴 들어가면 안돼!’라며 딸에게 경고했지만 서은에겐 소용 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서은이 주위를 살피더니 문틈으로 작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엄마는 텃밭에 있고.’
서은이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려다보자니 책들이 너무 많아 목이 아팠다.
“동물 백과사전이..여기!”
서은이 의자를 끌어와 두꺼운 책을 꺼냈다.
백과사전을 보다 보면 가끔 오빠가 연필로 적어놓은 메모를 발견할 때가 있다. 서은은 그것을 보물찾기 하듯 하나씩 찾고 있었다.
“어제 사막 동물을 봤으니까 오늘은 바다 동물···. 바다..바다···.”
서은이 작은 손으로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긴다. 그러다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 있다!”
오빠의 글씨.
[펭귄은 사실 무릎이 있다. 털 속에 숨어있을 뿐.]
[고래는 포유동물이라 새끼한테 젖을 먹인다.]
[문어의 심장은 세 개다.]
“에? 심장이 세개?”
앉는 게 불편해진 서은이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책장을 넘긴다. 오빠 글씨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수학 백과사전에도 메모는 많았지만 서은이 읽을 수 없는 숫자와 기호여서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다음날도 서은은 오빠 방에서 바닥을 뒹굴며 놀고 있었다.
심심해서 몸을 데구르르 굴려 서랍 쪽으로 간다. 그러다 이곳에 무언가를 보관하던 오빠의 모습이 생각났다.
드르륵.
열어보니 깊은 곳에 처음 보는 노트가 있었다.
“이게 뭐지?”
서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트를 꺼낸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와아!”
첫 페이지를 넘긴 서은이 눈이 동그래져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빠가 그린 그림이다.
한 페이지 가득 오리 가면을 쓴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배트맨처럼 하관만 드러낸 모습이 어디선가 보았던 만화 캐릭터 같다.
연필로 그려 흑백이었지만 가면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주위를 떠도는 알 수 없는 수학 공식들.
흥미가 생긴 서은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남자는 왠지 무서워 보였지만 동시에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은과 오빠가 모두 좋아하는 오리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오빠 오면 가면 놀이 하자고 해야겠다.”
서은은 원래 있던 자리에 노트를 얌전히 넣어두었다. 그리고 오빠가 주었던 오리 인형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갔다.
* * *
“Time’s up! Please put down your pencils.”
감독관의 선언과 함께 대회 첫째 날, 4시간 30분의 긴 여정이 끝났다.
연필을 놓는 소리가 시험장 곳곳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학생들의 얼굴에 후련한 기색은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무겁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회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다수의 얼굴에 충격과 당혹감이 역력했다. 어떤 학생은 여전히 머리를 감싸쥔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일부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게 뭐야.”
“기출 문제랑 완전히 다르잖아!”
“이게 진짜 맞는 건가? 너무 어려웠어.”
여기저기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루이첸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문제를 풀다 시간이 부족해 본 경험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1번 문제에서만 2시간을 소모했다.
초반에 잘못된 접근으로 시간을 버렸던 것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평소 같은 정수론 문제였다면 아무리 길어도 30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정수론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접근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인수분해, 모듈러 연산, 디오판틴 방정식(Diophantine equation * 정수로 된 해만을 구하는 부정 다항 방정식), 그동안 익숙했던 모든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릴 때쯤에야 대수적 수론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늦었지만.’
시간에 쫓겨서인지 특기인 기하 관련 문제에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겨우 답을 찾고 3번을 다 풀어가는 중에 시간 종료.
루이첸이 주위를 둘러본다.
3번은커녕 1, 2번 문제조차 풀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대다수.
‘중국을 견제하는 건가?’
어쩌면 작년에 중국이 너무 좋은 결과를 낸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오히려 변별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도로는 어림 없지.’
루이첸은 문제가 어떻게 나와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더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 온 루이첸이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신감이었다.
“루이첸, 어떻게 됐어?’
팀 동료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루이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1번만 겨우. 그것도 확신은 없어.”
“나도 3번 문제는 보지도 못했어.”
팀원들이 하나둘 모여 소감을 털어놓는다.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처참한 성적이었다.
‘이러면 결국 중국 견제는 성공하는 건가?’
중국 전역에서 고르고 고른 영재들이었지만 이들은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일터.
결국 자신이 최고점을 따내면 될 문제라고 루이첸은 생각했다.
“쟤들은 왜 웃냐?”
한 팀원이 한국 쪽 자리를 가리킨다.
“말도 안 되게 어려웠어.”
“그래도 서하가 말했던 원리가 나와서 그건 맞은 것 같아.”
“스터디 진짜 도움 많이 됐지?”
“난이도를 생각해 보면 저도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아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한국인들이 떠든다.
하지만 묘하게 상기된 목소리에서 루이첸은 불편한 기운을 느꼈다.
도경이 서하를 껴안고 등을 두드린다.
루이첸이 알고 있는 한국 팀의 레벨이라면 좋은 성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냥 시험을 망친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가자.”
어차피 조건은 모두 동일하다.
오늘은 출제 경향을 잘 못 읽은 탓에 시간 관리에 실패했지만 아직 하루가 더 남아있으니까.
* * *
“서하야!”
수정이 앞서 걸어가고 있는 서하를 부른다.
서하가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춰 수정과 보폭을 맞춘다.
수정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시험 잘 보신 것 같네요?”
그녀는 평소처럼 '넌 어땠어?'
라고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그만큼 서하는 격이 달랐다.
“네 덕분이지. 예전의 나였다면 1번에서 좌절했을 거야. 기억나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아! 그때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서하가 수정의 얼굴을 보고 키득거린다.
아름답지 못한 기억인지라 수정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그거 말고! 내가 시험 끝나고 증명 물어봤었잖아.”
“물론 기억하죠.”
“그때부터 내가 발전한 게 느껴져. 무슨 문제를 만나도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거든."
“저는 누나의 그런 모습이 좋아요.”
“머..뭐?”
수정이 화들짝 놀란다.
“누나는 과거의 수학자들과 닮았어요.
혼자서 끝까지 고민하고, 막다른 길에 부딪혀도 결코 포기하지 않죠. 그날 시험이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는 한 문제에 집중하던 모습이 저에겐 그렇게 보였어요.”
서하의 칭찬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던 수정이 말을 돌린다.
“아, 너 옛날 수학자들 되게 좋아한다.”
원래 관심이 있는 화제였는지 서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도 그 사람들을 보며 생각하거든요. 절대 포기하지 말자고.”
조제프 푸리에는 푸리에 해석으로 알려진 열전도 방정식을 증명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이 방정식은 그가 죽은 후에야 디리클레와 리만 등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야말로 엄청난 집념.
“너도 포기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
수정이 보기에 서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론이 없었고 풀지 못하는 문제도 없었다. 그런 그가 포기하고 싶다니, 대체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있죠.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예요.”
서하의 태도에서 수정은 그가 고민을 말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진 거지?’
가까이 서보니 벌써 키가 비슷하다.
작년 대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어리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과거의 수정은 그 누구도 자신보다 앞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곧 보이지 않게 돼버릴지도.’
자신은 모르지만 어쩌면 서하는 이미 까마득히 멀리 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나, 괜찮으세요?”
“응, 문제 없어.”
어쩌면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서하를 따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수정은 생각했다.
* * *
새벽부터 숙소 복도에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혹은 잠들지 못했거나) 학생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어제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맞는 둘째 날,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밤새 울었는지 서하는 그들 중 몇몇 학생들의 눈이 퉁퉁 불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 대회에 많은 것을 걸고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 같은 책상이었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모두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드디어 감독관이 문제를 들고 나타났다.
대회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
서하가 시험지를 개봉한다.
‘음?’
문제를 훑어보는데 마지막 문제가 이상했다.
한 눈에 답이 보이지 않는다.
‘오호!’
드디어 풀어볼 만한 문제가 나왔다.
더키가 자신이 풀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느껴졌다.
‘안돼.’
서하가 가볍게 더키를 억누른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6번부터 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유형의 문제였지만 서하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어디서 봤던 것 같은.
‘아! 1988년 6번 문제!’
딱 그 문제를 보았을 때 들었던 느낌이다.
서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곧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마르첼로, 이건 좀 심한 게 아닙니까?”
출제위원실에서 로베르토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학의 수학과 교수인 그는 지난 10년간 IMO 출제위원으로 활동해 온 베테랑이었다.
“문제에 손도 대지 못한 학생들이 절반도 넘습니다. 이건 시험이 아니라 학대에요.”
마르첼로가 창밖을 내다본다.
분명 그럴 리 없겠지만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조금 과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죠.”
로베르토는 수학자이지만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수학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런 로베르토에게 마르첼로의 방식은 지나치게 과격해 보였다.
“우리의 일은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증명의 아름다움을 깨우치도록 돕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좌절시키는 게 아니라요.”
마르첼로가 몸을 돌려 로베르토를 똑바로 바라본다.
“로베르토, 당신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마르첼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이 실려있어 위원회실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말하자면 보석 감별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돌멩이는 아무리 갈고 닦아 봐야 돌일뿐이죠. 보석인체하는 돌멩이는 세상을 속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수학계에 해롭습니다.”
로베르토가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든다.
평생을 교수로 보냈던 학자의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게 대체 무슨 폭언입니까? 교육자로서 그런 말이 용납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2000년대 이후의 IMO 금메달리스트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그..그건···.”
비수와 같은 질문이 로베르토의 폐부를 헤집는다.
이는 IMO에 있어 역린과도 같은 상처였다.
체계적인 교육이 오히려 진짜 천재들을 걸러내고 있다. 패턴 인식에 뛰어난 학생과 수학적 직관이 뛰어난 학생을 구분 할 수 있는가?
수년간 수학계에서 IMO에 제기하고 있는 의문들이다. 그리고 IMO에서는 이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의 올림피아드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빛나는 재능들을 찾아냈었죠. 그레고리 마굴리스, 엘리야 크로넨, 그리고리 페렐만, 블라디미르 드린펠드···.”
마르첼로의 눈이 먼 과거를 회상하듯 아득해진다.
“그들은 수년간 한 문제에 매달리면서도 결코 지치지 않았습니다. 물질이나 명예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았어요. 진리 그 자체에 목말라했던 순수한 영혼들이었습니다.”
마르첼로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IMO 금메달리스트들이 졸업 후 금융권이나 IT업계로 떠납니다.
저는 이 상황을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그 일을 해달라고 케임브리지에서 저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하지만 이건 지나쳤어요. 우리는 1988년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했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겁니다.”
“실수?”
“그렇습니다. 정답률 제로, 엘리야 크로넨만이 유일하게 1점을 받았었죠. 그 문제를 냈던 출제위원들은 후에 큰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왜 실수라는 겁니까?
당시 겨우 13세였던 엘리야 크로넨이 훌륭한 수학자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수학계의 50년 난제였던 리드 추측을 증명해 냈고 필즈상과 아벨상을 동시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엘리야를 발굴해 낸 것이 당시의 출제위원들이었죠.”
“한두 명의 천재를 위해 다수를 희생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마르첼로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로베르토를 바라본다.
“희생요?
당신은 학생들이 문제가 어려워 풀지 못하는 상황을 그렇게 부릅니까?
저는 올림피아드와 수학계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을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천재가 태어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안일한 문제만 고집한다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겠지요.”
“그럼 저 많은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마르첼로의 뜻은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 봐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6번 문제를 구경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적절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게 될 겁니다. 모든 사람이 페렐만이 될 필요는 없어요.
시험을 망쳐도 훌륭한 교사나 응용 학자는 될 수 있습니다. 노력 한다면 월스트리트, 실리콘밸리,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도 있겠죠.
다만 그런 학생들에게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라는 간판은 주고 싶지 않군요.”
로베르토가 침묵한다.
위원회실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마르첼로를 원망하는 눈빛은 더 이상 없었다.
* * *
서하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평소보다 조금 빨라진 호흡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입술이 살짝 말라오는 느낌.
이번 IMO 기간에 볼 수 없었던 서하의 모습이다.
평소라면 문제를 읽자마자 접근법이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었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첫 줄을 읽는 순간 서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소수 이론과 조화급수, 그리고 2차잉여(Quadratic residue).
수론의 여러 분야를 이렇게 정교하게 엮기는 쉽지 않다.
악랄함과 섬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출제자는 꼼꼼한 데다 성격이 몹시 나쁜 사람일 것 같았다.
실제로 마르첼로는 학생들을 위한 문제를 출제한다는 생각으로 이것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수학자들조차 머리를 쥐어 뜯을만한 연구 주제를 제안하고 싶었다. 1988년 6번 문제가 그랬던 것처럼.
‘n≥3.. 서로 다른 소수들···. 역수의 합이 (n-1)/n..’
서하의 뇌 속에서 수식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어느쪽으로 가도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는 것을 서하는 직관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소수의 분포, 무한 급수의 발산성, 완전 제곱수의 구조적 제약,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얽힌 복잡한 관계.
30분이 지났다.
서하의 연습지는 이미 지워진 계산들과 새로운 시도들로 뒤덮여 있었다.
땀이 흘러 내린다.
순간 서하의 연필이 멈춘다.
‘해가 없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어딘가에서 놓친 것이 있겠지.’
서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역수의 합, 조화급수, 발산, 하지만 여기서는 수렴하는 값, 곱이 완전제곱수가 되는···.’
‘잠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직감.
‘만약 해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혹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면?’
서하의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존재하지 않는 해,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라면 어떨까?
서하의 두뇌가 맹렬하게 사고한다.
막힌 길에서 돌아와 가능한 모든 샛길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n이 4일 때 만약 네 개의 소수가 아주 특별한 형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겨우 시작점일 뿐이었다.
‘성격 진짜 나쁘네.'
해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끈다. 그 방법으로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문제를 설계했다.
해답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의 증명.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외가 나타날 수 있다.
즉, 성격 파탄자일 것이 거의 확실한 이 문제의 출제자는 참가자들에게 '해가 없음의 예외'를 증명하라 요구하는 것이었다.
* * *
‘형편 없군.’
마르첼로가 회장에 내려와 문제를 푸는 학생들을 둘러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낮은 비명소리.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는 모습이다.
‘마치 레시피를 달달 외워 온 초보 요리사들 같군.’
준비해 온 요리는 그럭저럭 먹을만하게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셰프라고 부르던가?
최근 IMO에서 만점자가 많았던 것은 현대 수학이 쉬워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반대.
‘수학의 영역 간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
정수론, 위상수학, 기하학, 해석학, 이제는 한 분야만 깊이 파서는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수학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일찍부터 이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르첼로가 먹이를 찾는 매의 눈빛으로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수학은 당연히 창조적 사고의 예술이지.”
수학과 물리학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수학은 자연 현상의 해석에 묶인 물리학과는 다르게 논리적 모순이 없는 모든 명제를 허락한다.
그러니 상상력이야말로 수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필수적인 덕목인 것이다.
6번 문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
목표는 1988년에 그랬듯 7점 만점에 1점이다.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진전.’
이것이 마르첼로가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최댓값이었다.
마르첼로가 천천히 시험장을 걸어 다니며 학생들을 관찰한다. 대부분은 예상대로였다.
4번과 5번은 융합수학이라 겨우 부를 수 있을 수준의 문제.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이미 그로기 상태였다.
멈춰선 채 아직도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모르거나 용감하게 단순 대입을 반복한다.
‘쯧쯧. 저게 어디 수학인가.’
그나마 괜찮은 수준의 학생도 몇몇 보였다.
작년 1위와 3위를 했던 참가자들.
마르첼로의 눈이 빛난다.
기존 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이었던 저들이 자신이 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궁금했다.
마르첼로가 시계를 본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핏 보니 둘 다 입구에서 막혀있는 모습.
그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최연소 참가자로 기억하고 있던 한국인.
그가 맹렬한 기세로 답안을 채우고 있다.
마르첼로의 발걸음이 서하의 책상 근처에서 멈춘다.
혹시라도 학생에게 방해가 될까 조금 멀리 서서 답안 작성을 지켜본다.
답을 살펴보는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가 점차 놀라움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첼로는 경악했다.
‘이걸 끝까지 풀겠다고?’
6번은 증명을 끝내라고 출제한 문제가 아니다. 증명을 위한 필수적인 논리만 전개 해도 지나치게 방대한 양일 것이다.
최소한의 접근법만 제시한다고 해도 점수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학생은 다섯 장이 넘는 답안을 적고 있었다. 그것도 놀랍도록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마르첼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이 출제할 때 염두에 둔 핵심 아이디어들이 하나하나 소년의 손끝에서 구현되고 있다. 아니, 그것을 넘어 출제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치열한 논증의 흔적까지.
‘대단한 수학자가 등장하겠군.’
과연 신은 아직 수학을 버리지 않았다.
20년 동안 수학계에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과거, 이론이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기술이 앞질러버린 상태.
수학계는 현재 크게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만약 오일러나 가우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마르첼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서하가 마지막 줄을 적어 내려간다.
「Q.E.D.」
증명 완료를 뜻하는 라틴어 약자가 답안지 끝에 적힌다.
마르첼로는 잠시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30년, 그는 지금 평생동안 보아왔던 어떤 인간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목격하고 있었다.
서하가 답안을 다시 한번 훑어본다.
‘겨우 성공!’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남은 시간이 겨우 10분이라는 것을.
‘아···.’
6번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지나치게 세세하게 접근해 버렸다.
4번과 5번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태.
서하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망했다.’
시간을 확인하고 서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반드시 IMO에서 압도적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우현의 당부가 아니었다.
‘오빠, 내 금메달도 꼭 챙겨와야 해?’
집에서 자신의 메달을 기다리고 있을 동생.
서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참지 못하고 금메달을 맨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그려놨을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크게 실망할 텐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서하는 빠르게 4번과 5번 문제를 스캔했다.
문제를 푸는 데는 적어도 10분, 답안을 작성하는데도 10분은 걸린다. 두 문제가 남았으니 필요한 시간도 두 배. 풀이 과정도 점수에 포함되기에 시간을 더 줄일 수는 없다.
‘아! 어쩔 수 없나,’
서하가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더키.’
6번 문제를 풀지 못하게 해서인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키, 너도 서은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하는 더키가 자신만큼이나 서은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없어. 부탁할게. 같이 해보자.’
서하가 더키에게 자리를 허락했다.
순간 뇌 속에서 무언가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꽉 조여있던 나사가 조금씩 풀리듯 평소 억눌러왔던 서하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해방되었다.
서하가 4번 문제를 읽기 시작한다.
[정육면체 내부의 점 P에서···.]
문제를 읽는 것과 동시에 이해가 이루어진다.
기하 문제, 최적화, 대칭성, 위상수학.
더키의 강박적 정확성이 복잡한 좌표계를 순식간에 구축해 낸다. 서하의 직관이 핵심 아이디어를 포착하는 순간 더키가 그것을 완벽한 수식으로 변환한다.
서하의 손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표설정 P(a,b,c), 정육면체 꼭짓점들과의 거리···.’
읽으면서 이해하고 동시에 적는다.
눈에서 뇌, 그리고 손까지의 전달 시간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더키가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서하의 직관이 그중에서 핵심을 골라낸다. 두 능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시너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은 여전했다.
서하가 힐끗 시계를 본다.
‘모든 풀이 과정을 다 적을 수는 없어.’
10단계는 거쳐야 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줄였다.
4번 완료.
여기까지 5분.
즉시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n개의 구슬 중 r개를 선택하는데···.]
조합론과 확률의 융합 문제.
서하가 문제를 읽어 내려가는 동시에 더키가 모든 가능한 패턴을 머릿속에서 재배열한다.
포함-배제 원리(Inclusion-Exclusion Principle), 점화식, 생성함수.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서하의 연필이 필사가의 그것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조합의 본질은 선택과 배제.’
더키가 n개의 구슬을 머릿속에서 완벽한 격자 형태로 배열했다. 각각의 가능성이 수학적 확률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이건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어. 조건부 확률의 연쇄 반응을 살펴봐.’
더키가 즉시 반응한다.
복잡한 확률 분포가 머릿속에서 완벽한 트리구조로 펼쳐진다.
[첫 번째 선택: P₁ = r/n]
[두 번째 선택: P₂ = (r-1)/(n-1)]
[조건부 확률의 곱...]
그러면서도 서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사고와 동시에 답안이 완성되어 간다.
‘시간이 부족해. 핵심만!’
보통이라면 15줄에 걸쳐 써야 할 증명을 5줄로 압축한다. 하지만 논리적 비약은 없다. 서하의 기준에서는 모든 단계가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5번 완료.
“Time’s up!”
답을 적음과 동시에 시험이 끝났다.
마르첼로는 두 걸음 떨어져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이 마지막 순간에 보여줬던 그 집중력과 속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언가를 본 것 같아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서하에게 말을 건다.
“자네, 괜찮은가?”
멍한 표정의 소년.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답안지를 제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소년이 작게 중얼거린다.
“왜 책상을 이런 식으로 배치한 거지? 대칭이 맞질 않잖아. 저기 3열은 왜 21개씩이야. 공간이 필요하면 차라리 헥사곤 형태로 배치하거나···.”
실제로 서하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불완전한 책상의 배열이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눈에 거슬렸다.
마르첼로가 한 걸음 다가가 서하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동공이 확장되어 있는 데다 초점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마르첼로는 수십 년간 수학에 몰두하며 극도의 집중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 할 수 있었다.
이 소년이 지금 일종의 ‘하이(High)’상태에 있다는 것을.
뇌가 특정한 영역에서 극도로 활성화되면 정신이 초집중(Flow)과 과잉 각성(Hyper arousal)의 혼합상태로 들어서게 된다.
‘아니, 좀 다른가?’
신들린 듯 문제를 풀던 소년의 모습은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플로우 상태와는 달라 보였다.
그때 마르첼로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라마누잔?’
케임브리지 도서관에 라마누잔이 수학 연구를 할 때의 모습이 이것과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다(라마누잔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했다).
증명 과정 없이 바로 답을 도출해 내는 신비한 능력.
무의식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수학적 직관.
논리적 사고를 뛰어넘은 비현실적인 통찰력.
서하가 6번 문제를 풀 때의 모습이 그랬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역산으로 증명을 구성하는 것처럼.
“그만 해, 더키.”
서하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집중 상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숨을 몰아쉬는 것이 여전히 상태가 불안해 보인다.
마르첼로가 걱정이 되어 한 번 더 물었다.
“자네, 지금 기분이 어떤가?”
서하가 고개를 들더니 환한 표정을 짓는다.
“아주 좋아요. 최고로 멋진 문제를 풀 수 있었거든요.”
그제야 마르첼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보군.'
서하의 대답은 출제자인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 * *
시험이 끝난 후 3일간은 자유시간이었다.
결과 발표는 나흘 뒤 시상식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라 학생들은 그동안 런던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지훈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친다.
그동안 쌓였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겠네.”
도경의 목소리에 해방감이 가득하다.
IMO를 준비하며 한국 팀은 과거 어느 때보다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왔다. 마지막 IMO였기에 도경은 특히 감회가 남달랐다.
“넌 소감이 어때?”
수정이 서하에게 묻는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가족들과 떨어져 해외에 나와 있는 경험은 서하에게 외로움을 알게 해주었다.
그것 외에도 서하에게는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더키와 함께 문제를 풀었던 순간 느꼈던 고양감.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서하는 알고 싶었다.
‘서은이는 잘 있으려나.’
서은은 시차 때문에 밤까지 잠을 꾹 참았다가 서하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 너는 아직 가족이 그리울 나이지.”
수정이 옛 헴! 하더니 어른인 척 서하의 어깨를 두드린다.
“고생했다, 얘들아.”
박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결과를 떠나 올해 학생들은 정말 잘해주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제 며칠간은 아무 생각 말고 런던을 즐겨보자.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니?”
“진짜요?”
“놀아도 되는 건가요?”
“예쓰!”
박 교수의 말에 모두가 비명을 지른다.
“저는 대영박물관요!”
“나는 템스강 유람선.”
“버킹엄 궁전 먼저 가자!”
어른스럽다고는 해도 아직 고교생, 모두가 공부하는 틈틈이 가볼 곳을 정해놓았다.
모범생 기질은 어디 가지 않는지 여섯은 금방 한자리에 모여 여행 책자를 펴놓고 관광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도 한식 레스토랑은 가야지.”
“우리 다 이과생들인데 무슨 놈의 셰익스피어 생가야!”
“뉴턴의 사과나무? 케임브리지는 너무 멀잖아!”
“노팅힐에 나왔던 서점? 그거 우리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 아냐?”
열띤 토론 끝에 관광 코스가 정해졌다.
다음 날 아침, 한국 팀은 단체로 튜브(Tube * 런던 지하철)를 타고 대영박물관으로 향했다.
입장료가 무료라는 말에 유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흥미가 동한 것이다.
“와! 영국은 이런 게 좋네. 역시 선진국이다!”
입구에 걸린 무료 안내판을 보고 모두가 기뻐한다.
하지만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거대한 전시관 가득히 이집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의 유물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규모가 상상 이상이네.”
지예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 이집트 파라오의 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 이 거대하고 장엄한 유물들이 어떻게 런던에 있게 되었는지 책을 많이 읽은 서하는 쉽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이집트 사람이라면 울어버릴 것 같아.”
수정이 분한지 초대형 오벨리스크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다.
박 교수가 학생들의 표정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게 됐구나.
복잡한 문제지. 과거의 영광과 또 업보라고 할까? 영국 정부도 반환 소송으로 머리가 아플 거야. 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이런 걸 볼 수 있는것도 사실이고.”
주요 유물을 모두 돌아본 한국 팀이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어! 저게 뭐죠?”
서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열장 한쪽에 다양한 오리들이 진열되어 있다.
파라오, 유니언잭, 그리스 신화, 심지어 로마 병정 복장을 한 오리까지.
서하가 급히 달려가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본다.
“러버 덕(Rubber Duck * 욕조에 띄우는 오리)이네. 너 정말 오리 좋아하는구나?”
수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서하는 한참 동안 그것들을 구경하다가 결국 유니언잭 오리 하나를 골랐다.
* * *
다음날,
킹스톤 대학교 수학관 3층 회의실.
여섯 명의 출제위원들은 3일째 계속된 채점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첫날, 그들은 서하의 기적과도 같은 다섯 장짜리 증명을 보고 모두 광분했다.
IMO 역사상 가장 어렵다고 할만한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 천재가 등장했으니.
하지만 그 뒤에 본 답지가 문제였다.
마르첼로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지른다.
그의 앞에는 이미 검토가 끝난 답안지들이 점수별로 정리되어 있고, 커피잔에는 식은 커피가 말라 있었다.
“자, 오늘은 결론을 지읍시다.”
마르첼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꺼낸다.
서하가 작성한 4번과 5번 문제의 답안이었다.
“저는 여전히 3점이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로베르토가 답안지를 펼친다.
“여기서 바로 여기로 점프하는데 중간에 적어도 세 단계는 건너뛰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출제 위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 학생이 건너뛴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은 사실 생략이 아닐 수도 있어요.”
마르첼로가 일어나 화이트보드에 간단한 도식을 그린다.
“이 학생은 불필요한 계산 과정은 생략하고 오직 논리의 뼈대만 제시한 겁니다. 논리적으로 흠이 없어요. 다만 친절하지 않을 뿐.”
러시아 출제위원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하지만 이 학생의 논리 전개는 매우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답안을 해석하는데 하루가 넘게 걸리지 않았습니까? 이 답안과 점수는 대중에게 공개될 겁니다. 높은 점수를 준다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르첼로는 소신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건 이 답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IMO는 고등학생을 위한 대회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답안을 인정한다면 앞으로 채점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마르첼로가 위원들을 둘러본다.
“이 답안에서 논리적 모순이나 수학적 오류를 찾을 수 있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없습니다. 모든 단계가 정확하고 결론도 맞습니다.”
로베르토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단지 우리 눈에 익숙한 형태가 아닐 뿐이죠.”
마르첼로가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완벽한 수학적 논증입니다. 다른 언어로 쓰였다고 해서 우리가 점수를 깎을 권리는 없겠죠.”
하지만 대다수 위원들의 격렬한 반대로 서하의 답안이 만점을 받지는 못했다.
아무리 논리적 하자가 없다고 해도 완벽한 모범 답안이라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시험이 끝난 후,
킹스턴 대학교 기숙사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지난 며칠간 시험장을 지배했던 긴장감과 살벌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해방감과 축제 분위기가 건물 전체를 감쌌다.
복도 곳곳에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굳게 닫혀있던 방문들 역시 모두 열려있었다.
서하가 세면실에서 양치를 하고 나오자 복도는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각자의 방에서 조용히 공부하거나 휴식을 취했을 학생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어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앞으로 서로를 만날 기회가 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학생들에게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심어주었다.
“키디(Kiddie)! 여기로 와볼래?”
한스가 서하를 손짓해서 부른다.
조금 친해져서 인사를 주고받게 되자 모두가 서하를 ‘키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하의 귀에는 그 단어가 ‘초딩!’이라고 번역되어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열려있는 문에 가볍게 노크하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10여 명의 학생들이 와 있었다.
“메모리 첼린지하자. 지금 헬렌이 7연승 중이야.”
우현이 경고했던 대로였다.
모두가 자신의 뛰어난 두뇌를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다가가 살펴보니 테이블 위에 트럼프 카드 한 벌이 놓여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덴마크 출신 금발 머리 여학생.
연승 중이어서 그런지 자신감이 충만해 보인다.
그녀가 대뜸 서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키디! 너 혼자만 6번 문제 풀었다며? 우리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더라.”
“저 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풀기는 했죠. 어려웠어요.”
“너 혼자 맞아. 어디 그 대단하신 머리 한번 확인해 볼까?”
헬렌이 씨익 웃으며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린다.
이렇게 나오면 빼기도 힘들다.
서하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헬렌이 눈짓을 보내자 한스가 카드를 섞기 시작한다. 평소에 카드를 많이 가지고 놀았는지 화려한 셔플을 선보인다.
촤르륵.
한스가 테이블 위에 6 x 5, 30장의 카드를 늘어두었다.
“자! 30초 동안 볼 수 있어. 둘 다 준비 됐지?”
“당연하지.”
“저도 괜찮아요.”
둘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스타트!”
한스와 친구들이 카드를 일제히 뒤집었다.
‘스페이드 7, 하트 킹, 다이아몬드 3, 클로버 잭···.’
서하의 눈이 빠르게 카드들을 훑는다. 다른 학생들도 주위에 모여 서하가 어떻게 카드들을 기억하는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다.
서하와 헬렌이 동시에 카드들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하지만 둘은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헬렌은 서구권의 전형적인 기억법인 메모리 팰리스(Memory palace)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카드를 머릿속에 설정한 특정 위치와 연결하려 애쓰고 있다.
반면 서하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택했다.
서하의 머릿속에서 서른 장의 카드들이 6 x 5의 수학적 매트릭스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각 카드를 좌표(행, 열)와 함께 기억한다. 스페이드 7은 (1, 1), 하트 킹은 (1, 2)···. 이런 식으로 위치 정보와 카드 정보를 하나의 데이터 세트로 묶어서 저장하는 것이다.
무늬는 숫자로 치환한다. 스페이드 = 1, 하트 = 2, 다이아몬드 = 3, 클로버 = 4.
이렇게 하면 각 카드는 (x 좌표, y 좌표, 무늿값, 숫자 값)의 4차원 벡터가 된다.
그리고 숫자는 서하에게 가장 친숙한 언어였다.
“시간 끝!”
한스가 시간 종료를 외치며 모든 카드를 뒤집었다.
“헬렌부터!”
한스의 손가락이 첫 번째 행 첫 번째 카드를 가리킨다.
“스페이드 7.”
정답이었다.
“자, 이제 키디. 이건?”
세 번째 줄 두 번째 카드.
“클로버 3.”
서하가 망설임 없이 답한다.
한스가 카드를 뒤집어 정답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
네 번째 줄 세 번째 카드.
헬렌이 잠시 고민한다.
“음···. 다이아몬드 퀸?”
한스가 카드를 뒤집는다.
“맞았어.”
게임이 계속되었다. 둘 다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주었지만 20장을 넘어가면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헬렌?”
한스가 카드를 가리켰지만 헬렌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클로버···. 나인?”
한스가 카드를 뒤집자 주위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
“헬렌이 이걸 져?”
“긴장한 거 아냐? 암기 대회에서도 우승했었다는데.”
“틀렸어, 클로버 식스야.”
헬렌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키디 차례. 맞추면 네가 이겨.”
한스가 네 번째 행 다섯 번째 카드를 가리킨다.
하지만 서하의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카드의 데이터 세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가 뒤집어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정답.
“와우!”
“대단해!”
“새로운 메모리 킹이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웃는다.
“그럼 장난삼아 남은 것도 다 해볼래?”
한스의 제안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몬드 킹, 하트 4, 클로버 2···.”
서하가 이름을 말하며 카드를 하나씩 뒤집는다. 헬렌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보았다.
30장을 모두 맞추자 방이 학생들의 열광으로 가득 찼다.
““키디! 키디! 키디!””
학생들이 서하의 이름을 연호했다.
“왜 6번을 푼 사람이 너 혼자였는지 알겠네.”
헬렌이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서하가 부끄러워하며 헬렌의 손끝을 살짝 잡자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헬렌! 서하는 꼬마라고. 테스토스테론이 생성되려면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해.”
낄낄거리는 남자들을 향해 헬렌이 오른손 중지를 치켜들었다.
“뭐라는 거야, 나한테 발린 것들이.”
즐거운 오후였다.
* * *
“후아!”
서하가 방에 돌아와 침대로 뛰어든다.
메모리 챌린지 이후, 소문이 났는지 많은 학생들이 각자가 자신있는 게임을 들고 서하를 찾아왔다.
스도쿠, 암산 배틀, 24 게임(24 game * 4개의 숫자와 사칙연산을 이용하여 24를 만드는 퍼즐 게임), 심지어 원주율 소수점 자릿수를 어디까지 외울 수 있는지 대결해 보자는 학생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체스 토너먼트가 진행 중이다.
말만 토너먼트지 승자가 계속 두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Last man standing’,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이 승자다. 대신 도전은 자유.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평소답지 않은 수정의 힘없는 목소리.
서하가 급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정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서하를 바라본다.
“미안해.”
면목 없다는 얼굴로 수정이 고개를 푹 숙인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수정이 절망한다.
“내가 라면이랑 과자를 다 뺏겨버렸어.”
“네?”
얘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평소 체스에 자신이 있던 도경이 러시아 대표 알렉세이에게 도전했다. 결과는 석패.
도경이 한 번 더 도전하려고 하자 알렉세이가 조건을 건 것이다.
“재도전을 다 받아주면 끝도 없어. 정 하고 싶으면 뭘 걸던가.”
한국팀의 식재료를 보관하고 있던 도경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간식을 뺏기는 도경. 그걸 보다 못한 수정이 자신의 과자를 지키려 참전한 것이다. 결과는 대패.
본전 생각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도박꾼처럼 게임은 한국팀의 간식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생각해 보면 계획적이었던 것 같아. 거의 이길 것 같았거든.”
오늘과 내일은 남은 간식을 모두 꺼내놓고 밤에 파티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내일 뉴몰든(New Malden * 런던 인근에 있는 한인 타운)이라도 다녀오자. 돈은 내가 낼게. 부모님이 주신 게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미안한지 수정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낸다.
"요즘은 해외에서도 한국 음식 구하기 쉽다? 테스코나 세인즈버리에도 한국 라면 팔아! 너 그거 아니? 해외에서 파는 컵라면이 건더기가 실해서 국산보다 오히려 더 맛있다니까?"
서하가 눈을 질끈 감는다.
서하에게도 라면과 간식은 소중했다.
매일 아침 영국식 아침 식사로 배를 채우고 점심과 저녁은 감자와 고기.
자켓 포테이토, 칩스, 삶은 감자, 매시드 포테이토, 로스트 포테이토, 포테이토 케익, 포테이토 샐러드, 해시브라운, 하다못해 간식도 감자칩이 나온다.
서하는 감자요리가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을 영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
무서운 나라다. 탄수화물원은 오직 감자.
서하는 벌써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녁에 라면 먹으려고 했는데···.’
체스를 배워두라는 우현의 조언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가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서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수정도 고개를 갸웃거리다 서하를 따라 나선다.
로비에 내려가니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중앙에는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이 있고 한 자리에는 알렉세이가 앉아 있다.
서하가 나타나자 학생들이 하나둘씩 이를 알아챘다.
“키디!”
“키디가 왔다!”
“키디! 키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게임에서 학생들을 압살했던 덕분이다.
“아, 키디! 왔어? 체스도 잘 하려나?”
알렉세이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반대편에 앉아있는 미국 대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저 미국 애, 마스터래.”
수정이 서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짜요?”
“응. 켄터키주 챔피언이라는데? 자기가 마지막에 나가서 다 정리하겠다더니···.”
아는 사이였는지 수정이 혀를 찬다.
서하가 알렉세이 뒤에 있는 테이블로 눈을 돌린다. 수많은 간식들이 전리품처럼 쌓여있는 모습.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표인 브라이언은 소중히 아껴두었던 빅사이즈 육포를 알렉세이에게 헌납해야 했다.
“우리는 15세기부터 체스를 뒀어. 미국의 마스터 따위야.”
알렉세이의 도발에 미국인들이 발끈한다. 하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자, 키디! 한판 두자.”
알렉세이가 이를 드러내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서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는다.
알렉세이가 체스판 위의 말들을 정렬하며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초등학생이 프로를 이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 체스는 경험보다 재능이 우선이거든. 수싸움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거야.
키디, 네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6번을 풀었다고 들었어. 기대되는데?”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딱 한 명이랑만 둬봤으니까.”
“그 정도면 쉽게 끝나겠는데? 오늘은 그냥 배운다고 생각해. 나는 러시아 주니어 챔피언이었어.”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셔도 곤란하구요.”
알렉세이가 유쾌하게 웃는다.
“하하! 알았어. 룰은 어떻게 할까? Blitz or Rapid?”
블리츠는 한쪽이 5분, 즉 한게임이 10분을 넘기면 안되는 스피드 게임이다. 생각할 시간이 거의 없다 보니 실수가 많이 나온다.
래피드는 그것보다는 좀 더 여유가 있는 편.
“블리츠.”
“마음에 들어.”
말의 배열이 모두 끝났다.
한스가 어디선가 시합용 시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모두를 바라보며 선언한다.
“게임 시작!”
알렉세이가 자신있게 첫수를 뒀다.
e4, 킹스 폰 오프닝.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e5로 응수했다.
알렉세이의 말이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확실히 그는 경험이 풍부했다. 익숙한 패턴으로 게임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서하는 처음에 적응하려는 듯 수동적인 대응을 했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상황이 달라진다.
직관을 기반으로 한 속도전은 완전히 서하의 영역이었다.
10분 뒤,
알렉세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다.
체스판 위에 자신의 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말 그대로 완전한 전멸.
학생들의 함성으로 로비가 폭발했다.
“와아아!”
“키디가 이겼다!”
“러시아 챔피언을 이겼다고?”
“키디가 복수했어!”
“하..한 번 더! 재게임 하자! 블리츠라서 그래. 래피드였다면 달랐을 거라고!”
서하의 수가 너무 빨라서 속도를 맞추다 보니 실수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뻔한 수들. 다시 하면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알렉세이가 붉어진 얼굴로 재대결을 신청한다.
서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알렉세이를 바라본다.
“재도전을 다 받아주면 끝이 없지 않나요?”
로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렉세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신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것이 몹시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일류 체스 플레이어답게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이야. 당연히 나도 뭔가를 걸어야겠지.”
알렉세이가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들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상품을 소개하듯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을 뻗는다.
“이것들 전부는 어때?”
“에? 저걸 다요?
서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대신 조건이 있어.”
“듣고 있어요.”
“네가 지면 내 체스판에 서명을 해줘. ‘최선을 다했지만 알렉세이에게는 이길 수 없었음.’이 문구를 함께 적어서 말이야.”
순간 서하는 과거에 우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나중에 아주 훌륭한 수학자가 돼서 밀레니엄 문제를 풀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러시아 놈팡이가 티비에 나와 유서하의 체스 실력은 별거 아니었다고, 자신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고 인터뷰하는 거야.’
부르르.
소름이 돋았다.
우현의 말대로 만약 알렉세이에게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반드시 저 체스판을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왜 그런 걸 해달라는 거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본다.
“키디, 아니 서하 네가 머지않은 미래에 거물이 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여서지. 솔직히 여기 있는 누구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걸?”
알렉세이가 주위를 둘러본다.
서하에게 유독 살갑게 굴었던 몇몇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세이가 그들을 보며 피식 웃는다.
“어때? 그래도 하고 싶니?”
진지한 알렉세이의 얼굴을 보며 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전 지지 않을 거니까요.”
우현과의 연습 이후 서하는 꾸준히 체스를 연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 놓은 몇 가지 전략이 있었는데 어서 그것들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좋아.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속기에 아주 약한 편이야. 생각할 시간이 길어질수록 강해지지.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알렉세이는 어릴 때부터 스피드 체스와는 잘 맞지 않았다. 시간이 아주 조금만 더 있어도 쉽게 이기는 상대들에게 자주 지고는 했으니.
“그럼 래피드 말고 클래식은 어때요?”
래피드는 플레이어당 10분에서 60분, 클래식은 60분 이상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제안을 하는 서하의 모습에 알렉세이가 깜짝 놀랐다.
“뭐?”
만용을 부리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호되게 응징해 주겠다고 알렉세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서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 가장 강한 상태인 당신과 싸우고 싶거든요.”
알렉세이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빠졌다.
“나중에 후회해도 모른다?”
첫판에 알렉세이는 서하를 얕보고 최선의 수를 두지 않았다. 체스 경험이 적은 아이였으니 방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만전의 상태.
게다가 그는 클래식으로 둔다면 누구와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지더라도 그럴 일 없어요.”
알렉세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한 꼬마인 줄 알았더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그거 아니? 진심으로 체스판에 네 서명이 받고 싶어졌어.”
“그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할게요.”
알렉세이가 체스판을 새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클래식이면 정말 진검승부네. 둘 다 준비됐어?”
한스가 시계를 다시 설정하며 물었다.
서하와 알렉세이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시작!”
코인 토스 끝에 알렉세이가 백, 서하가 흑이다.
알렉세이가 첫수로 e4를 두었다.
킹스 폰 오프닝,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시작이다. 전 판과 같은 수였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서하는 잠시 생각한 끝에 c5로 응수했다. 시칠리안 디펜스.
“시칠리안이라···.”
알렉세이가 작게 중얼거린다.
균형보다는 복잡한 수싸움을 추구하는 오프닝. 서하가 평범한 게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알렉세이가 초반부터 시간을 쓰며 수를 읽는다.
그가 10분간 고민한 끝에 Nf3를 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진짜 실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켄터키 챔피언인 브라이언의 추정 레이팅은 2,100점. 특기가 아닌 속기에서 그를 이긴 알렉세이는 2,300점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그랜드 마스터에 불과 200점 모자란 점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알렉세이는 강했다.
경험과 패턴에 의존하던 전 판과 다르게 매 수마다 충분한 시간을 쓰며 대국 전체의 형국을 장악해 나간다.
게임이 15수를 넘어가자 서하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상황에 처해있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 정말 강하다.’
의도가 미리 간파당한다.
“Bd3.”
알렉세이가 비숍을 전개하며 서하의 킹사이드를 겨냥했다. 단순해 보이는 한 수였지만 그 뒤에는 복잡한 계산이 숨어있었다.
게임을 보고 있던 학생들이 급히 체스판을 가져와 알렉세이와 서하의 수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이 수가 치명적이지 않아?”
“아니, 봐봐. 이렇게 하면···.”
“알렉세이가 6:4, 아니 7:3으로 유리해.”
한편 서하는 강렬한 내적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하루 내내 더키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해소되지 못한 답답함이 출구를 찾아 격렬히 휘몰아쳤다. 체스 말이 하나씩 움직일 때마다 본능적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려 한다.
‘알았어, 더키. 자유롭게 해봐.’
서하가 강박 스위치를 풀었다. 그리고 체스판에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톡, 톡.
서하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머릿속에서 체스판이 3차원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서하의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다. 8 x 8 격자판이 아니라 64개의 좌표점이 복잡한 벡터 네트워크로 연결된 수학적 공간으로 변환되었다.
각 말의 위치는 좌표와 함께 이동 가능한 모든 경로가 실시간으로 계산되어 나타난다. 나이트는 L자 형태의 8개 벡터, 비숍은 대각선 방향의 무한 직선, 룩은 수직 수평의 십자가 형태로.
더키의 강박적 완벽성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수의 조합 21개, 각 수에 대한 알렉세이의 응수 18개, 두 수를 두었을경우 총 경우의 수 378개.
하지만 서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수, 4수, 5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에서 거대한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프로 체스 플레이어가 읽는 수는 8수에서 12수. 하지만 서하는 20수 이상을 동시에 계산하고 있었다.
각 선택마다 승률이 실시간으로 계산된다. 그리고 최적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하지만 이미 게임이 상당히 기울어 상대의 실수가 필요했다.
‘찾았다.’
단 한번, 중반에 윈드밀(Windmill * 나이트와 룩 조합으로 체크와 공격을 반복해 상대 말을 쓸어 담는 전술)이 나올 상황을 만들 수 있다.
확률은 50:50,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걸어볼 만했다.
알렉세이가 퀸사이드를 공격하는 동안 역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서하가 말을 옮긴다.
“어?”
복기를 하던 학생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충수?”
“완전히 끝난 것 같은데?”
“저건 답이 없다.”
갤러리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명백히 악수로 보이는 무브.
알렉세이도 깜짝 놀라 서하를 바라본다. 하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고 게임을 끝내기 위해 말을 전진시켰다.
그러나 서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알렉세이의 공격은 예상보다 쉽게 막혔다. 큰 이득을 보리라 생각했던 국면에서도 이상하게 말려 최소한의 성과에 그친다.
그럼에도 알렉세이는 승리를 확신했다. 서하의 퀸사이드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자신의 말들은 완벽한 포지션을 잡고 있었기에.
알렉세이가 퀸을 전진시킨다. Qh5+.
그때였다.
서하의 나이트가 갑자기 d4로 뛰쳐나왔다.
“어?”
공격을 위해 퀸을 빼낸 순간 알렉세이의 킹 주변 수비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쉬운 승리라고 생각해 깊이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알렉세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맹렬히 수를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저 궁여지책이라 생각했던 서하의 수들은 모두 윈드밀을 가리기 위한 카모플라쥬였다.
단 한 번의 방심이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나이트가 퀸을 노리지만 움직일 수 없다. 3중 4중으로 쳐진 비숍과 룩의 그물이 계속해서 킹을 노린다. 그러는 와중에 나이트가 춤을 추듯 체스판을 휘저었다.
“체크.”
“체크.”
룩, 비숍, 퀸까지.
서하가 차례로 알렉세이의 주력들을 제거해 나간다.
“대체 몇 수 앞을 읽은 거야? 15수?”
한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훨씬 더 많이.”
브라이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렉세이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윈드밀 같은 장난을 쉽게 당해줄 것 같아? 최소 20수 이상 봤을 거야. 그것도 심리전을 걸면서.
키디가 약점을 보이니까 마음이 급해졌겠지. 나라도 퀸을 움직이고 싶었을 거야.”
마침내 서하의 나이트가 마지막 체크를 걸었다.
“체크메이트.”
조용한 울려 퍼지는 서하의 선언.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모든 퇴로가 서하의 말들에 의해 장악 당했다.
알렉세이가 고개를 들어 서하를 보더니 희미하게 웃는다.
"I resign."
어느새 로비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모두가 체스판을 둘러싸고 나름의 분석과 평가를 내리던 중이었다.
알렉세이의 패배 선언에 그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키디가 이겼어!”
“진짜 미친 윈드밀이었어.”
구석에서 보고 있던 도경도 어느새 뛰어나와 방방 뛰며 기뻐한다.
학생들의 환호 속에서 서하의 의식이 점차 현실로 돌아왔다. 서하가 손을 조금 움직여 삐뚤어진 체스판을 책상과 평행하도록 맞춘다.
“정말 대단한데? 깜빡 속았어.”
알렉세이가 악수를 청한다.
“재미있었어요.”
서하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체스의 세계는 서하의 생각보다 더 깊고 오묘했다. 분명 계산한 것이 아닐 텐데 알렉세이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장소를 피했다. 덕분에 계산이 틀어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잠시 펜 좀 빌려주시겠어요?”
서하의 말에 알렉세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서하가 마커를 받더니 체스판을 뒤집어 글을 썼다.
[알렉세이, 내가 만난 최고의 체스 플레이어]
알렉세이가 그것을 읽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너 딱 한 명이랑만 둬봤다며!”
“그래도 당신이 최고인 건 맞으니까요.”
서하의 말에 알렉세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유명해져도 그 말 꼭 해주길 바란다."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간식은 모두 본래의 주인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감사의 표시로 받은 선물이 많았기에 한국 팀은 사치스러운 마지막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 * *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
모두가 표정이 풀어진 채로 헤벌쭉 웃고 있다.
“그렇게 좋아요?”
수정이 째려보았지만 도경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목에 걸린 동메달을 소중하게 쓰다듬는다.
“종합 2위라고, 2위! 작년에 비해 얼마나 잘했냐! 특히 지훈이!”
한국은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로 종합 2위를 달성했다. 은메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성지훈이었다.
"한국이랑 영국에서 서하랑 내내 붙어 다녔잖아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IMO 기간을 통해 부쩍 성숙해진 지훈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아! 시상식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
“난 완전히 망한 줄 알았는데.”
“나도.”
고3 트리오는 모두 동메달을 따냈다. 유종의 미를 거둔 3학년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그래도 역시 서하가 대박이었죠.”
수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렇게 점수를 후하게 주실 줄은 몰랐어요.”
급하게 답안을 작성했던 4번과 5번에서 단 1점씩만 감점.
총점 40점으로 서하는 이번 IMO 개인 1위에 올랐다.
인터넷에서 살펴본 한국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수년만의 올림피아드 1위 배출, 그것도 12세로 최연소다.
수정이 그때를 회상한다.
IMO 위원장이 단상에 올라 메달리스트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Gold Medal Winners,
Seoha Yu, Chen Lui, Sojung Lim, Hans Müller, Alexei Volkov···. And Seoha Yu achieved the highest score!”
“난 이번에도 3위라고요.”
하지만 수정은 본인이 사실상 2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서하는 이미 등급 외로 열외시킨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래도 중국 애들 매너 좋더라."
창석의 말에 3학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첸? 먼저 축하한다고 말해줄지는 몰랐지. 작년 노메달이라 우리가 불쌍해 보였나?"
“그쪽 단장이랑 코치들은 표정이 안 좋던데?"
버스가 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에 오른다.
열두 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인지 언론사에서 제법 많이 나와 있었다.
한 기자가 급하게 학생들에게 다가와 마이크를 내민다.
“먼저 좋은 성적을 거두신걸 축하드립니다.
지금 중국 측에서 개인 1위를 차지한 유서하 군의 답안 심사에 이의를 제기했다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
금의환향에 들떠있던 모두가 카메라 앞에서 멍청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감사합니다.”
서하가 옥천까지 태워준 박 교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공항에서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대표 팀은 무사히 해단식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수고 많았다. 다시 한번 1위 축하하고. 중국 쪽 얘기는 신경 쓸 필요 없는 거 알지?”
알아보니 공식적인 이의 제기가 아닌 중국 측 코치진의 개인적인 인터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서하 학생의 4, 5번 문제 채점은 너무 관대했습니다. 그런 답안으로 6점을 받았다는 걸 저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례를 생각해 보면 그 정도 답안은 3점이 보통이었어요. 그랬다면 1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 중국에서 나왔겠죠.
출제 위원들 조차 서하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답안을 깊이 분석하지 않은 그들이 불만을 가진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 저는 상관 없어요.”
서하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박 교수는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기이했다. 서하는 아이답지 않게 어른들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래, 어서 집에 들어가고.”
부아앙ㅡ.
박 교수의 세단이 멀어져간다.
“아! 역시 집이 좋다.”
쓰으읍.
서하가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벼가 익어가는 냄새, 멀리서 풍겨오는 흙 내음. 익숙한 옥천의 공기다.
드르륵.
가방을 끌고 집으로 향하는 서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서하는 평생을 살았던 집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불과 며칠 만에 오는 집이었지만 마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서하가 가방에서 금메달이 든 케이스를 꺼내 내용물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대문을 연다.
“엄마, 아빠! 다녀왔어요.”
화단에서 흙을 가지고 놀던 서은이 오빠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오빠!”
서은이 마당에서 뛰어나온다. 며칠 사이에 또 조금 자란 것 같은 동생이 서하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온다.
서하가 가방을 내려 놓고 앉아 서은을 받아 안았다.
익숙한 체온과 냄새.
이제야 집에 온 실감이 났다.
“잘 있었어?”
서은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엄마 말도 잘 듣고, 유치원 애들하고도 안 싸우고 친하게 지냈어!”
서은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무엇인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본다.
“여기 서은이 금메달.”
서하가 케이스를 열어 메달을 보여주자 서은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게 핀다. 목에 걸어주자 세상 기쁜 듯 마당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거울을 보고는 또 좋은 지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며 배시시 웃는다.
“쟤는 저게 뭔지는 알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미영이 웃으며 부엌에서 나온다. 앞치마를 두른 채 손을 닦고 있는 모습이 아들이 돌아온다고 음식을 만들고 있던 모양이었다.
“엄마!”
“우리 아들 고생 많았다. 많이 힘들었지?”
미영이 서하를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서하가 1위를 했다는 소식이 뉴스에 나오자 온 마을에 난리가 났다. 지난 이틀간 미영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잘난 아들을 둔 그녀를 부러워했다.
서은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서 가족들 앞에서 빙글빙글 돈다.
“오빠! 나 때문에 열심히 해서 1등 한 거지?”
서하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정말로 그랬던 것 같아.”
서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한다.
“뭔 농담도···. 얘 진짠 줄 안다. 금방 밥 차려줄게. 김치찌개 끓였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 * *
“다음 소식입니다.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종합 2위를 달성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인 유서하 군이 역대 최연소인 12세로 개인 1위를 차지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화면에 IMO 시상식 장면이 나온다. 서하가 단상에 올라 금메달을 받는 모습.
“이번 올림피아드는 1988년에 이어 역대 최고 난도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전문가를 스튜디오에 모셔봤습니다. 남태진 교수님? 시험문제를 확인해 보셨습니까?”
화면이 전환된다.
안경을 쓴 중년의 수학 교수가 자료를 들고 앉아있다.
“네, 확인해 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충격적이었습니다. 특히 6번 문제의 경우 대학원 박사과정에서나 다를 법한 고난도 문제였거든요. 필요한 지식이 많다기 보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사고의 과정이 지극히 복잡합니다.”
“그 정도로 어려웠나요?”
“실제로 이번 대회에서 6번 문제를 푼 학생은 유사하 군이 유일합니다. 전 세계에서 600명이 넘는 수재들이 참가했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유서하 군의 실력은 어느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하하!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는 직관적인 답을 원하시겠지만 수학이 그렇게 게임처럼 등급을 딱 매길 수 있는 학문은 아닙니다. 다만 이례적으로 뛰어난 학생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엘리야 크로넨 이후 이 나이에 이런 수학적 성취를 이룬 학생은 없었으니까요.”
뉴스가 끝나자 인터넷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갤주가 탄생했다.
└뭐야? 저거 대단한 거야?
└수학을 알아야 뭘 빨아주지.
└수론 박사과정이다. 6번 문제 PDF 구해서 봤는데 진짜 경악스럽더라. 이거 연구논문 주제로 써도 될 정도임. 이 아이 진짜 천재 맞는 듯.
└혹시 문제 나도 볼 수 있어?
└보면 뭘 아냐?ㅋㅋㅋ
└안녕하세요, 옥천 군민입니다. 오늘 보니까 우리 동네 아이가 나왔더라고요. 평소에도 싹싹하고 잘 웃는 아인데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소문 났었어요.
└애가 깔끔하게 생겼네. 잘 키우면 혹시?
└근데 중국에서 얘기가 좀 나오는 것 같던데? 1위를 도둑맞았다고 난리더라.
└걔들은 원래 뭐든지 다 자기네 거잖아.
└장난 아니고 유명한 수학자들 SNS 찾아다니면서 문제랑 답지 올리고 있다. 이게 맞냐고.
* * *
프린스턴 대학 연구동 13층 끝자락에 위치한 크로넨 교수의 연구실은 온갖 괴담을 생산해 내는 장소였다.
학부생들 사이에서는 이를 ‘13층의 저주’라고 불렀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크로넨 교수의 문하에 들어간 대학원생 중 절반 이상이 중도 포기했고, 그중 몇몇은 심각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매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면 선배들은 후배들을 모아놓고 크로넨 교수에 대해 은밀하게 경고했다.
“엘리야 크로넨 교수가 너희한테 관심을 가지면 바로 도망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러나 정작 교수 본인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전혀 달랐다.
세계 수학계에서 엘리야 크로넨이라는 이름은 경외와 찬탄이다.
그는 지난 50년간 미해결로 남아있던 조합론의 난제를 단독으로 돌파하며 학계의 지형을 바꿨다.
그가 개발한 새로운 방법론은 그래프 이론, 확률 조합론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현재 수학 전반의 필수적인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대학원생들이 괴담의 존재를 알면서도 이곳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가 있다.
크로넨이 지도한 제자들 가운데 학위를 끝내지 못한 자가 절반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세계 유수 대학의 정교수가 되거나, 필즈상, 괴델상, 아벨상 같은 권위 있는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현대 수학의 최전선, 그래서 13층은 공포의 상징이지만 수학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을 들여보고 싶어 하는 수학계의 성지이기도 했다.
타닥타닥.
“음?”
연구실에서 이메일을 열어보려던 크로넨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교수님, 트위터 보셨어요?”
조교 하나가 노트북을 들고 허둥지둥 뛰어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평소에는 수학자들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계정이었는데 지금은 수천 개의 멘션이 달려있었다.
“중국인들일 겁니다. IMO에서 1위를 한 한국 학생이 있는데 점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조교가 난감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펴서 그에게 보여준다. 교수의 계정은 온통 분노 어린 중국어 댓글로 뒤덮여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저들은 내가 IMO 출제 위원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다른 수학자들한테도 몰려간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교수님께서 가장 인지도가 높다 보니...”
크로넨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그래? 다른 일도 아니고 수학 문제라는데 그럼 내가 해결해 줘야지. 문제랑 답안을 가져다주게.”
“네! 알겠습니다.”
조교가 나가자 크로넨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본인의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평소에는 블로그에 글을 써도 보는 사람이 1,000명 미만이었다. 그것도 모두 다 수학계 인물들.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대중은 수학자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오늘 방문자 15,244명]
블로그가 떡상했다.
조교가 인쇄된 문제와 답안을 가져온다.
크로넨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문제를 살펴보던 그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출제자가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아! 이 늙은이로구만.”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 영감이라면 충분히 이런 문제를 내고도 남는다.
정수론과 대수를 교묘하게 엮어놓은 6번은 그가 석사과정 때 씨름했던 연구 주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이걸 12살이 풀었다고?”
크로넨이 서하의 답안을 읽는다.
“오호..”
첫 페이지부터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소수 이론과 조화급수, 그리고 2차잉여를 논리적 비약 없이 엮었다.
“음?”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자 엘리야의 눈이 커졌다.
“이걸 바로 찾아?”
서하는 마치 답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정확히 핵심을 향해 나아갔다. 대부분의 사람이 더미 계산에 매달릴 때 이 아이는 문제의 본질을 단번에 간파했다. 그리고 가장 명쾌한 길로 달려 해답에 도달한다.
“이건 마치...”
나 같은데?
크로넨은 이 소년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겉으로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여러 조건들 사이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단숨에 찾아낸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증명을 완료했다.
IMO를 제패했던 13세의 엘리야 크로넨.
그리고 그 후 30년 이상의 세월을 수학에 바친 거장은 소년이 발휘하는 강력한 수학적 직관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타고났네.’
누군가는 수학자가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말하지만 그것은 현실 모르는 소리.
모든 수학자가 벽에 부딪힌다. 그곳을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재능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넨은 타고나지 않은 수학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13층의 괴담은 모두 그런 이유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문제가 되었다는 4번과 5번 답안을 읽어본다.
그리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이 건방진 꼬마는 기존 교육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수학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답을 적어놓았다.
개인용 연구 논문에서나 볼 법한 고도로 압축된 표현들.
마치 뛰어난 건축가가 마감 없이 골조만을 올려놓은 것 같다.
타닥타닥.
크로넨이 블로그에 글을 쓴다.
[이 소년에게 1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수학자라면 다른 직업을 찾아보길 바란다. 당신이 수학과 관계 없는 일반인이라도 유서하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IMO가 6점을 줘서 문제라고?
나라면 만점을 주었을 것이다.
-엘리야 크로넨.
수학계 거장의 거침없는 언사에 관련 커뮤니티가 폭발했다.
[엘리야 크로넨 글 떴다!]
[이게 뭔 일이라고 수학계 끝판왕까지 등판한 거냐?]
[그게 누군데?]
└현 수학계 넘버 원.
└과거 인물을 소환해도 네임드들이랑 맞짱 가능.
└중국 애들 데꿀멍이네. 테러하는 족족 차단당하고 있음.
└거장이라면서 왜 이렇게 쪼잔한건데ㅋㅋㅋ
└유서하 6점은 과하다는 수학자들도 꽤 있었는데 전부 글 삭제하는 중ㅋㅋㅋㅋㅋㅋ
└수학과 다니는데 저 꼬마는 대체 어떤 세상에서 사는 거냐. 너희는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엘리야 크로넨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우리한테는 거의 신이라고.
└유서하는 어느 대학 갈까?
└이쯤 되면 세계 모든 대학 프리패스 아닐까?
└하루만 저 뇌로 살아보고 싶다. 세상이 어떻게 보이나 궁금함ㅋㅋㅋ
이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수학 유튜버들이었다.
“실화냐? 수학 영상이 조회수가 나온다고?”
평균 조회수 네 자리를 기록하던 그들은 이때다 싶어 일제히 노를 저었다.
[엘리야 크로넨은 누구인가?]
조회수 : 32만.
[엘리야 크로넨이 유서하를 극찬한 이유는?]
조회수 : 80만.
[IMO 6번 문제 집중 분석.]
조회수 : 15만
[왜 중국은 유서하의 점수에 이의를 제기했을까.]
[올림피아드 2위, 한국은 과연 수학 강국이 된 것일까??]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자 수많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영상마다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었으니 엘리야 크로넨과 유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에드워드 한 교수가 서하를 대신해 발표한 논문이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었다.
‘비비아니 정리의 곡률 보정’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논문은 제1 저자인 유서하 군이 한 경시대회에서 풀었던 문제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되었다.
본 연구는 유서하가 독립적으로 수행한 기하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하며 본인(에드워드 한)은 그의 아이디어를 논문에 맞는 수학적 언어로 정리하고 증명을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밝힌다.
갈릴레오의 제자이자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학자인 비비아니의 정리를 보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에서 먼저 보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사는 한국으로 역수입되었다.
└이거 무슨 소린지 아는 사람?
└요즘 이런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수학 덕후들 등판해라.
└12살짜리가 스탠퍼드 교수랑 공저로 논문 냈대.
└공저 아니야. 제1 저자가 그 애임. 서문에 있잖아.
└구라 아님? 그 뭐냐 입학 스펙 쌓기?
└스탠퍼드 교수가 아무 관계도 없는 애를 위해 테뉴어를 걸고 논문을 조작 한다고?
└수학 교사임. 300년 동안 평면에서만 성립한다고 알려진 정리를 곡면에서도 적용되도록 확장한 거야. 리만 기하학에도 있는 개념이라 엄청나게 대단한 업적까진 아닌데 그래도 그 나이에 믿기지 않네.
└얘 그 엘리야 크로넨 맞지?
└맞음. IMO 1위. 그전에도 전국에 있는 고교 경시대회는 다 쓸고 다녔어.
논란은 지나갔지만 유명세는 남았다.
서하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12살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입시 면접을 보는 중이다.
“유서하 학생, 들어오세요.”
한국 과학 영재학교, 전국에 있는 모든 수재들이 입학하기를 열망하는 곳.
면바지와 셔츠를 곱게 차려입은 서하가 조심스럽게 면접실에 들어가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유서하입니다.”
면접을 시작하기도 전이었지만 면접관들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교장 이하 교직원들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IMO 1위, 그것도 역대 최연소!
벌써 수학계 거장에게 눈도장 까지 받은 초특급 유망주!
그런 학생이 자신의 학교에 지원하다니, 교장은 이미 광대가 승천할 지경이었다.
혹시 그가 나중에 노벨상이나 필즈상이라도 받게 된다면 이 학교는 대대손손 명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서 앉으세요. 아, 의자가 너무 높나요?”
물리 교사가 서둘러 일어나 직접 의자에 쿠션을 가져다 놓으려 한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하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걸 왜 선생님이 하십니까? 당연히 우리 수학과에서 챙겨야지.”
수학 교사인 박영호가 역정을 내며 쿠션을 빼앗는다.
입학하면 머지않아 학교 제일의 아웃풋이 되어줄 인재. 면접관들은 이미 심사라는 본연의 임무를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면접은 진행해야 하는 법.
면접관들은 서하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장래 희망이 무엇입니까?”
“수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서하의 답변에 수학과 선생들이 작게 주먹을 움켜쥐며 승리 포즈를 취했다.
“혹시 다른 학교에도 지원 했나요?”
“아는 선생님께서 혹시 모르니 부산이랑 인천에 있는 영재고에도 서류를 넣어보라고 하셨어요.”
서하의 대답에 면접관들이 당황했다.
“흐흠! 무슨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라고···.”
면접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럼, 우리 학교에 지원한 이유가 뭔가요?”
“어..음···. 제일 가까워서요?”
서하의 솔직한 답변에 면접관들의 뇌가 잠시 멈추었다. 그러더니 화학 교사인 정미경이 급히 말을 쏟아냈다.
“유서하 군! 우리 학교 급식은 전국 최고 수준입니다. 또한 전교생 모두에게 개인 독서실을 제공하고 있죠.
교복은 또 얼마나 예쁜지 주변 학교 학생들이 다들 부러워 한다니까요? 교사들도 모두 최하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하보다 면접관들이 오히려 더 긴장한듯했다.
이후 면접인지 입학 설명회인지 모를 자리를 마치고 서하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 벌써 왔니? 면접은 잘 봤어?”
“네, 아빠가 태워다 주셨어요.”
뭘 하고 놀았는지 미영이 진흙으로 엉망이 된 서은을 씻기고 있다.
서하는 엄마에게 가서 어깨를 주물러주고 서은의 찐빵 같은 볼을 잡아당긴 뒤에 방으로 향했다.
“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온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하다. 하지만 그는 점차 깊은 우울에 빠져들고 있었다.
드르륵.
서하가 맨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백 권이 넘게 차곡차곡 쌓여있는 실패의 기록.
서하는 그곳에서 가장 최근의 노트를 꺼냈다.
“154번째 시도.”
오늘은 최근 공부 중인 모듈러 이론을 적용해 볼 차례였다.
서하가 책상에 앉아 연필을 들었다.
‘각 정점을 v₁, v₂, v₃,.. 로 정의하고 인접 행렬 A의 고윳값을 이용하면.’
몇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서하에게는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서은이 마루를 뛰어다니는 소리도, 미영이 저녁 준비하는 소리도, 철호가 퇴근해 신발을 털어내는 소리도, 서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서하의 의식은 오직 수학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각 면을 둘러싼 모서리 수를 d(f)라 하면 오일러 공식에 의해 평균적으로 제약이 생긴다.'
손목이 아파 왔지만 서하는 고통마저 잊었다.
하지만 밤이 되도록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모듈러 이론으로는 평면 그래프의 위상적 제약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없었다.
색칠 문제의 본질은 조합론적이면서 동시에 위상수학적인데, 순수한 수론적 접근은 오만한 것이었을까?
연필심이 부러진다.
서하는 그만 쥐고 있던 연필을 벽에 던져버렸다.
더키가 그러지 말라고, 진정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왜, 너라면 풀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기꺼이 내 몸을 내줄게. 해봐!”
더키는 대답이 없다.
“그럴 줄 알았어. 넌 나의 계산 스위치일 뿐이야. 다시는 나한테 간섭하지 마.”
서하가 벽에 튕겨 나온 연필을 주워 들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연필 끝의 오리를 바라본다.
“미안해, 진심은 아니었어.”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해답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서하야, 밥 먹어.”
미영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네, 엄마. 지금 가요.”
서하가 노트를 접어 서랍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154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도 서하의 머릿속은 여전히 수학으로 가득했다.
“오빠, 무슨 생각해?”
서은이 수저를 멈추고 서하를 빤히 바라본다.
“응? 아, 미안.”
“오빠, 오늘은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서은이 단단히 삐졌는지 입을 삐쭉 내민다.
“미안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서하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자 서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철호가 이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요즘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거든. 서은이도 나중에 크면 알게 될 거야.”
“그럼 나는 안 할래! 오빠랑 놀아줘야 하니까!”
서은에 말에 온 가족이 웃었다.
저녁을 먹은 뒤, 서하는 잠시 산책을 하며 머리를 식혔다.
동생의 방에 가보니 이미 잠들어있다.
책상 위에는 자신이 준 유니언잭 오리와 금메달이 자랑스럽게 놓여있었다. 서하는 지나치게 조급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사실 서하도 알고 있었다. 요즘 가족들이 전과 다르게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진짜 형편없네.”
방에 들어와 익숙한 책장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꺼냈다.
[블레즈 파스칼]
곱상하게 생긴 파마머리 남자가 서하를 바라본다.
“파스칼, 나는 당신처럼 뛰어난 사람이 아닌가 봐요.”
파스칼은 12세에 독학으로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증명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의 공리를 이용한 것이지만 아무도 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파스칼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다 이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과 16세에 기하학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 평가받는 파스칼의 정리를 증명해 낸다.
그러니 수학사의 천재들과 같은 역사의 페이지에 담기기를 소망하는 서하에게 12살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것이 쓸데없는 고집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젊은 날에 성과를 내지 못했던 위대한 수학자들도 분명히 존재하기에.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가족들이 슬퍼하니까.
“이제는 더 이상 열두 살에 집착하지 않을래요. 결국 내가 더 대단한걸 해내면 되는 거잖아요. 솔직히 유클리드 증명을 이용하면 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요?
두고 보세요. 마지막엔 제가 당신보다 앞 페이지에 있을 테니까.”
이제 곧 중학생이 될 나이.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사춘기 호르몬의 지배를 피할 수는 없었다.
* * *
따뜻한 봄 햇살이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교문 앞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학생들과 꽃다발을 든 가족들로 북적인다.
“도오담, 우리의 소중한 도오담. 옥천의 맑은 하늘 아래···”
강당에는 교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노래가 끝나자 사회자가 식을 진행한다.
“졸업생 대표, 유서하.”
강당 안이 소란스러워진다.
“중학교도 건너 뛰고 영재고 갔다는 걔지?”
“여보여보! 우리 애도 저기 보내야 한다니까.”
“어쩜, 부모는 참 좋겠다.”
서하가 원고를 들고 단상 위로 오른다.
강당을 가득 채운 시선들이 서하를 향한다.
서하가 작게 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준비한 송사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우리 모두가 졸업을 맞이하게 되어···”
글짓기 교본에 나온 말을 적당히 짜깁기한 송사였지만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흑.”
“엉엉.”
“···선생님들의 꾸중과 칭찬 모두 저희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정든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하도 마음이 울컥해졌다. 그래서 준비 없는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저는 조금 일찍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아는 서하니까요. 모두들 다시 또 만나자!”
뜻밖의 멘트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서하는 귀가 빨개진 채 서둘러 단상에서 내려왔다.
여기저기서 셔터가 터진다.
꽃다발을 든 아이들, 양복을 입은 부모들, 모두가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서하는 이 학교의 가장 큰 스타였다.
“같이 사진 찍자!”
“너랑 친구라고 자랑해도 되지?”
여자애들 몇몇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울었는지 눈가가 벌서 빨갛다.
“우리 아들, 인기 많네.”
철호가 아내를 보며 감탄한 듯 속삭인다.
“당신 같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러는 사이 미영도 아는 얼굴이 다가왔다.
“야! 유서하!”
“응?”
서하네 집에 문제집을 들고 찾아왔던 민수였다.
“너 먼저 가 있어. 나도 꼭 갈 거니까. 알았지?”
일생의 라이벌을 대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서하를 보며 외친다.
“어! 착한 오빠다!”
아는 사람이 다가오자 엄마 뒤에 있던 서은이 쑥 얼굴을 내밀었다.
“히익!”
깜짝 놀란 민수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비명을 내지른다.
“하나, 둘, 셋!”
서하도 꽃다발을 들고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유서하, 13세.
봄부터는 드디어 고등학생이 된다.
대전의 어느 아파트,
영재고 수학 교사인 박성대가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참고서를 바라보다 이마를 짚는다.
밤은 이미 깊었고 창밖은 깜깜하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도 그랬다.
며칠 전 교무부에서 신입생 명단을 받았을 때 한 학생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유서하, 13세.
국제 수학올림피아드 개인 1위,
역대 IMO 사상 가장 어렵다는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 초등학생.
요즘 과하게 남용되고 있는 천재라는 단어로는 그 아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뭘 가르쳐야 하지?”
서울대 수학과 석사,
성대는 그동안 수많은 영재들을 가르쳐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수학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이 없다.
교사들 사이에서도 자존심 싸움은 있다.
그리고 과학고와 영재고를 거쳤다는 이력은 그의 자부심을 증명해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남들은 왜 그 좋은 대학을 나와서 굳이 교사를 하느냐고 묻지만 수학 선생은 학생의 성장을 직접 이끈다는 매력이 있다.
기계적으로 문제만 풀던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로 수학에 눈을 뜬다. 그리고 치열한 사고, 치밀한 논리를 거쳐 마침내 완전한 증명에 다다른다.
그 순간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박 교사는 그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좋았다.
수학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탐구와 증명의 언어이다. 하지만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소년에게 자신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 * *
서하가 통학로를 걷는다.
봄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길 위에 부서진다.
통학로 양옆으로 늘어선 벚나무와 느티나무,
이곳을 지나면 철쭉과 라일락이 어우러진 꽃길이 나온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서하는 이 학교에 결계처럼 내려앉은 기묘한 공기를 느꼈다.
영재고에 입학한 지 오늘로 3일.
서하는 결론지었다.
이곳은 일종의 이세계(異世界)라고.
현실에 존재하지만 현실이 아닌 뒤틀린 공간.
여기에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1학년 신입생의 수는 총 120명.
그러나 이중에 편모나 편부 가정에서 온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훈화 중에 교장 선생님이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서하는 통계청 자료를 찾아보았다.
20xx 년 ‘한부모 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전체 가구 중 한부모 가구는 9.3%나 된다.
계산을 해볼 것도 없다.
신입생 전원이 양부모 가정에서 왔을 확률은 0.000818%,
12만분의 1.
동전을 던져 17번 연속 앞면이 나올 확률과 비슷하다.
“무섭다, 표본 편향.”
입시라는 필터가 이렇게 까지 강력하게 표본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니 이곳이 확률과 통계의 법칙조차 비틀려버린 이세계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이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앗! 이세계인이다.'
같은 반 김은빈.
남녀 성비가 8.5 : 1.5인 이곳에서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개체다.
“안녕하세요.”
서하가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한다.
나이가 다르다고는 해도 그녀는 동급생, 어쩌면 이런 방식의 인사는 조금 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하는 IMO를 거치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유 불문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 삶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서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세계인들의 특징은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가 취약한가? 그들은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이어폰으로 귀를 보호한다.
손에는 항상 읽을거리가 들려있다.
터벅터벅.
은빈이 걸어오다 서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지나쳤다.
서하는 ‘역시···.’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케이스로 확률은 더 낮아졌다.
41.4%.
이세계의 또 다른 법칙이다.
시골에서 자란 서하는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100%의 확률로 인사가 돌아온다. 그것은 공기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길에서, 또는 복도에서 스쳐 가는 학생들의 눈은 언제나 책이나 태블릿 화면 속에 박혀있다.
눈이 마주치더라도 지금처럼 외면하고 지나간다.
서하는 입학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이러한 이상을 감지했고 현재는 연구를 위한 데이터를 수집중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서은아.
이곳은 수학 법칙이 뒤틀린 데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마저 지켜지지 않는 곳이에요. 제가 잘 해낼 수 있겠죠?’
떠나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았지만 서하는 벌써부터 집이 그리웠다.
* * *
학교 앞 패스트푸드 체인점,
서하가 긴장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는다. 반대편에는 이제 학교 선배가 된 수정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서하를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다.
“세상이 망하려나. 내가 너랑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되다니.”
말과는 다르게 얼굴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올해부터 3학년, 서하는 신입생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는 초등학생과 고교생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
‘고생할게 뻔한데 모른척할 수도 없고.’
이 학교를 먼저 겪어본 선배로서 불쌍한 어린 양에게 해 줘야 할 얘기가 많았다.
수정은 사실 조금 신이 난 상태였다. 초등학교에 남들보다 1년 일찍 들어갔고, 중학교는 조기졸업 했다.
동급생과 두 살 차이.
반 친구들과는 사이에서는 언제나 거리감이 느껴졌다.
주위에는 온통 연상뿐, 서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연하의 인간이다.
그래서 수정은 그동안 습득해 온 노하우를 아낌없이 서하에게 전수해 주기로 했다.
“자, 내가 뭐랬지?”
수정의 물음에 서하가 움찔한다.
“저한테 문제를 물어보는 학생들의 90%는 이미 알면서 그러는 거라고···.”
수정이 손가락을 튕긴다.
“그래! 진짜 웃기지 않아? 알면서 왜 묻는 거겠어?”
서하의 표정이 멍해진다.
“자기가 아는 것이 정말 맞는지 확인해 보려는 게 아닐까요?”
그 밖에 다른 어떤 의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쯧쯧! 정확히 반대야.”
수정이 비웃듯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젓는다.
“네?”
수정이 ‘이 가련한 어린 양을 어찌하리오!’라는 표정으로 서하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내가 아는 것을 네가 혹시 모르는지 확인하려는 거라고.”
서하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과시..인가요?”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거겠지.
‘수학을 엄-청 잘한다는 유서하도 모르는걸 나는 알고 있다!’ 이런 거. 적어도 자신이 너보다 잘 아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아주 작은 증거라도 확보한다면 최소한의 존엄은 지킬 수 있으니까.”
수정이 자신이 얘기해 놓고도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힌다.
한때 수정도 서하에게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인 인간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해지는 법. 수정은 이를 일찍부터 알아채고 인정했다.
‘얘가 불쌍한 건지, 같은 학년 애들이 안 된 건지···.’
오르지 못할 나무를 계속 쳐다보면 목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다친다. 수정은 자신을 질투하다 흑화해 버린 남자애들을 몇 명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다면 서로 편할 텐데···.
IMO 1위라는 실적을 보고 인정하면 좋을 테지만 영재고 학생들의 비대한 자아는 그렇게 쉽게 타인에게 우위를 내어주지 않는다.
‘나도 그랬나?’
그랬던 것 같다. 세상에 자신이 못 이길 사람은 없다고 진지하게 믿었으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게다가 서하는 묘하게 사람을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게 질투 따윈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 특히 그렇다.
“인사는 왜 받아주지 않는 거죠?”
서하는 수정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걔들 전부 이어폰 끼고 있었지?”
“그..랬던것 같아요.”
수정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이 학교의 암묵적인 약속 같은 거야. 나는 지금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니 인사를 하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수정이 콜라 빨대를 휘저으며 웃는다.
“이기적이지? 최소한의 예의조차 생략하고 자기 세상을 지키겠다는 거니까. 문제를 풀다가 흐름이 끊기면 싫잖아? 여기 애들 성향이 좀 그래.”
“오!”
의문이 풀렸다.
서하의 존경하는 듯한 눈빛에 수정은 만족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걱정이었겠니? 너처럼 시골 냄새나는 애가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
쉽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흥미로웠다.
서하는 수정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기숙사로 가는 길에 생각을 정리해 본다.
그러니까 이곳의 구성원들은···.
“자의식이 강하고 이기적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며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다. 같은 모수 집단에서 오지 않은 사람에게 배타성을 보일 여지가 있다.”
언어화 할수록 점입가경이다.
그동안 교우관계에 큰 문제가 없었던 서하는 이곳에 와서 크나큰 도전에 직면하고 말았다.
* * *
서하의 생각과는 다르게 같은 반 학생들은 그에게 은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방식이 조금 비틀려 있었을 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각자 문제집을 펴고, 태블릿에 수식을 끄적인다. 하지만 눈길은 자꾸만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서하를 향하고 있었다.
물론 각자가 하는 생각은 모두 달랐다.
‘진짜 넘사벽인가?’
‘사실 나와 별 차이도 없는 게 아닐까?’
‘애가 잘해봤자지.’
‘나중에 크게 될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친해져 봐?’
‘엄마가 언제 한번 데려오랬는데···.’
‘신우현이 말한 천재가 쟤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 어려운 문제 하나 있는데 한번 물어봐?’
‘아, 전에 인사할 걸 그랬나?’
모두가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수학 시간이 되었다.
드르륵.
박 선생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오늘은 이 반에서 그의 첫 수업이었다.
밤사이 내내 고민하던 그는 일단 정확한 서하의 실력을 파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오늘은 쪽지 시험이다.”
“첫 시간부터요?”
“범위는요?”
“성적에 반영 되나요?”
학생들에게서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나온다.
영재고의 시험은 난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지난 학기 이 학교의 전교 1등은 평균 57점, 전교 꼴등은 46점이었다.
하지만 박 선생은 서하의 확실한 실력 평가를 위해 평균 30점이 나오도록 이 시험을 설계했다.
IMO와는 또 다르다.
정해진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기에 숙련도가 중요하다.
스르륵.
박 선생이 미리 준비한 시험지를 배부한다.
시험지는 네 면, 총 열 문항이었다.
각 문항 옆에는 조그맣게 ‘핵심 키워드’가 적혀있다. 불변량, 기댓값, 유리수화, 대칭성, 극한 구조, 그래프 연결성, 피존홀, 생성함수.
학생들의 눈이 가장 먼저 그곳을 훑는다.
핵심 키워드 - 답을 가르쳐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눈으로 문제를 봐야 하는지를 지정하는 가이드였다.
‘그것마저 없으면 너무 어려우니···.’
“시간은 35분!”
박성대의 말에 교실이 일제히 정적에 잠겼다.
“정답보다 풀이의 흐름을 본다.”
사각사각.
연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태진은 늘 앞자리에 앉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습관처럼 수업 시간 30분 전 교실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 놓는다. 그는 자리를 정할 때 햇빛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창가 대신 칠판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를 택했다.
어린 시절부터 태진은 집단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방법을 본능처럼 알았다.
아버지는 부장판사, 어머니는 지역 유지의 딸.
그 사실만으로도 태진은 또래들 사이에서 언제나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남을 괴롭히거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사고 쳐서 내 앞길을 막지 마라. 내 자식이 그렇게 한심한 놈은 아닐 거라 믿는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태진에게 냉정했다.
어릴 때 아직 출근 전인 아버지의 구두를 닦은 일이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딘가에서 봤던 미담을 따라 해 봤을 뿐.
그저 작은 칭찬이 듣고 싶었다.
‘우리 아들 착하네.’라고 말하며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반짝이는 구두를 들고 자랑스럽게 아버지를 바라보던 어린 날 자신의 모습.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랭한 시선이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한 번이라도 천한 일을 하면 습관이 된다. 평생 이걸 할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손도 대지 말거라.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자식의 성취다.”
그 이후로 태진은 부모 앞에서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태진은 책상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축복받은 환경과 DNA, 거기에 개인의 노력이 더해지자 무시무시한 시너지가 발휘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진의 성적은 끝을 모르고 올랐다. 반 1등, 전교 1등, 그리고 지역 1등까지.
시험이 끝나면 태진의 이름은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교사들이 가장 먼저 외우는 학생의 이름도 태진이었다. 주변에 친구들이 몰려든다. 그는 순식간에 집단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태진의 생활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성적표를 내밀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지인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중요한 손님이었는지 아버지도 자리를 함께했다.
화장실을 가려고 방을 나왔던 태진은 어른들의 대화 중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을 우연히 들었다.
“태진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면서요? 영재고에 들어갔다던데···. 태진 엄마는 참 좋겠어요.”
감정 기복이 적은 어머니가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젓는다.
“별거 아니에요. 아직 멀었죠.”
아버지도 술잔을 들며 말을 보탰다.
“저를 닮았는지 애가 워낙 열심히 합니다. 성취라는 건 계속 이어져야 진짜죠. 지금은 그저 과정일 뿐입니다.”
겸양을 차리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 스쳐 간 표정을 태진은 놓치지 않았다.
뿌듯함, 대견함, 자랑스러움, 애정, 자신이 부모에게 바라던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부모님은 나를 제대로 보고 계셨구나.’
그간의 노력이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태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쳤다.
영재고에 입학한 첫날,
태진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인 익숙함을 느꼈다.
‘왜지?’
중학 때와 비교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태진이 주위를 둘러본다.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교실 여기저기에서 작은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명품 로고가 작게 박힌 옷과 가방. 그들의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가진 자들의 여유가 스며 있었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처음 본 학생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 접근은 좀 단순하지 않아?
“아, 그건 내가 예전에 봤던 자료에서도 반박된 내용이야.”
조곤조곤 말하지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목소리.
‘아! 이거였나?’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언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선민의식일까?
같은 세계에서 자라왔다는 동질감, 저들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태진은 그것이 꺼림직하면서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몇 명만 제외하면···.’
어느 집단에나 이레귤러는 존재하는 법.
태진이 고개를 돌려 화제의 소년을 바라본다.
입학식부터 굉장히 떠들썩했다.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오빠와 떨어지기 싫다며 학교가 떠나가라 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진은 그의 여동생보다 부모의 옷차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성껏 차려입었지만 어딘가 다르다.
오래 전에 샀는지 남자의 양복이 몸에 딱 맞지 않는다.
여자의 투피스 역시 예전 유행을 따라 산 듯한 촌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명품과 맞춤 정장으로 몸을 감싼 학부모들 사이에서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태진에게는 어딘가 거북하게 다가왔다.
* * *
다음날도 태진은 서하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교실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눈이 먼저 찾게 된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별다른 맥락도 친분도 없지만 그는 마주칠 때마다 먼저 고개를 숙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태진은 가볍게 자신의 이어폰을 가리켰다.
거리감이 없는 사람은 불편하다.
이 학교 대부분의 아이들은 언제나 계산된 거리를 유지한다.
인사를 건넬지 말지는 상대의 배경과 입지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를 고려한 후에야 정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유서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늘도 누구보다 먼저 교실에 들어와 삐뚤어진 책상을 바로잡고 흘러내린 창문 블라인드를 여러 번 건드리며 정교하게 수평을 맞춘다.
‘의외로 깔끔한 성격인가?’
당번이 아닌데도 칠판을 깨끗이 지운다.
줄 맞춰서 분필을 색깔별로 하나씩 내려놓은 뒤에야 그의 아침 루틴이 끝난다.
솔직히 흥미는 있다.
IMO 개인 1위라는 성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대회에 나가서 곧 확인 할 수 있겠지만.
잠시 앉아있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곧 수학 시간이 다가왔다.
드르륵.
박 선생이 시험지를 들고 교실에 들어온다.
“쪽지 시험을 보겠다.”
태진은 긴장했다.
쪽지 시험이라 해도 입학해서 치르는 첫 테스트. 자신이 이곳에서도 우월한 위치에 오를 수 있는지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종이가 배부되었다.
뒤집힌 시험지가 책상 위에 놓이자 교실이 단숨에 고요해진다.
“시작.”
연필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연필과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균일한 리듬을 내며 퍼진다.
학생들이 고개를 숙인 채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박성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도 애들이 괜찮네. 건드리기 쉽지 않을 텐데 일단 시도하는 정신이 좋아.’
[2n × 2n 격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좌표 (0 , 0)에서 (2n , 2n)까지 이동한다. 한 번에 오른쪽이나 위쪽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가능한 경로의 수가 항상 짝수임을 보여라.]
태진은 문제를 보고 침을 삼켰다.
‘짝수임을 보여라.’
단순히 경로를 세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곧바로 이항계수를 떠올렸다.
이항계수를 이용해 식을 세우고 그것이 짝수임을 증명하면 된다.
태진의 연필이 바쁘게 움직인다. 먼저 작은 값을 대입하고 패턴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패턴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계산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다.
‘어쩌지? 아!’
태진은 귀납법의 구조를 떠올렸다.
사각사각.
종이에 식이 이어진다.
파스칼 항등식을 적고 이항 계수를 전개했다. 곱셈 항으로 분해하고 분모와 분자의 짝수성을 따진다.
한 줄, 한 줄, 계단처럼 견고한 논리가 쌓여간다.
태진은 잠시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영재고.’
초장부터 어려운 문제가 나왔지만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빼곡히 답을 채워가고 있다.
‘응?’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유서하였다.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게 IMO 1위도 못 푸는 문제라고? 그럼 이 학교 수준은 대체···.’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태진은 이내 그것을 지우고 문제에 집중했다.
* * *
서하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모두가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다. 답을 쓸 공간이 부족해 추가로 종이를 요청하는 학생들도 여럿이다.
그러나 서하는 답안지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문제는 풀어야 한다.
서하가 눈을 질끈 감더니 연필을 집어 답을 적는다.
「P ↔ P’, 따라서 전체 경로 수는 짝수.」
‘이거면 된 건가? 박 교수님이 내 눈에는 당연해 보이더라도 최대한 세세하게 적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올림피아드에서의 논란 이후 서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세운 논리를 모두가 이해할 거라 기대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논리가 필요할 때의 이야기.
서하에게 눈앞의 문제는 더 이상 식을 전개할 수 없는 종착지였다.
대칭으로 대응시키면 당연히 모든 경로가 짝을 이룬다.
거기서 증명은 종료.
학생들은 이 문제를 이해와 계산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서하는 문제를 구조적 대칭성으로 보고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재해석했다.
서하가 자신이 적은 답을 빤히 바라본다. 성의가 지나치게 없어 보였다.
‘더키, 도저히 나는 못하겠어. 네가 좀 알아서 해봐.’
불안했던 서하는 결국 불편한 동거인에게까지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마치 이런 문제로 자신을 부르지 말라는 듯 더키가 문제 풀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서하는 절망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
서하는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문제에서는 반드시 상세한 증명을 적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마찬가지였다. 어느 문제든 도저히 한 줄 이상 적을 재간이 없었다.
박 선생이 출제한 문제는 고교 교육과정을 넘어서는 난도였지만 IMO 레벨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올림피아드 문제조차 너무 쉬웠던 서하에게는 사칙 연산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만!”
“벌써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선생님! 인간적으로 시간이 너무 짧아요.”
시험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조금의 공백도 없이 빽빽하게 채워진 시험지를 제출한다.
곧 서하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네 장의 종이를 조심스레 모아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서하의 모습을 보고 몇몇 학생들이 소리죽여 웃었다.
“저도 다 풀긴 했는데요···.”
시험지를 내미는 손이 덜덜 떨린다.
거의 백지와 다를 바 없는 서하의 시험지를 보고 박 선생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교무실,
박성대는 시험지 더미를 앞에 쌓아두고 한 장씩 넘겼다.
빽빽한 계산, 장문의 귀납, 경우의 수를 모두 적은 표.
그는 붉은 펜 끝으로 계산 줄기를 따라가다 금방 고개를 저었다.
답을 찾기 위해 우회로를 끝없이 빙빙 도는 증명이었다. 그러다 운 좋게 제대로 된 길이 나오면 그제야 뺑뺑이를 멈춘다.
필요 없는 가정을 나누고 또 나누고, 불필요한 명제를 다시 또 증명하고···.
논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핵심을 한번 지나칠 때마다 문장은 불어나고 진실은 옅어진다.
붉은 펜이 바쁘게 움직였다.
3점, 5점, 2점.
예상했던 대로 학생들의 점수는 그가 의도했던 평균을 벗어나지 못했다.
박 선생이 가장 위에 놓인 시험지를 힐끗 본다.
「P ↔ P’, 따라서 답은 짝수」
그래프 차수를 묻는 문제에서도 답은 딱 한 줄, 생성 함수는 수식 하나로 끝냈다.
「각 간선이 2씩 기여, 따라서 답은 짝수」
「G(x) = 1 / ((1−x)(1−x²)(1−x⁵))」
3번, 4번, 5번···. 모든 문항의 답이 이런 식으로 간결하게 마무리된다. 지나치게 짧았지만 오답은 없었다. 그리고 논리적 허점도 찾을 수 없었다.
박성대는 펜을 멈췄다.
‘과정 미비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미 답안 자체에 모든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채점 기준표를 펼쳤다.
‘정답보다 풀이의 흐름을 본다.’라고 본인이 직접 말했다.
흐름이 없는가?
있었다.
다만 돌지 않고 한 번에 핵심을 가로질렀을 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점수를 적었다.
1번 10점, 2번 10점, 3번 10점···.
열 번의 동그라미가 시험지 상단에 차례로 그려진다.
총점 100.
박성대는 몸을 젖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이들이 잘 받아들여야 할 텐데···.’
답을 보니 성격을 알겠다.
서하는 증명에 있어 극한의 효율을 추구한다. 불필요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단도직입적이고, 동시에 고집스럽다. 자기 안에서 증명이 끝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도 안 될 만큼 뛰어나다.
박 선생은 자신이 서하를 계속 가르쳐도 괜찮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 * *
다음 날, 2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교실 뒤 게시판에 커다란 종이가 붙었다.
[수학 쪽지 시험 결과]
1등 : 유서하 ㅡ 100점.
2등 : 조태진 ㅡ 47점.
3등 : 김은빈 ㅡ 46점.
4등 : 박기범 ㅡ 45점.
(이하 생략)
점수를 맞춰보느라 떠들썩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얼어 붙었다.
누군가는 숫자를 두 번 읽었다.
“100점 실화냐?”
장난처럼 내뱉은 어느 학생의 말에 누구도 웃지 못했다.
태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결과표를 바라본다.
‘47점?’
이해할 수 있는 점수였다.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이었으니.
하지만 유서하의 점수는 그들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태진이 고개를 돌려 앞줄을 본다.
서하는 평소처럼 의자에 똑바로 앉아있었다. 심지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결과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거기에는 놀라움도, 환호도, 자만도 없었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박 선생이 들어왔다.
“다들 봤지?”
““네에.””
학생들의 힘없는 목소리에 박성대가 웃는다.
“시험 결과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을 거야.”
학생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할 말 많은 눈으로 교사를 바라본다.
박 선생이 교탁 위에 시험지 한 장을 올려놓았다.
“내가 설명 할 수도 있겠지만 100점을 받은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것이 가장 좋겠지. 서하가 직접 나와서 설명해 줄래?”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네!”
서하가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와 분필을 잡았다.
서하는 자신이 있었다.
IMO 기간에 팀원들과 스터디를 진행하며 많은 문제를 설명해 봤기 때문이다.
서하가 칠판에 큰 사각 격자를 그린다. 그리고 중앙에 대각선을 긋고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 문제를 풀 때 ‘페어링’이라는 개념을 이용했습니다.”
평소 조용하던 서하였지만 설명할 때 만큼은 말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모든 경로를 직접 세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칭성을 이용하면 단순해지죠. 임의의 경로 P가 있으면 그걸 중심점을 기준으로 대칭시킵니다. 그러면 또 다른 경로 P’가 만들어집니다.”
서하의 손에서 그려지는 그래프를 모두가 눈으로 좇는다. 몇몇이 서하의 설명을 알아듣고는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즉, 모든 경로는 반드시 대칭된 짝을 갖습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전체 집합을 2개씩 묶는 대응 관계가 생기는 거죠.
이렇게 되면 개수를 따로 세지 않아도 전체 경로의 수가 항상 짝수라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준비 없이 듣던 학생들이 어느샌가 노트를 꺼내 서하의 설명을 필기하기 시작했다.
설명이 계속된다.
2번, 3번, 4번···.
서하는 모든 문제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풀었다.
길게 돌지 않는다.
불필요한 계산도, 장황한 설명도 없었다.
문제마다 딱 하나의 핵심 개념을 집어내고 그것을 한 줄 정리로 증명해 버린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 함께했던 팀원들은 한국에서 고르고 고른 다섯 명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영재고라고 해도 수준이 같을 수는 없었고 절반 이상이 서하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질문 있으세요?”
문제 풀이가 끝났다.
서하가 눈을 반짝이며 학생들을 바라본다.
마치 ‘내가 이렇게 쉽게 설명했어요!’ 하고 뿌듯해 하는 표정이었다.
학생들은 그런 서하를 실망시키는것이 미안해서 차마 손을 들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만족한 듯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길게 쓰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야.”
분위기를 감지한 박 선생이 학생들을 위로할 말을 생각해 냈다.
“다만 본질을 볼 수 있다면 짧게 끝낼 수 있겠지. 나는 저것이 천재들만의 특권은 아니라고 생각해. 여러분들도 언젠가 그 길을 볼 수 있다.
다만 아직은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기야. 그러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말도록.”
박 선생의 말에 학생들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수업이 끝났다.
“점심시간이다.”
누군가의 말에 학생들이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페테리아로 이동하면서도 그들은 서하의 풀이가 남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시 IMO 1위! 유서하 장난 아닌데?”
4등을 한 기범이 먼저 말을 꺼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문제만 잘 풀지 알았는데 설명도 잘하네.”
"니들은 알아 들었냐? 나는 영 모르겠던데. 자괴감 느껴진다."
“걔는 어차피 어나더 레벨이야. 비교하지 말자.”
“사실 한국 대표로만 뽑혀도 국내 탑 식스 아니냐? 근데 서하는 아예 세계 1등이니까.”
“거의 반칙이지. 질문 있냐고 하던 게 꼭 ‘형들, 설마 이런 것도 못 알아듣진 않겠죠?’라고 묻는 것 같았어.”
자존심 강한 학생들이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서하가 만났던 다른 많은 영재들처럼 그들도 이해와 수용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태진도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아주 평범한 학생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해 보니 그간 해왔던 행동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정작 아주 특별한 능력를 가진 서하는 항상 먼저 말을 걸어주는데 뭘 그렇게 있는 척했을까?
그동안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사실 오만한 자신의 행동을 참아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은 꼭 누군가의 인내가 있어야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인가?
문득 얻은 깨달음에 태진은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 * *
저녁 시간,
식당은 고교생들 특유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학생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하는 식판에 음식을 받아 조금 두리번거리다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오! 역시 국내 최고 수준의 급식.”
고퀄리티 식단에 감탄이 나온다.
도톰하게 구워낸 닭가슴살 스테이크에 갈색 데미슬라스 소스가 끼얹어있다.
고소한 향이 솔솔 나는 콘버터와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국 대신 나온 따뜻한 양송이수프까지.
초등학교 때보다 확실히 업그레이드 된 급식이었다.
서하는 밥을 먹으며 지난 일주일을 되돌아보았다.
섞이기 힘들었던 학교 분위기, 거리를 두는 학생들, 어딘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 선생님들.
모든 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상관없어.’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생각을 떨친다.
‘어차피 다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야.’
서하는 밥을 먹으며 어떻게 이곳 생활을 버텨내야 할지 고민했다.
어느새 음식을 다 먹었다. 서하가 잔반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먹었습니다!”
서하의 인사에 영양사들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기숙사로 걸어가는데 앞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반 태진이었다.
“안녕하세요.”
서하가 평소처럼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가려 한다.
그가 당연히 외면할거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태진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낸다.
“안녕? 밥 먹었니?”
예상외의 반응에 서하는 깜짝 놀랐다.
“네, 지금 먹고 들어가는 길이에요.”
태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학교 밥 먹을 만하지. 그런데 너 축구는 좀 하니?”
“네?”
“같은 반 애들이랑 5:5 미니게임을 하기로 했거든. 너 오면 딱 맞겠다.”
서하가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다.
“제가 옥천 도담초 베스트 일레븐이긴 했는데···. 옆 학교랑 할 때 스타팅이었어요.”
서하의 대답에 태진이 큰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알았어. 아래 운동장에서 금방 모일 거야.”
“네! 그럼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먼저 가 있을게.”
서하는 곧바로 기숙사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서둘러 옷장을 열어 복장을 갖춘다.
서하가 운동장에 내려왔을 때는 그를 제외한 아홉 명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들이 서하의 모습을 보더니 감탄한다.
“이야! 제대로 갖춰 입고 나왔네?”
서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반바지와 저지, 축구화에 튜브삭스까지···.
당장 대회에 나가도 손색 없는 복장이었다. 평범한 체육복에 운동화를 신은 다른 아이들과 확연하게 대비되는 모습.
서하가 발끝 스터드로 바닥을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패스, 패스!”
“여기!”
짧고 날카로운 외침들이 공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공이 굴러가면 쫓고 빼앗기면 다시 달려드는 단순한 축구.
하지만 모두가 열심이었다.
“수비, 수비!”
“거기 먼저 가서 막아!”
잔디 구장이라 뛰는 맛이 났다.
서하가 공을 잡고 길게 패스를 뿌린다.
기범이 전력 질주 끝에 겨우 패스를 잡았다. 그리고 서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든다.
“나이스!”
서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슛! 들어갔다!”
“좋아!”
환호가 터져 나왔다.
팀원들이 달려와 서로 얼싸안는다. 서하도 그들과 한데 뭉쳐 방방 뛰며 기뻐했다.
게임이 끝나고 모두가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너 뭐 이렇게 체력이 좋냐?”
“쟤는 젊잖아. 우린 이제 안돼.”
“축구 잘 하네. 다음에도 같이 하자.”
매일 러닝을 거르지 않은 서하는 체력만은 자신이 있었다.
서하의 귀가 빨개진다.
“네! 저도 재미있었어요.”
서하가 입학 한 이후 가장 말을 많이 했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서하의 생활에 변화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인사에 답이 돌아오는 비율이 급격히 높아졌다.
72.8%?
서하는 언제까지 이 통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세계라고 규정했던 장소가 현실과 섞이고 있었다.
* * *
서하는 입학 두 번째 주부터 ‘대학 선(先)이수 프로그램’을 듣게 되었다.
“야! 누나랑 수업 같이 들으니까 좋냐?”
수정이 서하의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이곳에 있는 인원은 총 12명.
그중에 신입생은 서하 혼자였다.
연계 프로그램은 선행학습이 아니다.
앞으로 대학에서 배울 과정을 미리 학습해 졸업까지의 시간을 줄이는 것이 목표. 카이스트 입학 후에는 정식 학점으로 인정 받기에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신청할 수 있다.
“누가 선생님으로 오실까?”
“전에 왔던 조교 쌤 친절하고 좋았었는데.”
이 수업이 처음이 아닌 듯 뒤에 있는 학생들이 속닥거린다.
드르륵.
강의실의 소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또각또각.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발소리.
서하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에 딱 붙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 교실로 걸어들어왔다.
“카이스트 수리 과학과 김지윤 교수입니다.”
순간 교실이 술렁였다.
“교수님이 직접 오셨다고?”
“원래 이거 조교 쌤들이 하지 않았어?”
“김지윤 교수님이면 그분 맞지? 필즈상 후보로 올랐다는···.”
감탄의 속삭임이 교실 전체로 번졌다.
학생들이 눈을 크게 뜬다.
느슨한 자세로 앉아있던 학생이 노트북을 덮고 자세를 바로 한다.
3학년 수정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가 교탁 위에 자료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번 학기 선이수 프로그램은 아주 어려울 예정입니다. 전처럼 고등학생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요.
그러니 자신 없는 사람은 어서 드랍하도록 하세요.”
전례 없는 교수의 경고에 모두가 동시에 숨을 삼켰다. 하지만 서하는 드디어 지윤에게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렜다.
지윤이 아무 말 없이 강의실을 둘러보다가 서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씽긋 윙크하며 웃는다.
서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지윤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교탁에 꽂아둔 분필을 꺼내 들더니 칠판 한 가운데에 큼지막하게 네 단어를 적었다.
[정의 - 정리 - 증명 - 비평]
“이번 학기는 이 순서로만 움직입니다. 저는 예쁜 풀이에 관심이 없습니다. 증명이란 짧아도 무너질 수 있고 길어도 헛걸음일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절대 깨지지 않는 논리!”
지윤이 큰 글씨로 ‘논리’라고 적는다.
“여러분은 수학 하면 숫자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완벽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증명입니다.
제가 적은 나머지 세 단계는 바로 이 흠결 없는 논리를 세우기 위한 과정인 거죠. 그럼 잠깐 테스트를 해볼까요?”
김지윤 교수가 마우스를 클릭하자 칠판에 문제가 송출된다.
[어느 마을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과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서로의 눈 색깔은 알지만 자기 눈 색깔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직접 볼 방법도 없죠. 규칙은 ‘자신의 눈이 무슨 색인지 알게 되면 그날 밤 마을을 떠난다’입니다.
어느 날 마을에 들어온 여행자가 말합니다. ‘여기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중간에 있는 한 학생이 자신있게 손을 들었다.
“어···김정환 학생? 좋습니다. 말해보세요.”
“파란 눈인 사람은 즉시 자신의 눈 색깔을 깨닫고 마을을 떠납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 색깔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 규칙이니, 자기가 아는 사람 중 파란 눈이 없다면 자신 밖에 남지 않는다.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윤이 고개를 젓는다.
“틀렸습니다. 누가 논박해 보시죠?”
서하가 손을 들었다.
“그 답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파란 눈이 단 한 명만 있다면 그는 여행자의 말을 듣고 ’아! 그게 나구나’ 하고 바로 떠납니다. 하지만 두 명 이상이라면 다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저 사람이 떠나겠지’하고 기다립니다.
첫째 날 아무도 떠나지 않는다면 둘째 날이 되어서야 서로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닫고 바로 떠납니다. 세 명이라면 사흘째, 네 명이라면 나흘째···. 이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서하를 보는 지윤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완벽합니다. 논리가 깨지지 않으려면 모든 경우의 수를 빠짐없이 고려해야 합니다. 논리의 구멍이 뚫리지 않는 게 중요하겠죠. 수학에서 증명은 이 빈틈을 메우는 작업입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그건 완성된 논리가 아닌 겁니다.”
학생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구멍을 너무 과하게 막은 경우도 결코 좋은 증명이라 볼 수 없습니다.”
지윤이 마우스를 딸깍 하자 새로운 지문이 펼쳐졌다.
“이건 과거 발생한 도난 사건에 대한 실제 보고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증명에 필요 없는 부분을 제거해 봅시다.”
서하는 신이 났다.
김 교수의 수업이 너무나 즐거워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하의 스승은 언제나 책이었다.
두 살 무렵, 글자를 처음 읽게 된 순간부터 서하는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날이 없었다.
등불 아래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서하는 책을 읽으며 혼자 질문을 던졌고 스스로 답을 찾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미해결’ 목록에 적어두고 나중에라도 반드시 돌아가 처리했다.
서하는 책을 읽으며 늘 스스로에게 절차를 부여했다. 새로운 개념을 만나면 먼저 정의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면밀한 자기 검증의 시간을 거쳤다.
김지윤 교수가 ‘정의 - 정리 - 증명 - 비평’이라는 프로세스를 적었을 때 서하는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과정은 서하가 아주 어릴 때부터 숨 쉬듯 일상적으로 해오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그러니 서하가 논리에 강한 것은 필연이었다.
보고서를 읽는 학생들의 눈빛이 진지하다.
평소 읽던 글과 성격이 달라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학생들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지워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전기 나간 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것 때문에 CCTV가 멈췄으니까···.”
“여성이 휴대전화를 썼다는 건 단서니까 삭제하면 안되고.”
“상점 주인이 문을 연 시각도 알리바이니까 필요해.”
여기저기서 속삭임이 들려온다.
수정도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좁힌 채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고 있었다.
빼곡하게 적힌 사건 개요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뒤섞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건 발생 시각, 상점 주인이 문을 연 시간, 주변 카페 종업원의 목격담, 전기가 나가서 멈춘 CCTV, 금고에 대한 설명, 과거 상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의 존재까지···.
그러나 서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눈으로 빠르게 지문을 훑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저 보고서에 나열되어 있는 단서들은 대부분 결론과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서하가 앞으로 나가 문장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한다.
거침없는 서하의 행동에 학생들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단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실들이 하나씩 삭제되어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문장은 단 세 줄이었다.
[범행 시각 상점 주인은 외출 중이었다.]
[상점 금고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린다.]
[주인과 상점에서 일했던 남성만이 그 번호를 알고 있었다.]
“훌륭합니다!”
지윤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불필요한 사실을 없애니 핵심이 명확히 보이죠? 실제로 범인은 저 직원이었어요.
수학에서의 증명도 이와 같습니다. 문제에 주어진 조건을 모두 이용 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필수적이지 않은 조건은 우리의 눈을 가리기 때문에 빠르게 배제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빈틈없는 논리를 세우는 것!”
“자, 모두 유서하 학생에게 박수!”
짝짝짝!
서하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때 지윤이 서하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하야, 선생님이 연구실로 언제든 놀러 오랬는데 왜 안 왔니? 결국 내가 널 만나러 여기까지 왔잖아."
“흐익!”
서하가 흠칫 몸을 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후에도 논리 게임은 계속되었다.
학생이 나와 논리를 제시하면 다른 쪽에서 깨뜨리는 것.
그리고 서하는 이 게임의 악마였다.
모든 학생들의 논리가 서하에 의해 박살 난다. 반대로 아무도 서하의 논리를 깨뜨리지 못했다.
“와···. 너 같은 애는 정말 첨 본다.”
수정이 질린 듯 혀를 내둘렀다.
기초 논리 공사가 끝난 뒤, 지윤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것을 수학에 적용하게 했다.
서하의 머리가 핑핑 돈다.
칠판 위에 적힌 문제는 평범해 보이는 함수 증명.
하지만 지윤의 방식대로 접근하자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서하에게 있어 배움은 언제나 고독했다.
물론 그는 그 과정 역시 충분히 즐거웠다고 생각했지만.
지윤은 그런 서하에게 있어 평생 처음으로 만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이었다.
서하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누군가로부터의 직접적인 배움에 감동했다.
지윤이 그런 서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초등학교에 입학한 서은은 씩씩한 아이로 자라났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인지 행동에 소심한 구석이 없었다.
“선생님! 저 알아요!”
선생님이 질문을 할 때마다 서은은 누구보다도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서은이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지 두 다리를 번갈아 춤추듯 움직인다.
미영이 가서 살펴보니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오빠가 쓰던 것과 같은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삼각형’, ‘사각형’이라 적으며 공부에 열중한다. 물론 본인은 도형 놀이라고 생각했다.
“사각형의 내각의 합은 360도, 반으로 자르면 삼각형이니까 180도. 그럼 오각형은 삼각형이 세 개니까 540도?”
미영은 그 모습을 보며 ‘저런 건 또 이상하게 오빠를 닮았네.’라고 생각했다.
“엄마! 저 왔어요!”
대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덩치가 훌쩍 커진 아들이 커다란 가방을 벗으며 들어온다. 마루에 엎드려있던 서은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다!”
서은이 벌떡 일어나 달려가더니 두 팔을 벌려 서하의 허리에 매달린다. 그러자 서하가 두 손으로 서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서은이 꺄르르 웃으며 허공에서 팔다리를 휘저었다.
“서은이 도형 놀이 하고 있었어?”
“응! 육각형은 삼각형이 네 개야!”
서하가 웃으며 동생을 꼭 안았다.
“어서 밥 먹어라.”
미영이 서하의 가방을 받고는 서은을 떼어놓았다.
방 안에서 티비를 보던 철호도 어느새 나와 반갑게 서하를 맞아주었다.
‘아! 집이다!’
긴장 가득하던 학교에서 나와 집에 오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서하는 어머니의 된장찌개에 밥 두 그릇을 먹고 서은과 동네를 산책하며 놀았다.
저녁이 되자 서하는 다시 익숙한 책상 앞에 앉았다.
“178번째 시도.”
수학자들이 난제에 집착하는 것은 벌이 꽃을 찾아다니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서하를 아끼는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말렸을 것이다. 난제에 매달리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파울 볼프스켈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데 일생을 바쳤지만 원하던 결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자신의 유산을 모두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사망하였다.
루이스 드 브랑주는 대표적인 ‘리만 가설의 망령에 사로잡힌 학자’로 회자된다. 그는 30년도 넘게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끝내 풀지 못했다. 그리고 극심한 압박과 좌절감으로 학계에서 멀어져갔다.
4색 정리 역시 그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도전했고 또 실패했던 난제였다.
아름답지 않다고 해도 이미 해결된 문제.
누구보다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이 이 문제에 집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각사각.
하지만 서하에게 포기란 선택지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평생에 처음 마주했던 풀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하는 이 문제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다. 따라서 어디서 막히는지, 어떤 길이 막다른 방향인지 이미 모두 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모든 벽을 회피하고자 했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장애물도 함께 높아진다.
이것이 서하가 마주한 딜레마였다.
그러나 178번째 시도 만에 무엇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서하의 날카로운 수학적 직관이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음? 이 길은 꼭 피해 가야 하는 걸까?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득 깨달음이 밀려왔다.
지윤과의 수업이 떠오른 것이다.
‘주어진 조건을 모두 이용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필수적이지 않은 조건은 빠르게 배제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었지만 지윤의 말은 관성처럼 조건을 회피하던 서하에게 또 다른 길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각사각.
서하의 연필이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
종이를 가득 메운 수식 위로 쉼 없이 손이 움직인다. 방 안의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서하는 묵묵히 연구를 계속했다.
사각사각.
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끝이 없는 황야를 헤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걷고 있다.
수년간 서하를 막아왔던 거대한 벽이 눈앞에서 처음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서하의 방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
걱정이 된 미영이 아들의 방문 밖을 서성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니 서하가 책상에 몸을 붙이고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지 문이 열린 지도 모르는 모습.
미영은 아들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혹여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남들은 애들이 공부를 안 해서 걱정이라는데···.’
서하는 어릴 때부터 저랬다.
무엇인가에 한번 몰두하면 바로 옆에서 밥 먹으라는 말을 해도 듣지 못했다.
미영은 서하의 방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부터 시작한 정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아! 벌써?”
서하가 시계를 보고서는 깜짝 놀란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서하가 고개를 돌려 책장 위에 있는 파스칼의 초상화를 바라본다.
“제가 말했었죠? 당신보다 더 대단한 발견을 할 거라고. 물론 이게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이미 증명된 4색 정리 따위를 파스칼의 정리와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서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을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이제 몇 단계만 더 돌파하면 빛이 보일 거란 확신이 든다.
“그때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내일일 수도, 혹은 내년일 수도···.
운이 나쁘면 훨씬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으갸걋.”
서하가 몸을 풀다 연필 위의 오리를 바라본다.
“더키, 너도 기대되지? 네가 가진 능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할 때가 올지도 몰라. 그때까지 아프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환경 변화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더키를 풀어줘야 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제때 발산하지 않으면 공황 증상이 올 것 같아서 각별히 주의하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까.”
서하가 생각에 잠긴다.
더키는 안정된 환경에서 실컷 계산을 시키면 진정된다.
불안했던 서하는 자신의 모습을 녹화해서 보았는데 계산에 미친 듯 몰두하는 모습이 어딘지 자신 같지 않아 남에게 보여주기 꺼려졌다.
‘더키와 내가 둘 다 만족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 잡힐듯하면서도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아니, 이 사람들은 눈도 없나! 서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인터넷 기사를 보던 우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기대 받는 한국의 영재들, 세계와의 격차 줄일 수 있을까?]
내용을 읽어보니 기자는 연구 성과, 국제 학술지 게재 논문 수 등에서 한국 기초과학이 많이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영재들을 소개하며 미래를 기대해 본다는 내용이었다. 그중 서하에 대한 내용이 우현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최연소 1위를 차지한 유서하 군은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한국 수학계의 미래’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간 한국의 영재 교육은 문제 풀이 중심의 대회 실적에 지나치게 집중해 왔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고등학생 시절 세계 대회에서 입상했던 인재들 가운데 상당수가 성인이 된 후 학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연구자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능력과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발전시키는 능력 사이에는 본질적인 간극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현이 웹 페이지를 내린다.
그는 요즘 서하에 관해 떠들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는 중이었다.
서하가 IMO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 우현은 집에서 혼자 축배를 들었다. 당연히 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수학을 모르는 일반인들 중에서 서하의 성과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그 6번 문제.
문제가 발표된 그날 밤, 우현은 강의 준비를 제쳐두고 책상에 앉았다.
“신우현, 아직 안 죽었다.”
수학적 역량에 있어 학생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한 우현은 처음부터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다 방지턱에 걸린 듯 6번에서 그의 펜이 멈춘다.
말도 안 되는 난도였다.
밤새 문제를 잡고 끙끙거렸지만 그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 서하의 답안을 보고서야 그는 출제자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벌써 추월당했네.’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자로서의 자신은 이미 끝난 것 같아 기분이 씁쓸했다. 동시에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희열이 밀려왔다.
[···나였으면 만점을 줬을 것이다.]
특히 증오해 마지않는 엘리야 크로넨의 찬사를 봤을 때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당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서하가 당신보다 더 대단하다니까?”
우현은 모니터에서 웃고 있는 크로넨을 향해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프린스턴 연구동 13층,
처음 그 문을 열었을 때는 자신도 마침내 수학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믿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두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부심.
자신도 언젠가 난제 해결에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희망은 반년도 되지 않아 무너졌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차가운 눈빛, 우현은 아직도 그날의 꿈을 꾼다.
“자네에게는 수학적 직관이 없다. 그게 없는 인간은 결국 뛰어난 수학자가 될 수 없어.”
13층은 지옥이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무너져간다. 그리고 우현도 어느날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겨 사라져 버린 다른 동료들처럼 그곳을 떠났다.
“교수님, 당신의 올림피아드 최연소 기록은 서하가 깼어요. 지금 풀고 계신 밀레니엄 문제도 언젠가 그 아이가 먼저 해결해 버릴지 모른다고요?”
우현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게시판을 클릭한다.
[유서하 거품 아님?]
-그냥 문제만 잘 푸는 거잖아? 한국 주입식 교육이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걸 보여준 성과는 인정하는데 오바하지 말자. 결국 그저 그런 수재로 남을 듯. 나중에 대기업 연구원이나 하고 있겠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타닥타닥.
└니 글 박제했다. 나중에 서하가 필즈상 받는 날, 온 커뮤를 도배해 주마.
└ㅋㅋㅋㅋㅋㅋ 필즈상이 뉘 집 개 이름이야? 맘대로 하슈. 그런 일이 생기면 광화문에서 도게자라도 박겠음.
└ㅇㅋ, 이것도 박제. 약속 꼭 지켜라.
└참고로 나 수학 전공이다.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란 말씀.
└ㅇㅇ 너는 이제 뒤졌다.
* * *
“후···.”
서하가 캠퍼스 노트로 가득 차 있는 박스를 힘겹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주말에 4색 정리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 이후 서하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 집에 보관하고 있던 모든 기록을 기숙사로 옮겨왔다.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자.’
실패만 했던 연구를 누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 집에 있을 때만 해왔었는데 이제 더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서하의 머릿속은 온통 4색 정리로 가득 차 있었다.
박스에서 꺼낸 노트들을 바닥에 차곡차곡 늘어놓으니 방 안이 금세 좁아졌다.
서하가 그중 한 권을 집어 든다.
수많은 수식과 그림, 중간에 붙여놓은 메모지와 펜으로 찍찍 그어 지저분하게 수정한 흔적들.
의미 없는 짓이라고 좌절했을 때도 있었지만 이 모든 노력들이 지금은 문제 해결의 유일한 돌파구가 되어주고 있다.
‘절대 포기 안 해.’
시계를 보니 벌써 러닝 시간이다.
서하는 서둘러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오늘은 저 길로 가볼까?’
이 학교의 정확한 명칭은 ‘한국 과학 예술 영재 학교’.
즉 전교생의 절반은 예과 학생이라는 뜻이다.
서하는 입학한 이후 한 번도 예과 쪽으로 가본 적이 없었다.
‘건물이 예쁘네.’
각 과의 특성을 반영하듯 이과는 무기질적인 콘크리트, 예과는 따뜻한 느낌의 목재와 유리를 사용한 건물이 많아 보였다.
기숙사를 빠져나와 오솔길을 따라가자 점점 공기가 달라진다.
서하는 처음 보는 학교의 풍경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학교가 이렇게 예뻤나?’
다양한 조형물들이 잔디밭 곳곳에 놓여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추상적인 곡선 구조물, 나무를 깎아 만든 거대한 얼굴 형상, 색색의 유리판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설치 작품까지.
조금 더 달리니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옆에는 붓과 물감, 연필이 뒤섞여 있었다.
서하는 왠지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아 서둘러 이곳을 지나가기로 했다.
눈앞에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이제 시작했는지 화음이 엉망이었다. 갑자기 숨이 차오른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끽ㅡ, 꽝, 따앙ㅡ.
소리가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허공에서 부딪힌다.
무질서하게 들려오는 음들이 신경을 긁듯 귀를 괴롭혔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서하는 순간적으로 몸을 휘청였다. 발밑의 땅이 기울어지는 듯한 어지럼증.
‘큰일이다. 여기서?’
기숙사로 짐을 옮기느라 오늘 더키에게 시간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서하는 비틀거리며 계속 걸었다. 서둘러 저들과 멀어져야 했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안정을 취하면 금방 나아질 것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메트로놈처럼 정확하게 일정한 소리를 내는 울림.
딩ㅡ, 딩ㅡ.
건반이 하나씩 눌릴 때마다 규칙적인 박자가 맥박처럼 고동친다. 곧이어 화음이 더해지며 선율이 흘러나왔다.
‘무슨 곡이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클래식에 조예가 없던 서하는 곡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묵직하고 부드러운 화성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거세게 뛰던 심장 박동이 피아노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속도를 되찾아간다.
서하는 홀린 듯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건물은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음악실이었다. 안쪽에서 한 여학생이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고 있었다.
완벽한 화음과 아름답게 계산된 음의 이동이 마치 질서 있는 수열처럼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서하는 음악실 벽에 기대 앉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뇌리를 흔들던 불협화음의 불쾌한 흔적이 점차 사그라든다.
‘음악은..수학인가?’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건반의 리듬에 자신의 호흡을 맞췄다.
심장이 그 템포에 동조하듯 평온을 되찾았다.
곡이 끝나고 건반 위에 얹힌 손이 조용히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서하가 눈을 뜨니 연주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눈이 마주쳤다.
단정한 교복 차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방금 전까지 열정적인 연주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녀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너무 앳되어 보인다.
기껏해야 동갑?
“누구?”
눈싸움에 지쳤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안녕하세요. 유서하라고 합니다.”
서하의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 들어본 적 있다! 이과지? 그 수학 천재라는.”
“천재는 모르겠고 이과긴 해요. 그런데 누..그쪽은요?”
서하는 습관처럼 ‘누나’라고 부르려다 말을 주워 담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연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겨울. 나 몰라?”
겨울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하에게 되묻는다.
“우리 학교 사람이면 나를 모를 수가 없는데? 나는 네 이름 많이 들어봤어. 엄마가 하도 많이 말해서.”
어려 보이는 사람이 자꾸 ‘너, 너’하니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왜 반말이세요?”
“너 몇 살인데?”
“열세 살..요.”
겨울이 뻔뻔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생일은 몇 월인데?”
서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음?”
“나도 너랑 같은 나이야. 근데 너 진짜 차이코프스키 주니어 콩쿠르 우승자 한겨울 몰라?”
명망 있는 17세 이하 국제 콩쿠르에서 열세 살이 우승하는 일은 흔치 않다. 겨울은 여기서 우승한 뒤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그녀의 예쁜 외모도 한몫했지만.
영재고 입학도 물론 프리패스였다.
“몰라.”
“갑자기 반말이네.”
“네가 먼저 했으니까.”
“하여튼 공짜로 들었으니까 돈 내.”
겨울이 빚쟁이처럼 손바닥을 내밀었다.
“돈을 내야 해?”
“당연하지. 내 연주 듣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나 챔버홀에서 독주회도 했어.”
서하가 겨울의 눈을 슬쩍 피한다.
‘농담인가? 진담이겠지? 저렇게 진지해 보이는데.’
자신이 그녀의 연주를 몰래 들은 것은 사실이었다. 돈까지 내야 할 줄은 몰랐지만.
“얼..마? 지금은 러닝 나와서 없는데. 혹시 급식 식권도 받아?”
세상 진지해 보이는 서하의 얼굴에 겨울이 그만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하지만 서하는 웃을 수 없었다.
세련되어 보이는 겨울의 외모와 말투에 시골 소년인 서하는 주눅이 들었다. 평소에 형, 누나들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학생끼리 무슨 돈이야. 농담이야 농담.”
“아, 진짜?”
살았다는 듯 서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신 수학 숙제 좀 가르쳐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 바보 아니다?
중학교 수학도 월반하느라 다 모르는데 나 지금 고등수학 배운다고. 열세 살에! 이게 말이 돼?”
예과생도 수학은 배워야한다.
그녀가 서럽다는 듯 온몸으로 불만을 쏟아냈다.
‘어? 그럼 이거 혹시···.’
서하는 겨울의 연주를 들으며 심신이 안정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가 더키를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평소 다른 음악을 들을때 서하는 이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다.
“좋아. 대신 만날 때마다 너도 연주 하나씩 들려줘. 듣기 너무 좋았거든.”
서하의 제안에 겨울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다 안다는 듯 자책한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어. 나는 너무 바빠서 연애 같은 거 못하거든.”
서하는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서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겨울이 슬픈 표정을 짓는다.
“고백은 곤란해. 물론 내가 예쁜 건 사실이겠지만 우리 초면부터 이러진 말자.”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예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서하는 알 수 없었다.
서하가 울컥 하는 감정을 삼키며 고개를 젓는다.
“오해하지 마. 그런 얘기가 아니야.”
겨울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샐쭉하게 답한다.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한번 믿어보겠어.”
서하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내가 너에게 연주를 부탁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뭔데?”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나는 때때로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
그런데 아무래도 네 연주는 나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듣고 있으면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거든.”
겨울이 잠시 멍하니 서하를 바라보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서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처음 보는 남자애가 자신에게 반했다.'
이것은 이미 그녀 안에서 확정된 사실이었다. 따라서 겨울은 서하의 절규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좋아! 어차피 나도 수학 공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너는 내 숙제를 봐주고 나는 피아노 연주로 너를 안정시켜준다, 맞지?”
“정확해.”
겨울이 만족한 듯 웃더니 피아노 의자의 높이를 조정한다.
“그럼 오늘은 계약 기념으로 특별히 하나 더 들려줄게. 듣고 싶은 곡이 있니?”
서하의 음악 지식은 백과사전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클래식은 잘 몰라서. 잔잔한 곡도 있어?”
“마침 연습 중인 곡이 있는데 잘됐네.”
겨울이 건반을 세심하게 살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하는 그녀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진 것을 보았다.
쇼팽 녹턴 7번 Op. 27-1.
왼손이 천천히 저음을 두드리자 고요한 물결처럼 음이 번져나갔다.
겨울이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 음을 짚어나간다.
서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단하다.’
겨울의 연주에는 아우라가 있었다.
음의 흐름에 따라 그녀의 몸이 움직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온몸을 이용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쇼팽의 야상곡.
서하는 눈을 감았다.
음이 하나둘 차곡차곡 쌓이며 음악실을 가득 채운다. 질서 있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선율.
늘 긴장하며 억눌러야 했던 더키의 기척이 지금은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다.
‘이 애의 연주가 맘에 드니?’
더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래.’
겨울은 눈을 감은 채 연주를 이어나갔다.
음은 악보를 따르면서도 매 순간 미묘하게 달라졌다. 부드럽게 이어졌다가 갑자기 힘을 얻어 고조된다. 그리고 다시 잦아들어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흔들던 소음이 모두 사라졌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완전한 고요함이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됐니?”
눈을 떠보니 연주를 끝낸 겨울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감동했어.”
서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린 나이부터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했던 서하의 마음이 풀어진 반동이었다. 그 해방감은 어딘가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벅찬 느낌이었다.
“어..어? 울어?”
겨울이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서하의 시선을 피한다.
“서..설마 그렇게까지 나를?”
겨울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
그녀가 당황한 듯 손을 파닥이며 얼굴의 열을 식힌다.
“아..아무리 그래도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하지만 네가 정 그렇다면···.”
겨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쪽지를 쥐여주었다.
“수학 숙제, 도움이 필요한 거지? 언제든 연락해.”
서하가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냉정하게 몸을 돌려 떠났다.
“···.”
[유서하, 기숙사 40△호, 010-○○△△-▽▽□□]
겨울은 손에 있는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가지런한 글씨, 숫자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정갈한 필체.
겨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 * *
금요일 오후, 수업이 모두 끝난 시각, 서하는 평상복을 입고 기숙사에서 나왔다.
교정은 주말을 맞아 집에 갈 준비 중인 학생들로 붐볐다.
서하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길을 따라가자 거대한 규모의 도서관이 나왔다. 서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도서관 안은 조용했다.
그는 곧장 자료실에서 여러 권의 책을 고른 뒤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화성악, 기초 음악 이론, 대위법, 조성의 구조, 음악과 뇌, 음악 심리학.
서하는 음악과 심리에 대한 책들을 모조리 쓸어왔다.
미분을 발명한 라이프니츠는 말했다.
‘이유 없는 현상은 없다.’
서하도 그의 의견에 강력하게 동의하는 바였다.
겨울의 연주를 들을 때 자신이 느꼈던 심리적 안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현상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단순히 ‘연주가 좋았다’는 식의 막연한 답을 서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장을 넘기던 서하의 손이 한 구절에서 멈춘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음정이 수학적 비율로 설명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현대의 7음계는 사실상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이 설계한 수학적 비율 체계였다.
서하의 뛰어난 수학적 직관은 그것의 변형인 음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현의 길이가 절반이면 옥타브, 3:2는 완전 5도, 4:3은 완전 4도.
단순한 분수 비율이 곧 음정이 된다.
서하는 노트에 선을 긋고 수치를 적었다. 숫자들이 곡선을 이루며 서로 연결되자 피아노의 건반 배열과 겹쳐진다. 도에서 시작해 일정 비율로 쌓인 음들이 결국 하나의 체계를 완성했다.
이유가 어렴풋이 보였다.
자신의 무의식이 겨울의 연주에 담겨있는 수학적 비율과 조화를 인식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연주에서는 이를 느끼지 못했다.
이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화성의 비율이 자신의 뇌파나 신체 주기와 특별히 잘 맞아 떨어지는것일 수 있다.
서하는 책을 덮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이었다.
* * *
텅 빈 음악실에 두 사람이 앉아있다.
서하는 머리를 싸매고 있고 겨울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짱을 낀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보면대 위에는 악보 대신 수학책이 놓여있었는데, 겨울의 책은 한 번도 펴보지 않았는지 표지에 주름 하나 없었다.
“이건 중1 과정이야. 기본 원리만 알면 돼.”
“나 중학교 건너뛴 거 몰라?”
“사실 초등학교 6학년 때도 배워.”
종이에 쓰여있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형태의 다항식. 겨울의 상태를 알아챈 서하는 고등 수학서를 덮고 그녀가 모르는 부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겨울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돌린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원래는 다 알거든?”
눈은 딴 곳을 보고 있지만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사실 그녀는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애초에 머리가 좋지 않으면 음악에서도 큰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 어릴 때 잘했던 기억만 가지고 있던 겨울은 수학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한 서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 생각인데,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수학도 잘 할 확률이 높아. 지금 네가 모르는 건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보자.”
“···.”
숙제만 부탁하려 했는데 눈앞의 아이는 수학 자체를 해결해 주려 한다. 겨울은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못마땅했다. 그녀의 자존심에 모르는 것을 전부 들키는 것은 지나게 가혹한 형벌이었다.
서하는 기 싸움을 하기보다 그녀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한겨울.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 연주가 정말 절실하게 필요해. 그러니까 되도록 이 교환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네 수학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이 만남이 지속 될 수 없겠지? 그건 결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냐. 그러니까 솔직히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보는 게 어떨까?"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털어놓는 일은 서하에게도 처음이었다. 유독 그녀 앞에서만 이상하리만치 솔직해지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
갑작스러운 서하의 고백에 겨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내가 필요해?”
“응.”
“얼만큼?”
겨울이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묻는다.
“숨 쉬는 것만큼.”
겨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렇게 과장되게 말한다고 내가 속을 줄 알아?”
“과장이 아니야.”
“흥!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지.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쉽게 감동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녀가 무언가를 오해하는 것 같았지만 서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예과 특유의 감성을 어차피 그는 따라갈 수 없었으니.
서하의 설명은 쉽고 명쾌했다.
‘서은이를 가르치는 느낌이네?’
겨울은 배움에 있어 성실했고 이해도 빨랐다. 서하의 설명은 그녀의 머릿속의 얽힌 곳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그리고 겨울은 그날 하루에 지난 6년 동안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성장한 자신에게 만족한 듯 겨울이 웃으며 피아노 앞에 앉는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불렀다.
“혹시 녹음을 해도 될까?”
서하가 휴대폰을 꺼내며 묻는다.
연주가 꼭 라이브여야 하는지 검증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대답이 들려온다.
“절대 안 돼!
넌 음악 하는 애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녹음한다는 건 굉장히 큰 실례야. 기록은 내가 원할 때 원하는 형태로만 남기고 싶거든.”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학생이라 해도 그녀는 이미 어엿한 피아니스트였으니까.
“하..하지만 네가 정말 원한다면 나중에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해 볼게.”
그녀가 고개를 피하듯 돌리더니 호흡을 가다듬는다.
겨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서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움직임과 음의 흐름을 따라간다.
‘언제까지 겨울에게 의존 할 순 없다.’
서하는 스스로 활로를 찾고 싶었다. 그러려면 먼저 알아야 하는 법.
왼손이 먼저 리듬을 만든다.
그 위에 오른손이 얹히며 화성이 쌓인다. 그녀가 치는 강약은 규칙적이지 않고 미묘한 흔들림이 있다. 그런데 서하는 그 불규칙성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서하가 노트를 꺼내 적기 시작한다.
화음이 바뀌는 지점, 페달이 눌리는 순간, 템포가 느려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구간. 모든 것이 수학적 변수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현할 수 없을지 고민해 보았다.
그날 밤, 서하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정확히는 더키가 그것을 원했다.
‘이 시간에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은 없는데.’
서하가 고민 끝에 노트를 편다.
‘더키, 원하는 음을 적어 봐. 나중에 배워서 연주해 보자.’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더키가 속삭이듯 떠오른 음들이 하나씩 기호로 옮겨졌다.
한쪽에 음을 적으면 다른 쪽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화성이 따라온다. 서하는 이것이 마치 함수와 그래프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적다 보니 더키가 만족한 듯 잠잠하다.
노트에는 음악인지 수학인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뒤섞여 있었다.
“제목을 뭐라고 지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서하가 페이지 상단에 무언가를 휘갈겨 적는다.
[Theme of Duckie]
새벽 5시 40분, 태진은 전자렌지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누군가 기숙사에서 간식을 돌려먹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휴, 냄새나게···.”
태진이 타월을 챙겨 터벅터벅 복도로 걸어 나간다.
어느덧 입학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학생들이 이른 아침부터 좀비처럼 기숙사 복도를 배회한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는지 다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목에는 타월을 걸고, 각자 세면 백을 든 채 샤워실 앞에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다들 예민하기에 최대한 트러블이 생기지 않게 태진은 조심하고 있었다.
[샤워 5분 컷!]
누군가 A4 지에 붉은 글씨로 써서 붙여놓은 문구,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저것보다 더 빨리 마치고 나온다. 요즘은 샤워 할 시간도 아까우니까.
샤워를 끝내자마자 태진은 노트북을 확인했다. 이 학교에는 학생들을 위한 인트라넷이 깔려있는데, 특히 시험 기간에는 요긴하게 쓰였다.
[오늘도 오리좌께서 다녀가셨다]
-수학, 물리, 화학 문제 다 풀어주시고 감. 진짜 누군지 몰라?
└3학년 선배 아닐까?
└가능성 있음. 대학 정해졌으면 한가할 수도 있지.
└아닐걸? 풀이 스타일이 완전 달라. 문제마다 딱 세줄 쓰셨다.
└답은 맞고?
└ㅇㅇ 선생님께 여쭤보니 완벽하다고 함.
└작년까지 이런 사람 없었다잖아. 선배 아님.
└우린 그분이 누군지 알지만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말하지 않겠음.
└만약 발설해서 그분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가 널 찾을 것이다.
‘오리좌라니···.’
학생회가 운영하는 익명 게시판은 글 단위로 아이콘을 선택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아이콘을 직접 디자인할 수도 있는데, 이 수상한 인물은 못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리가 시그니처였다.
처음엔 사소했다.
누군가 새벽 1시에 수학 문제 사진을 한 장 올렸는데 3분 만에 풀이가 달렸다. 그때부터 질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지없이 몇 분 간격으로 풀이와 정답이 달린다.
학생들은 모두 다 오리좌의 은총을 칭송했다.
모르는 문제를 익명 게시판에 올려두고 잠시 눈만 붙이면 알림이 울린다. 본래라면 선생님을 찾아가거나 아는 선배에게 물어봐야 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오리좌로 인해 더 많은 공부시간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오리좌님, 물리 충돌에서 에너지 손실은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공식이 자꾸 꼬입니다(도식 첨부)]
└v_cm 고정. 질량중심 좌표로 보면 충돌은 대칭 반사. 따라서 손실률 = 1−e²
└압도적 감사. 오리좌님께 피타고라스와 뉴턴의 은총이 있기를.
태진은 오리좌의 풀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설명이 전보다 친절해졌다.
한 줄로 달린 풀이에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오리좌는 때때로 풀이에 설명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최대 3줄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다른 반은 모르겠지만 태진이 있는 1반 만큼은 오리좌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다.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일 뿐.
“근데 얘는 수학만 잘하는지 알았더니 물리, 화학도 쩌네.”
태진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천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 * *
2주 전, 서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약속 장소인 정문 앞 카페에 나가보니 그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선생님!”
우현이 얼굴을 가리려는 듯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자리에 앉아있다. 옆에는 커다란 상자가 놓여있었다.
“선생은 무슨···. 가르친 것도 없는데.”
우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오랜만에 보았는데도 서하는 예전 그대로였다. 키가 자랐고 촌티가 좀 빠졌다. 그래도 변함없이 예의 바르고 순수한 모습이었다.
“받아.”
우현이 테이블 위로 검은색 상자를 툭 내민다.
“이렇게 비싼 건 못 받아요.”
서하가 박스의 로고를 보더니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건방 떨지 마. 이런 건 나한테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집어 오는 거랑 똑같아. 그리고ㅡ.”
우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린다.
“너를 영재고에 보내라고 제안한 게 나잖아. 이 정도 애프터 서비스는 해야지.”
“그래도···.”
서하가 주저한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노트북을 하나 부탁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비싼걸 살 생각은 없었지만···.
이걸 받는 것도 부담이지만 서하는 혹시 부모님이 서운해하시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2학기부터 정보 수업 들어간다며? IDE(Integrated Development Environment * 통합 개발 환경) 깔고 데이터 다루고 코딩 테스트 하려면 노트북은 필수야. 무기도 없이 전장에 나갈래?”
우현이 말도 없이 박스의 봉인 스티커를 찢어버린다.
이제는 서하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나중에 꼭 갚을게요.”
“그래라. 네가 나보다 많이 벌게 되면.”
서하가 한숨을 쉰다.
우현은 작년 대한민국 강사 수입 1위를 찍었다. 새로 런칭한 강의가 대박이 나며 팔린 책만 수십만 부. 그는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 이상이었다.
“감사해요. 진짜로 잘 쓸게요.”
서하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우현은 그날 서하에게 근처에서 제일 비싼 한우를 사서 먹인 뒤 서울로 돌아갔다.
박스를 들고 기숙사를 올라가는데 같은 반인 기범이 이 모습을 보았다.
“얘들아! 서하 노트북 샀다!”
““뭐?””
학기 초, 시크하던 그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서하의 고성능 노트북에 눈이 돌아갔다.
“서하야, 이런 건 형들한테 맡겨 둬.”
태진이 무거운 상자를 대신 받아준다. 그리고 다 함께 서하의 방으로 몰려갔다.
한 달을 넘게 부대끼다 보니 같은 반 학생들은 서하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모두가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서하에게는 악의가 없다.
그가 잘난 척을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문제 풀이 따위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설명해 준다. 그래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진심으로 미안해한다.
축구하는 날은 언제나 장비를 풀세팅하고 미리 필드에 나가 몸을 푼다. 그들은 서하가 이날을 꽤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에 익숙지 않은 서하를 위해 그들이 초스피드로 환경을 세팅한다. 그리고 내부망 사용법과 어떤 프로그램이 수업에 유용한지 한참을 설명해 주었다.
“형들, 고마워요.”
“별거 아냐.”
학생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
서하가 느끼기에 자신은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만 받고 있다. 가능하다면 받은 것에 알파를 더해 모두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 * *
노트북을 세팅한 후 서하는 내부망 익명 게시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런 곳이 있었네?”
여기에는 학교에 관한 온갖 자잘한 정보들이 올라온다.
[샤워실 B 구역 3번, 수압 제일 셈. 대신 온수 늦음(20초)]
[건조기 2번, 타이머 고장]
[예과 음악실 A, 저녁에 스터디 있는 듯]
[사감 순찰 루트 공개함]
[도서관 앞 치즈 고양이 임신 중인 듯?]
[학교 앞 카페에서 신우현 본 썰]
겨울과의 재능 교환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된 서하는 머리를 쓰는 데 있어 부담을 덜게 되었다. 이제는 반동을 걱정하지 않고 장시간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아! 시험공부는 해야지.’
수학은 따로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과목은 사정이 다르다.
중학 과정을 스킵한 서하는 지식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백과사전만으로 이것들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서하가 소설을 읽듯이 전공 서적을 독파하기 시작한다. 물리, 화학, 생물은 재미있었다. 흥미가 없어서 그런지 국어와 영어는 읽는 것이 꽤 힘들었다. 그래도 영어를 미리 공부해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띠링ㅡ.
“응?”
익명 게시판에 문제가 올라왔다. 수학 문제였다.
서하는 보자마자 답을 달아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번, 기본서만 보았지만 화학과 물리에서도 서하가 모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ㅡ.
연속해서 알림이 울린다.
“헐, 대박!”
마침 문제 풀이가 필요했다.
익명 게시판은 날마다 문제들로 넘쳐났다. 족보 정리, 변형 기출, 누가 만든 것 같은 자작 문제까지. 유형은 제각각이었지만 본인이 풀지 못해 올리는 질문인 만큼 쉬운 난도는 아니었다.
서하는 그것들을 풀며 전공서로 부족했던 실전 감각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
시험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져 오자 저격 질문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오리좌님, 도플러 효과에서 음파랑 빛이 다르게 계산되는 이유가 뭐죠?]
└소리는 매질 타고 가고 빛은 진공에서 바로 뛰니까 공식이 갈라짐.
정체를 들키면 부끄러우니 컨셉은 유지하기로 했다.
[오리좌님, 화학 평형상수 문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감이 안 와요.]
└농도 대신 활동도(activity)로 치환하자. 이상화(idealization) 가정이 깨지는 순간부터 쉽게 풀 수 있음.
서하는 최대한 친절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었다.
어느새 익게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가 되어버렸다.
서하도 질문에 대답 해주며 얻는 것이 많았다. 가만있었으면 볼 수 없었을 수많은 유형의 문제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가끔은 이상한 질문이 날아오기도 했다.
[오리좌님, 여자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서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여자 친구가 항상 있었다는 성지훈을 떠올렸다.
└키랑 얼굴?
└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뼈 때리네.
└그분은 항상 진실만을 말씀하신다.
둥ㅡ, 두웅ㅡ.
음악실에 와서 피아노를 두드려본다. 서하는 피아노 교본과 음악 이론을 읽으며 암호처럼 어지럽던 더키의 곡을 악보로 옮겨보았다. 그랬더니 더키가 발전된 이론만큼 곡을 바꾸고 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곡을 쓰고 연주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무심코 도서관에 들렀더니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아! 시험 기간.’
피아노 교본을 반납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옆자리에 있는 무리에게 눈길이 닿았다. 그들이 프린트를 꺼내놓더니 속삭인다.
「오리좌 풀이 모음」
“야, 이거 진짜 정리 잘됐다. 공식 옆에 딱딱 예시 붙여준 거 봐.”
“3반 애가 오리좌 팬이라잖아. 그동안 답변했던 거 다 모아서 철해놓은 거래.”
서하는 눈을 돌려보았다.
도서관 여기저기에서 ‘오리좌 풀이 모음’을 보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A4 용지의 가장자리가 지저분하게 닳아있었다.
그날 밤, 익명 게시판에 질문이 아닌 글이 올라왔다.
[오리좌, 고마워]
-사실 나는 여기 입학 해서 꽤 힘들었어. 아는 사람도 없고, 모르는 거 물어보기도 힘들고. 근데 오리좌가 다 대답해 주니까 꼭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좋았어. 오리좌가 나 따위보다 훨씬 똑똑하겠지만 그래도 시험 잘 보길 바랄게.
└나도 오리좌 없었으면 멘탈 터졌을 듯.
└누군지는 몰라도 나도 진짜 고마워.
└나도 감사 인사 남기고 싶었음. 오리좌 고마워!
└근데, 오리좌가 1학년이면 1등은 이미 정해진 거 아니냐ㅋㅋㅋ
└감히 범접이 안된다.
└오리좌 풀이 모음은 저작권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냐?
글 아래 수십 개의 감사 인사가 달렸다.
화면을 바라보던 서하의 시야가 흐려진다.
그는 노트북을 덮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새벽 5시 20분, 태진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아, 비까지 오냐···. 최고네.”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타월과 세면 백을 챙겨 복도로 나간다. 밤을 샜는지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온 학생들이 휘척휘척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오! 서하도 나와 있네.”
평소 기상 시간이 일정한 서하마저 피곤한 표정이다.
서하가 휘청거리는 좀비들에게 힘내라는 듯 주먹을 내밀자 다들 가볍게 피스트 범프(Fist Bump * 주먹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태진도 서하와 가볍게 주먹을 부딪히고 샤워실로 걸어갔다.
[샤워 3분 컷!]
경고문은 여전히 그대로 붙어있었지만 누가 마커로 ‘5’ 에 엑스자를 친 뒤 ‘3’을 적어놨다. 그 덕분인지 샤워실 앞 줄이 어제보다 짧아진 느낌이다.
“야, 샴푸 내 거 쓰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내가 그걸 왜 써?”
“근데 왜 양이 줄은 것 같냐?”
“증발했나 보지.”
농담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샤워하는 내내 태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끊임없이 되뇌었다.
‘버텨라, 버텨야 한다.’
식당에 내려가 보니 메뉴가 시험 모드로 바뀌어있었다.
단백질이 많고 소화가 잘되는 닭죽, 미역국, 바나나, 삶은 달걀, 샐러드가 나왔다. 태진은 식판에 음식을 받은 뒤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잘 잤냐?”
“그랬겠냐?”
친구와 정겨운 인사를 주고받고 식사를 시작한다.
태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같은 모습이었다. 한 손으로 숟가락질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프린트를 쥐고 있다. 모두가 같은 자료를 읽고 있었다.
「오리좌 풀이 모음(최신판 V.2.4)」
옆에서 닭죽을 먹던 서하가 학우들의 프린트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 프린트가 그렇게 도움이 되나요? 저는 아무래도 시간 낭비일 것 같아 걱정인데요.”
그 순간, 프린트를 읽던 학생들의 눈이 일제히 서하를 향했다.
옆 반 학생이 거칠게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오리좌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맞아맞아! 아무리 서하 너라도 우리 오리좌님께는 안되지. 그분은 이미 인간을 초월하셨거든.”
“오리좌가 아니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걸? 범위가 너무 넓잖아.”
학생들의 거센 반응에 서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서하를 보며 태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저거 과목별로 정리한 것도 있어.
근데 읽어보니까 알겠더라. 저거 완전히 고난도 기출 문제집이야. 그것도 우리들이 어려워할 만한 것들만 다 모아놓은 거잖아. 그러니 도움이 안 되겠냐?”
“맞아, 최종 정리하기에 이것만 한 게 없다니까? 뭘 모르는지도 금방 파악할 수 있고.”
“난 지금 이거 없으면 시험 준비 못해. 작년 족보는 올해랑 범위가 다르더라.”
학생들의 설명에 서하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밥을 먹더니 식판을 들고 일어난다.
떠나는 서하에게 누군가 외쳤다.
“오늘 2.5 업데이트 있다니까 서하 너도 꼭 받아봐!”
서하는 어쩐지 들고 있는 식판이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업데이트?’
그저 질문에 답했을 뿐인데 어느새 프린트로 찍혀 버전까지 관리되고 있다.
기숙사에 들어와 노트북을 켠다.
인트라넷에 접속해 보니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져있었다.
[오리좌 풀이 모음 화학 편 V.2.1]
-과목별로 나눠달라는 요청이 많아 올립니다. 단원별로도 정리 해놨어요. 오타 신고는 아래 메일로 해주세요. 저보고 공부 안 하냐는 댓글이 있던데, 이거 편집하다 보면 자동으로 복습 됩니다.
그리고 무단 업데이트 금지합니다. 하려면 공식 버전 쓰지 말고 본인 이름 적으세요. 버전이 난립하면 정리가 어렵습니다.
└편집자님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자동 복습 ㄹㅇ. 나도 읽다 보니 다 외워짐.
└이제 화학까지 오리좌의 은총이 ㅠㅠ
└V.2.5는 수학, 물리 동시 업데이트 인가요?
└국어, 영어는 없나요?
└어허, 무엄하다! 오리좌께서는 숫자와 기호가 있어야만 나타나시거늘.
영재고의 이과 교재들은 대부분 대학 전공서들이다.
따라서 시중에 풀린 문제집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이 기출이나 족보 같은 정리자료에 목을 맬 수 밖에.
‘오리좌 풀이 모음’은 그들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처럼 소중한 자료였다.
서하는 앞으로 답을 달 때는 조금 더 책임감 있는 풀이를 적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책 위로 코피가 떨어진다.
수정은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듯 티슈를 집어 코를 막을 뿐.
감고 제대로 말리지 못한 머리는 고무줄로 대충 묶었다.
책상 위에는 프린트와 노트, 계산기와 펜, 그리고 빈 커피 캔과 에너지 드링크의 잔해들이 무너진 성처럼 쌓여있었다.
“이 짓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IMO 준비 때문에 조기졸업을 못 한 것이 한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빼내고 손을 씻는다. 거울을 보니 낯선 얼굴이 있었다.
눈 밑은 시커멓게 내려앉았고, 입술은 바싹 말라 터져있다.
“웬 거지가 여기 있네.”
평소 예쁘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었었는데 거울 속 모습은 꼭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수정이 피식 웃으며 고무줄을 빼낸 뒤 손에 물을 묻혀 삐져나온 머리를 정리한다. 이곳에서 전교 1등을 유지하는 일은 그녀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정은 휴지를 돌돌 말아 다시 코를 틀어 막고 손을 씻었다.
피곤함, 자괴감, 프라이드 그리고 오기.
이런 상황에서도 수정을 지탱하고 있는 감정들이었다.
‘그 아이는 잘 지내려나?’
문득 서하가 생각났다.
어린 나이에 영재학교에 들어와 자신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고 있는 소년.
그 아이도 필시 외롭고 힘들 것이다. 이 학교는 1등에게 행복한 학교생활을 허락할 만큼 만만하지 않으니까.
수정은 이곳에 처음 입학했을 때를 떠올렸다.
믿을 친구도, 의지할 어른도 없었다. 그저 한결같이 버텨내야만 했던 시간. 이제는 면역이 돼서 괜찮지만 당시에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걔도 나랑 똑같겠지.”
생각이 그 지점에 다다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수정은 코에 꽂아둔 휴지를 새 걸로 교체했다. 거울 앞에서 손바닥으로 머리를 눌러 가라 앉히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 정도만 해도 봐 줄 만한 모습이 되었다.
“그래, 그냥 가서 밥이나 먹자고 하자.”
수정이 문을 열고 열람실 복도를 빠져나간다.
계단을 내려가니 어느새 비가 그쳐있었다. 비 냄새, 젖은 흙냄새가 섞여 기분 좋은 오후였다.
걸음을 옮기는데 멀리 운동장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즐거운지 남자애들 여럿이서 깔깔거리며 함께 걸어온다.
“어?”
수정이 눈을 비빈다.
서하가 그곳에 있었다. 학생들에 둘러싸인 채.
같은 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서하에게 툭툭 장난을 건다. 그러자 서하가 유쾌하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뭐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처럼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수정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서하가 고개를 돌리다 수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금세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수정 누나!”
반가워하는 서하와 달리 옆에 있던 무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야야, 마왕 선배다.”
“왜 마왕이야?”
“저 누나, 내내 전교 1등이었잖아. 형들이 용사 파티 결성해서 토벌하려고 했는데 계속 실패했대.”
수군거림을 들은 수정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나 아니다 이것들아! 너희랑 동갑이야!’
여왕은커녕 마녀조차 아니다.
같은 학년 남자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 어느새 이렇게 퍼져있었다.
“형들, 먼저 가세요.”
수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서하가 일행을 먼저 보냈다.
“누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어느새 서하가 다가와 수정의 안색을 살핀다.
“아니야,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수정은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혹시 간식 먹을래요?”
“응?”
자신이 하려던 말이었는데···.
수정이 멍하니 있자 서하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는다. 수정은 못 이기는 척 서하에게 이끌려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서하가 따뜻한 코코아와 쿠키를 가져왔다.
“드세요. 서은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인데, 먹으면 행복해진대요.”
하지만 수정은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너..너..너, 어떻게 친구가 있을 수 있어?”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수정의 얼굴이 지독한 배신을 당한 듯 상처받은 표정이다.
“네? 누나도 친구 많지 않아요?”
태연하게 상처 되는 말을 내뱉는다. 꽉 쥔 수정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럴 수가···. 같은 길을 걷는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수정이 쿠키를 집어 거칠게 입으로 깨문다.
코코아까지 마시니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런 거 없어. 필요도 없고. 너도 그런 줄 알았지.”
친구라고 사귀어봐야 뒤에서 질투나 할 뿐이다. 수정은 진작부터 이를 깨달았다.
냉정한 수정의 말에 서하가 금세 시무룩해진다.
“저는 누나도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요.”
비 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수정은 죄책감을 느꼈다.
‘시험 때라 정신이 나갔나? 애를 데리고 나도 참.’
“아..아니, 내 말은 친구 없이도 혼자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었어. 네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고.”
서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짜요? 저도 누나 친구 맞는 거죠?”
“응.”
‘세상 참 불공평하네.’
자신이 마왕이라면 눈앞의 소년은 대마왕이나 마신쯤 되는 존재일 텐데 어떻게 다른 이들과 잘 지낼 수 있는 것일까?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수정은 서하 앞에서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이 아이는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먼 존재일 테니까.
“서하 너 대학은 어디로 갈 거야? 혹시 미국?”
“아니요, 저는 카이스트로 갈 것 같아요.”
“흐음. 그렇구나.”
수정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가 남아있던 코코아를 모두 마신다.
쿠키까지 먹고 나니 다시 공부 할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내가 친구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
악의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일 텐데, 그런 오해를 받은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야 누나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친절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요.”
수정은 언제나 서하를 걱정해 주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미지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너 밖에 없어,”
대답하는 수정의 목이 메인다.
마왕이라도 마신 앞에서는 귀여운 피조물일 뿐이었다.
* * *
익명 게시판,
[시험 주간 안내]
-1교시 09:00 정각 시작. 20분 전 입장 할 것.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시험 중에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면 안 됩니다.
-계산기, 휴대폰, 모든 전자기기 소지 불가합니다.
[오리좌 풀이 모음 V.3.0 파이널 릴리즈]
-편집자입니다. 드디어 최종판이 배포됩니다.
-수학, 물리, 화학 통합 + 오리좌 특별 해설 추가.
-오리좌는 학생이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다음 시험에도 무사히 자료를 받고 싶다면 신성 모독을 범하지 마세요.
시험 5분 전,
감독관 두 명이 동시에 시계를 올려다본다.
“입실 마감합니다. 전자기기 적발되면 영점 처리되니 모두 전원을 끈 뒤에 가방에 넣으세요.”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 가볍게 몸을 푼다.
의자 끌리는 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곧 침묵이 찾아왔다.
시험지가 배부된다.
벽시계의 초침이 12를 지나자 감독관의 입이 열었다.
“시작.”
스르륵.
종이가 일제히 뒤집혔다.
서하는 수학과 과학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나머지 과목이 걱정이었다. 중학 과정을 건너뛰다 보니 국어와 사회가 특히 어려웠다. 영재고에서는 문과 과목이라고 하더라도 단순 암기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서하가 내린 결론은 심플했다.
전부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
방법으로는 마인드맵(Mind map)을 활용하기로 했다.
서하는 교과서를 전부 암기했다.
평소 수업을 열심히 들었기에 큰 줄기는 이미 머릿속에 잡혀있는 상황. 여기에 참고 자료와 노트필기를 암기하며 잔가지를 쳐 나간다.
마인드맵이 그 효율성에 비해 널리 쓰이지 않는 이유는 물리적 지도를 그리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하는 맵을 직접 그릴 필요가 없었다. 단지 머릿속에 연상함으로써 맵이 체계를 가지고 뻗어나간다.
이것은 서하의 머리가 특별히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백과사전을 보며 지식 지도를 만들었던 경험이 이러한 퍼포먼스를 가능케 했다.
1교시 국어,
시험지를 펼쳐 든 순간 서하는 곧장 지문에 몰입했다.
긴 글, 난해한 어휘, 꼬여있는 문장.
다른 학생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서하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머릿속에서 세계수처럼 거대한 나무가 줄기를 펼친다.
첫 문장의 ‘철학적 담론’에서 줄기가 한번 갈라지고 그 아래 여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가지로 분화된다. 서하의 의식이 빠른 속도로 줄기를 이동하며 필요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하가 생각하는 효율적인 공부 방법, 즉 사고의 구조화였다.
‘2번.’
무난히 답을 골랐다.
문제를 읽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정보의 위치가 특정된다.
‘3번 문제는 화자의 내적 갈등, 오른쪽 두 번째 가지 존재론과 연결.’
연필이 종이를 시원하게 가른다.
서하는 지문을 두 번 읽을 필요가 없었다. 구조 속에 한번 자리 잡은 정보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다른 학생들이 위아래를 오가며 다시 확인해야 할 부분도 서하에게는 이미 ‘기록된 정보’였다.
은유와 상징, 감정과 뉘앙스를 요구하는 문학조차 서하의 논리 앞에서 가면을 벗었다.
굵은 줄기는 작품의 배경, 거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는 화자의 감정과 반복되는 상징이었다. 아무리 문장이 은유로 덮여있더라도 서하의 머릿속 마인드맵이 이를 구조화된 언어로 분류하고 해석해 버린다.
'좋아! 다 맞을 수 있겠다.'
마인드맵은 체계적 분류를 좋아하는 서하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너무 자신감이 넘쳤을까?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가던 서하의 손이 갑자기 멈춘다.
‘어? 처음 보는 소설이다.’
범위 외의 지문이 출제되었다.
서하는 진땀을 흘리며 이를 읽어나갔다. 기존 데이터에 새 지문을 매칭시키려 노력해 보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처음 보는 문학 작품의 모호함을 해체하는 데는 더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하는 이러한 문제를 잘 기억해 두기로 했다.
2교시 수학 Ⅰ,Ⅱ.
시험지가 배부되자 교실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악명 높은 영재고의 수학 시험이다.
여기저기서 ‘끄응’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서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고교 스타일의 문제 풀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의 서하는 달랐다.
익명 게시판에서 수많은 질문들에 답하며 그는 교사들이 어떤 풀이를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임의의 2n+1개의 정수가 주어질 때, 이들 중 어떤 비어 있지 않은 부분집합의 합은 n으로 나누어떨어짐을 증명하라.]
올림피아드 수준의 문제였지만 서하는 이것을 암산으로도 풀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했던 건 딱 두 단계의 사고 프로세스,
하지만 서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펜을 들어 차분히 답안을 적어나간다.
총 5단계를 거치는 친절한 증명.
「···따라서 임의의 2n + 1개의 중수 중 항상 n으로 나누어떨어지는 부분집합이 존재한다.」
사실상 굉장히 간결한 증명이었지만 서하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답안은 논란의 여지없이 감점 당하지 않는 범위였다.
서하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내 방식만 고집하다가 그분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과거의 수학자들은 대부분 귀족이거나 유복한 상인 출신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학문을 할 수 있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천민 계급인 벽돌공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아들이 태어난 날 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훗날 가우스는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자신의 생일을 계산해 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조차 두각을 드러냈고 역사에 남을 대석학이 되었다.
서하는 그보다 훨씬 환경이 좋은 자신이 단지 게으르다는 이유로 시험을 망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 * *
태진이 문제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듣던 대로 어렵네.’
작년 1학년 전체 평균은 47점,
수학은 그보다도 낮다.
태진은 각 10점마다 감별기 역할을 하는 킬러 문항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처음 보는 건 아냐.’
‘오리좌 문제 풀이’를 통해 수많은 유형을 겪어보았다. 이것은 서하가 특별히 더 길게 풀이를 적었던 문제.
태진은 어떻게 답을 찾아나가야 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국에서 0.1%의 수재들만 모인 영재고.
학생들 간의 표준편차는 놀라울 만큼 좁다. 단지 한 문제를 틀리는 것으로 등수가 수십 개나 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우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파멸적으로 어려웠지만 손도 못 댈 정도는 아니었다.
문득 부모님이 자신의 얘기를 하며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태진은 정말로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었다.
태진이 고개를 젓는다.
‘잡생각 금지.’
이 중에 목표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능 없는 학생도 이곳에는 없다.
쓴 웃음이 나왔다.
마치 투기장 같지 않은가?
더 나은 재능을 가진 이가 위로 올라간다.
어차피 노력은 모두가 하니까.
태진은 문득 생각했다.
학기 초 삭막했던 학교의 분위기는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중에 이질적인 존재가 한 명 있었다.
밤새도록 모든 이들의 질문을 받아주던 학생, 오리좌의 존재가 학생들이 서로를 경쟁자에서 협력자로 인식하도록 바꾸어놓았다.
태진은 서하에게 ‘야! 너는 존재 자체가 반칙 아니냐?’라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 * *
“그만!”
감독관이 시험 종료를 알린다.
“끝났다.”
기범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죽은 듯 멈춰있다.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환호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지난 삼 일간 집중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수면에 할애했기 때문이다.
“가자.”
어느새 다가온 태진이 기범의 팔을 잡아 세운다.
기범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나도.”
힘든 일을 함께 해서인지 전우애가 생겨났다.
“서하야, 가자!”
“네, 어서 밥 먹으러 가요.”
교실 문을 나서자 복도에는 이미 다른 반 학생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누군가는 해방감에 두 팔을 번쩍 들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복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있다.
몸은 힘들었지만 학생들의 얼굴은 더없이 밝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에 올라간 서하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 *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뒤, 며칠간의 정정 기간을 거쳐 성적표가 배부되었다.
‘다행이다.’
서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벽에 전체 석차를 붙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유서하, 너 몇 점이야?”
때때로 기범이나 태진같은 축구팀 멤버들이 찾아와 집요하게 점수를 캐물었지만, 서하는 무사히 자신의 성적을 유출하지 않고 지켜 낼 수 있었다.
익명 게시판에 1학년 1등은 무조건 오리좌라는 루머가 퍼져있었기 때문에 서하는 필사적이었다.
오후 수업 전,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삐ㅡ’ 하는 잡음이 들리더니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전교생은 즉시 제1 세미나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전교생은···.
학생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세미나실? 갑자기 왜?”
“그러게, 우리 학교에 조회 같은 거 없지 않나?”
“어디서 교수님이라도 오셨나? 특강일지도 모르겠다.”
제1 세미나실은 대강의실로 연구 발표나 특강을 위한 장소였다.
1학년들이 당황한 얼굴로 눈치를 보며 이동한다. 곧이어 복도에 2,3학년들이 합류했다.
“이번에도 임수정?”
“아닐걸? 토벌 하겠다고 벼르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걔도 엄청 독해. 절대 안 내놓던데?”
“그래도 화학은 좀 약하잖아.”
여러 번 있던 일인 듯 선배들이 담담하게 계단을 내려간다.
세미나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단상에 교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앞으로 갈수록 바닥이 낮아지는 형태라서 내부 전체가 훤히 보였다.
“야, 무슨 일 있나 봐.”
“행사하나?”
학생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학년별로 정해진 구역으로 이동해 자리를 채운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식이 시작되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지금부터 성적 우수자 표창을 시작하겠습니다.
서하는 순간 놀라 설명해 줄 사람을 찾았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수정이 그런 서하를 보며 ‘몰랐지?’ 하고 묻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사회자인 교감이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학교는 석차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목별, 그리고 전체 성적 최우수자를 발표하는 것은 그들의 노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자,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는 동기부여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교감이 한 장의 종이를 펼쳐 들었다.
-3학년 수학 최우수자, 3학년 2반 임수정 학생!
박수가 터져 나온다.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단상으로 걸어 나간다.
이후로도 수정은 세 번을 더 불려 나갔다.
수학, 물리, 지구과학 그리고 전체 성적 최우수자였기 때문이다. 수정의 손에는 어느새 몇 장의 상장이 들려있었다.
2학년의 차례가 끝나자 1학년이 몰려있는 구역에 긴장감이 감돈다.
교감이 명단을 꺼내 살펴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1학년은 한꺼번에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우리만?”
“무슨 일인데?”
학생들이 소곤거린다.
-국어, 영어, 수학, 화학, 생물, 지구과학, 물리, 사회, 그리고 대학 선이수 프로그램까지 모든 과목에서 1학년 1반 유서하 학생이 최우수를 차지했습니다.
표준 편차 통계를 낼 때 이 학생의 성적을 제외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였습니다.
-유서하 학생? 어서 나오세요!
얼굴이 빨개진 서하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상으로 걸어 나간다.
짝짝짝!
박수가 서서히 퍼져나가더니 곧 세미나실을 가득 채웠다.
교장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표정으로 서하에게 상장을 수여한다.
태진은 옆에 있는 3학년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쟤네는 앞으로 어쩌냐? 우린 토벌 시도라도 해봤지.”
“용사 파티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스터디도 많이 활성화되고.”
“저긴 그냥 우주 멸망수준 아니냐?”
“세계 1위잖아. 저 정도는 해 줘야지. 임수정도 졌다는데.”
-기념 촬영이 있으니 모여주세요.
성적 우수자들이 모두 단상 위에 섰다.
다른 학년은 여러 명이 올라왔지만 1학년은 단 한 명이었다.
“축하합니다!”
식이 끝나자 서하는 서둘러 단상을 내려가 출구를 찾았다.
‘빨리 나가야···.’
그러나 기범이 뒤에서 서하를 강하게 붙잡는다.
“어딜 가려고!”
서하는 양 팔을 봉인 당해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그러자 같은 반 학생들이 서하를 포위한다.
“뒤져.”
태진의 한마디에 축구팀 멤버들이 서하의 교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주머니에 넣어둔 성적표가 발각되었다.
“찾았다.”
기범이 얼른 그것을 받더니 펴본다.
“야! 나도나도!”
“같이 보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켰다.
“세상에.”
“이거 뭐야. 몰라, 나 무서워.”
“1등일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섯 과목이나 되는 수학은 모두 100점, 과학 네 과목도 모두 100점, 국어 91, 영어 94, 사회 96점, 심지어 대학 선이수 프로그램마저 A+였다.
이 시험의 전체 평균은 48점,
서하는 이날 전교생 모두의 경쟁상대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익명 게시판,
[신성 모독을 고백합니다.]
-사실 나는 시험 보기 전에 내가 오리좌보다 성적이 높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거든. 내심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그런데 결과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죄책감 없이 노력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니, 그런 깜찍한 생각을ㅋㅋㅋㅋ
└누구나 꿈은 꿀 수 있잖아. 여기 오기 전에 다들 1등만 해보지 않았어?
└ㅇㅈ 나도 내가 이 점수 받을 줄은 몰랐지.
└수학, 과학 문제 진짜 사악하던데. 이걸 다 맞춘 건 뭔가 비현실적이었어.
└설마설마 했는데 오리좌의 정체가···. 읍읍!
└다들 입조심해라. 그분께서는 부끄러움이 많으시다.
성적이 강제 공개된 이후 서하의 생활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안녕, 서하야!”
옆 반 학생이 지나가다 서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안녕하세요.”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서하에게 먼저 인사를 해주는 사람들이 늘었다. 대개는 1학년 다른 반 학생이었고, 때로는 알지 못하는 선배들이기도 했다. 서하는 1학년 학생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선배들의 이름까지 전부 외워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 밖에 수업 시간에 전보다 훨씬 자주 이름이 불린다던가, 교내 신문부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지만 서하는 들뜨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평일 오후, 서하가 평소처럼 도서관으로 향한다.
시험이 끝났다고는 해도 이 학교의 도서관은 늘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얼마 전부터 그가 좋아하는 3층 창가 자리는 신기하게 늘 비어있었다.
전 과목 최우수자에 대한 학생들 나름의 예우였지만 서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행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를 펼친다. 그리고 자료실에 가서 오늘 공부해야 할 책을 찾아본다.
‘있다!’
서하는 도서관의 유명한 악성 고객이다.
필요한 책이 보이지 않으면 언제나 사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계산 이론(Theory of Computation)]
서하가 책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온다.
4색 정리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서하가 선택한 방법들 중 하나였다. 컴퓨터 과학에서 주로 쓰이는 개념이지만 수학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계산해야 할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아펠과 하켄이 풀었던 방식처럼, 평면 그래프를 수천 개의 특별한 케이스로 나눠서 하나하나 확인한다면 정리가 성립한다는 건 이미 알려져 있다. 인간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을 뿐.
서하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기로 했다.
‘만약 내가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세지 않고, 그보다 훨씬 적은 단계로 압축할 수 있다면?”
계산 이론은 어떤 문제가 얼마나 빠르게 풀릴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 이론의 도구 중에는 오토마타(Automata * 계산 과정을 수학적으로 모델링 하는 것), 형식 언어, 다항식 검증 같은 개념이 있다. 서하는 이것을 차용해 그래프 색칠의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경우의 수를 나누는 대신 새로운 판별 규칙을 만든다.’
이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이론이 많았다.
도서관 창 안으로 노을빛이 스며든다.
서하가 책 위에 팔꿈치를 괴고 눈으로 그가 적은 공식을 좇고 있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연필이 바쁘게 종이 위를 달린다.
서하의 머릿속에서 구성된 오토마타들이 하나하나 연결되고 그래프의 꼭짓점들이 그 위에 겹쳐진다. 잠시 뒤, 수많은 경우의 수가 흐릿하게 흩어졌다가 서하의 손끝에서 다시 질서 있게 배열되어 갔다.
‘아!’
시험 삼아 해봤던 모델링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더 복잡한 단계로 가려고 하자 안개가 낀 듯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서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채 몇 번이고 연결을 시도해 보았다.
* * *
겨울은 화가 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나있다.
‘나를 기다리게 한다고?’
겨울은 평생 누구를 기다려본 일이 없었다. 상대는 언제나 약속 시간에 먼저 나와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늦은 적은 없었지만.
불쾌감이 치밀어오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회신은 없었다.
한 번 더.
답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읽지도 않는다고?’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
휴대폰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진짜! 내가 다신 널 만나나 봐라!”
겨울이 수학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거칠게 음악실 문을 밀고 나갔다.
터벅, 터..벅.
그러나 그녀의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추었다.
오랜 시간을 알아 온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하는 무턱대고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전에 들었던 말이 신경 쓰였다.
‘나는 때때로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
담담하게 말하던 그의 눈빛, 자신을 간절히 원한다고 애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안색도 좋지 않은 것이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좋아! 내가 잡으러 간다.”
겨울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지난다.
그러자 점차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겨울은 입학 후 처음으로 이과 구역에 발을 디뎠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교정,
겨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며 발걸음을 멈췄다.
예과에서 언제나 들려오던 웅성거림, 실없는 농담과 웃음소리, 벤치에 앉아 연주하는 학생들의 웃는 모습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뭐가 이렇게 조용해?”
살풍경한 콘크리트 건물이 바람 소리마저 정적으로 바꿔버리는 것 같았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것은 딱딱한 어투의 공지, 그리고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기분 탓인지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얼굴마저 피곤과 무관심으로 가득해 보인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나?’
겨울은 이곳이 같은 학교라는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학생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야, 서하는 요즘 뭐하냐?”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자 겨울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몰라, 사서한테 무슨 이론 책 구해달라고 요청했다던데? 시험 끝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태진의 대답에 기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리스펙트 할 수밖에 없어. 우리 사촌 형이 신소재 박사과정인데 걔만큼 열심히 안 할걸?”
겨울이 대화를 듣다 참지 못하고 그들을 불렀다.
“저기요!”
두 학생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이과의 성비는 8.5 : 1.5,
그나마 있는 1.5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종이었다. 매일 입는 후드티와 츄리닝,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짙은 다크써클, 색으로 하면 그들과 같은 회색이다.
하지만 겨울은 달랐다.
은은하게 빛나는 갈색 머리칼, 단정하게 다려입은 블라우스, 어깨를 곧게 세운 자세, 무엇보다 똑바로 뜬 눈이 생기있게 반짝인다.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이었다.
둘은 입학 후 처음으로 이 학교 교복이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이 두 사람의 동요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유서하, 아세요?”
““네! 알아요!””
둘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어디 있어요?”
분명히 어려 보이는데 겨울에게는 서늘하면서도 당당한 기세가 있었다.
거지꼴인 자신들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
“아마 도서관 3층에···.”
기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몸을 돌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갔다.
“와 씨! 쟤 지금 서하 찾으러 온 거지?”
기범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보면 모르냐?”
“아까 리스펙트 한단 말 취소한다. 형들도 못해본 연애를 쪼끄만 게···.”
“그만하자. 추하다.”
태진이 기범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니, 근데 이게 말이 되냐고! 서하는 공부도 졸라 잘하는데 이게 옳게 된 세상이야?”
“···.”
둘은 서하에게 시험 때보다도 더 큰 패배감을 느꼈다.
* * *
겨울은 도서관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서하에게 급하게 달려온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어디 아픈 줄 알았더니 이렇게 멀쩡하셨어?”
그녀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그녀는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딱 한 마디만 하고 돌아가자. 그러면 이제 다시 볼 일 없어.”
뭐가 ‘숨 쉬는 것만큼’이란 말인가?
한 달도가지 못할 약속 따위를 하는 사람은 정말로 싫었다.
심호흡을 하고 도서관 문을 열었다.
처음 와보는 장소,
안쪽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3층.’
겨울이 계단을 오른다.
‘이과는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진지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겨울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3층에 오르자 2층과는 다른 풍경이 나온다. 칸막이가 있는 열람실이 아닌 개방형 테이블이다. 근처의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사뿐사뿐 3층을 한바퀴 돈다.
창가로 향하자 찾던 사람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노을이 들어오고 있다. 그 빛 중심에 서하가 있었다.
겨울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서하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잊은 듯 책에 몰두해 있었다.
미간을 깊이 찌푸리다가 어느 순간 옅게 풀리며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속눈썹이 기네?’
길고 얇은 손가락이 단정하게 펜을 쥐고 있다.
쓰고 있는 것은 자신이 평생 본 적도 없는 것이 분명한 어려운 수식, 서하가 그것을 몇 번이고 길게 쓰다 또 고친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겨울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분명히 화를 내려고 했는데 가슴속에 연소시킬 불쾌감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말을 걸 생각도 못 하고 한참을 그렇게 서있는데 서하가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라 휴대폰을 확인한다. 그리고 겨울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 놀람, 미안함.
평소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짧은 시간에 여러 번 극적으로 변화한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겨울에게 다가왔다.
“정말 미안해. 휴대폰 알람을 맞춰놨었는데 배터리가 다 된 줄 몰랐어.”
서하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덕분에 겨울 안에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화도 모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는다.
“덕분에 난 30분이나 널 찾아다녔는데.”
노을이 어느새 깊게 들어와 겨울을 비추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그 탓인지 그녀의 귀도 붉게 물들었다.
“지..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오늘 일은 꼭 나중에 꼭 갚을 테니까.”
서하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온다.
도서관을 나서며 겨울이 서하에게 말했다.
“나중 말고 오늘은 어때? 공부 끝나고 떡볶이나 사주던가.”
“응! 알았어.”
둘은 함께 오솔길을 걸어 음악실로 향했다.
겨울이 뒤를 돌아본다. 그토록 우중충하던 이과 건물들이 더 이상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음악실에 도착하자 겨울은 곧바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주 먼저 하게?”
“응, 오늘은 그러고 싶어.”
딩ㅡ, 디이잉ㅡ.
겨울이 연주를 시작하자 서하가 눈을 감는다.
흘러나오는 곡은 드뷔시의 달빛,
처연하게 아름다운 멜로디가 음악실을 가득 채운다.
겨울은 답답했다.
답답함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럴 때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연주에 모든 것을 실어 날려 보낸다.
겨울은 자신의 연주에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담았다.
* * *
서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건반 위에서 흘러나오는 음이 서하의 복잡한 머릿속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자신이 가진 온갖 걱정과 염려가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 고동이 어느새 겨울의 연주와 템포를 맞추고 있다.
서하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하루를 되돌아본다.
‘오늘 뭘 하려고 했었지?’
기억이 났다.
새로운 판별 규칙을 만들려고 했었다.
서하가 숨을 고르며 끊어졌던 사고를 다시 불러온다
‘어디서 막혔더라. 아! 더 복잡한 오토마타의 모델링.’
서하의 의식이 막혔던 문제의 깊은 곳을 파고든다. 그리고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생각의 파편들이 서로를 찾아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완전한 논리를 이루었다.
'알았다!'
평면 그래프를 다 채우려고 하면 안된다.
경계에 있는 색 정보만을 부호화해서 유한 오토마타를 만들 수 있다면 이 경계가 4색으로 확장 가능한지를 국소 규칙으로 판별 할 수 있다.
서하는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눈을 떠보니 겨울이 울먹이고 있었다.
“너 그러고 있은 지 30분 넘었어.”
“30분?”
서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겨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겨울이 연주를 끝냈을 때 보았던 것은 눈을 감은 채 음악에 집중하고 있던 서하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클래식 초보자 주제에 자신의 연주를 이렇게나 진지하게 들어주는구나 싶어 대견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5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혹은 자신의 연주가 충분치 못해서 ‘마음의 안정’이 덜 된 것은 아닌지.
그 때 서하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경계를 부호화하는 거야. 전이 규칙은 국소···. 네 가지···. 더키, 알아 낸 것 같아.”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겨울은 서하에게 다가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감긴 눈꺼풀 안으로 안구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오른손에는 보이지 않는 펜을 쥐고 있는 것 같다. 작게 움직이며 쉴 새 없이 무엇인가를 허공에 적고 있었다.
‘이미지 트레이닝?’
그런데 왜 지금?
혼자 기뻐하고, 걱정하고···.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서하가 내뱉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지금이 그에게 중요한 순간일 수 있겠다는.
특별한 영감은 항상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음악을 하며 이와 비슷한 순간을 겪어보았다.
독일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에게 잠시 레슨을 받았을 때 그가 말했었다.
“사람의 뇌는 실제 연주와 상상 속의 연주를 거의 구분하지 못해.
머릿속에서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스킬은 향상된다. 곡의 흐름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나아지는 거야. 물론 실전처럼 집중해서 할 때의 얘기겠지만.”
그래서 30분 동안이나 서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성과는 있었어?”
겨울은 어쩐지 화를 낼 기운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 아이의 머릿속은 지금 온통 수학으로 가득 차 있겠지.’
자신도 콩쿠르가 다가오면 연주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손해 보는 기분이었지만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했다.
“응, 정말로 큰 성과가 있었어.”
서하가 이를 드러내고는 시원하게 웃는다.
겨울이 잠시 망설이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야?”
투명 케이스에 담겨있는 CD,
겉에는 은색 유성펜으로 손 글씨가 적혀있었다.
[STUDIO Moon, 한겨울 Private Session]
-안정 트랙.
-개인 감상용, 외부 유출 금지.
“나 다음 달에 콩쿠르 때문에 해외에 나가거든. 혹시 필요할까 봐 녹음해 봤어.”
겨울은 그가 자신의 연주를 녹음하려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서하가 CD를 받아 들더니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다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한겨울.”
“응?”
“오늘은 너에게 폐만 끼쳤어. 정말 미안해.
내가 7년 넘게 고민하는 문제가 하나 있어. 정말 꼭 해결하고 싶은데 언제나 막히기만 해서 괴로웠어. 그런데 오늘 네 덕분에 가장 어렵던 부분이 풀린 거야.”
겨울이 깜짝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7년이나? 그럼 대체 몇 살 때부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다음에 꼭 갚을게.”
겨울의 입술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 뭔지는 몰라도 빨리 풀었으면 좋겠다.”
“풀고 나면 나한테 뭐든지 부탁해도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들어줄 테니까.”
“진짜지? 후회하기 없기다?”
“응.”
겨울은 마음이 급해 보였던 서하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리고 피아노 커버를 열어 드뷔시의 달빛을 다시 연주해 보았다.
페달을 반쯤 밟고 첫 음을 울리는 순간 굳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아까는 연주 하면서도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었는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지금은 더 없이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 * *
기숙사로 향하는 서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밤공기가 기분 좋게 서늘했다.
‘환경이 필요해.’
서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연구를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다.
그는 이번 연구에 더키를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집은 안되고, 기숙사는 더더욱 어렵다. 칠판이나 보드가 있으면 금상첨화.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 씻을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해. 무엇보다 사람이 오지 않는 장소여야 한다.’
시작은 무조건 금요일 오후.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에 가는 시간이다. 월요일까지 적어도 이틀 반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병결 신청을 하면 된다.
기숙사로 돌아와 겨울이 준 CD를 재생해 보았다.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겨울의 연주.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건 정말 다르구나.’
음질이 얼마나 좋은지 연주 사이사이에 겨울이 내는 숨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눈을 감아보니 라이브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확실히 어느 정도 진정 효과가 있었다. 유사시에 보험 역할은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서하는 다음날부터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고려했던 공용 세미나실은 이미 예약이 차 있었다.
음악실은 근처에 예과 학생들이 많으므로 제외. 프로젝트 룸은 비싼 설비가 있어 밤에는 문을 잠근다.
‘학교는 안되나? 그럼 밖에서 구해보자.’
학교 앞 스터디 카페에 가봤더니 사고가 날 수 있어 한 명은 입실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오늘도 허탕이네.’
서하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트랙 1 ㅡ 달빛.
서하는 이 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겨울의 연주로 처음 들어봤던 노래였지만 영감을 주었던 곡이기 때문인지 들을 때마다 새로웠다. 호흡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아! 김지윤 교수님이 쓰시는 강의실이 있었지.’
그곳은 대학 선이수 전용 세미나실이라 화, 목 오전에만 수업이 잡혀있다.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까지는 통째로 사용 할 수 있을 것이다. 복도 끝 모서리에 있어 사람들의 통행도 거의 없는 장소였다.
정면에는 거대한 칠판이 있고 이동식 화이트보드가 두 개 더 있다. 창은 좁고 블라인드도 두 겹이라 외부의 시선 차단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연구실답게 뒤쪽 준비실에는 수도가 달려있다. 간단히 씻는 정도는 여기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서하가 출입할 수 있는 장소란 것이었다.
선이수 수강생 카드가 있으니 발표 준비가 있어 자습하겠다고 말하면 관리 센터에 허락을 받을 수 있다.
장소가 정해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교수님께 허가는 받아야지.’
물론 밤새 쓰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관리 센터에만 알리면 된다.
서하는 다음날 김지윤 교수에게 연락해 도움을 구했다.
그녀는 의외로 연구할 것이 있다는 서하의 말에 흔쾌히 주말 강의실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나중에 내가 가볼 수도 있다?’
이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가 학교에 오는 날은 화요일,
서하는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낼 자신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보급이었다.
목요일 오후, 서하는 집에 갈 때 쓰는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끌고 대형 마트로 향했다.
아쉽게도 주말에는 급식이 나오지 않는다.
서하는 3일 동안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500ml x 20개가 들어있는 생수 하나, 나트륨이 부족하지 않도록 이온 음료도 챙긴다. 말린 대추를 보자 집 생각이 났다. 믹스넛과 함께 한 봉지를 집었다.
상온에 보관 할 수 있는 초콜릿과 비스킷, 그리고 즉석 죽을 몇 개 샀다. 에너지바 몇 개와 운동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프로틴 바도 챙겼다.
‘이 정도면 괜찮나?’
카운터 앞에 서니 수트케이트를 본 캐셔가 슬쩍 웃는다.
“어디 여행 가시나 봐요?”
서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서니 수트케이스가 꽤 무거웠다.
냄새 적고, 설거지 없고, 영양소 풍부하고.
‘보급 완료!’
용돈을 거의 다 써버렸지만 만족스러웠다.
주먹을 쥐고 작게 파이팅 포즈를 취해본다.
여행 경험이 거의 없는 서하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 * *
딩동뎅ㅡ.
금요일,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교실의 분위기가 단숨에 달아올랐다.
“주말에 뭐 할 거냐?”
“가족 모임 있어.”
“너는?”
“좋겠다. 나는 밀린 과제나 해야지.”
복도는 집에 가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서하는 이들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준 뒤에 관리 센터로 발길을 옮겼다.
데스크에 앉은 당직자가 서하의 학생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확인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이 끝나면 꼭 반납해 주세요.”
그가 건넨 카드키를 서하가 공손히 받는다.
“네!”
해가 건물 사이로 기울었다.
학생들이 정문을 빠져나간 시각, 서하는 다른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카드키를 대자 문이 부드럽게 열린다.
어제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강의실 안은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서하는 먼저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전부 내렸다.
테이블을 ㄷ자 형태로 바꾸고 가운데에 의자 하나를 세팅해 둔다. 그리고 준비해 온 자료들을 모두 올려두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하나씩 꺼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100권이 넘는 노트들.
서하는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다 가장 위에 있는 노트를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색종이가 여기저기 붙어있다. 그리고 함께 적혀있는 수식.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론이다. 지극히 1차원적인 정리.
그때는 정말로 이거면 증명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었다.
[4색 정리, 내가 증명하고 만다!]
고르지 못한 필체로 적힌 글씨.
아마도 여덟 살 전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후우우.”
서하가 깊게 숨을 내뱉는다.
처음에는 분명히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던 색칠 놀이가 언제 꼭 이뤄야 하는 목표가 되어버린 것일까?
막힐 때마다 노트가 쌓여간다.
그리고 실패 횟수만큼 자신의 지식도 늘어갔다.
서하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린다.
‘감상에 빠지지 말자.’
서하는 노트를 세 무더기로 나누었다.
먼저 폐기해야 할 자료들이다.
초반에 시도 했던 면적 보전 가설, 각도 합 일치 트릭같은 1차원적인 발상들은 증명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보류다.
인접도 지표, 방향성 지표 같은 아이디어들은 어쩌면 활용할 곳이 있을지 모른다.
세 번째는 적극적으로 활용 가능한 노트들이다.
경계 패턴 사전(초안), 국소 규칙 목록, 패리티 불변량에 대한 연구.
이것들은 다시 볼 가치가 있었다.
분필을 꺼내 정리하고 화이트보드 두 대를 좌우에 붙여놓았다.
‘종이도 충분하네.’
A3 용지가 가득 담긴 박스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자리 세팅이 끝나고 구석에 보급 스테이션을 만들었다.
물병, 종이컵, 시청각실에서 빌린 CD 플레이어, 그리고 가져온 식량들을 차례로 테이블 위에 꺼내놓는다.
마지막으로 집에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말은 학교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미영은 많이 서운해했지만 시험 기간에도 있었던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듯했다.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서하는 이번 주말에 반드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서하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1분, 2분이 지났다.
순간 서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더키, 시작하자.”
더키는 그림자였다.
서하가 눈을 뜰 때 그는 사라진다.
“얌전히 있어. 나오지 말고.”
그가 이렇게 속삭일 때마다 더키는 어둠 속에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더키는 사라지지 않았다. 억눌린 만큼 날카로워졌고 또 집요해졌다. 그는 끊임없이 문을 두드려왔다.
더키는 그가 애써 무시해 온 내면의 목소리였다.
더키는 강박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협하는 족쇄, 그가 줄곧 두려워해 온 괴물.
그러나 오늘은 서하가 먼저 그를 찾았다.
“더키, 시작하자.”
그 한마디에 더키가 빛 속으로 걸어 나온다.
억제해야만 했던 충동이 아닌 초대받은 동반자로서.
더키는 서하가 잃어버린 집요함이었고 세상을 분석하는 눈이었다.
더키가 서하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빠져나와 그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흩어져있던 사고가 거대한 강물처럼 이어졌다.
서하는 몸을 떨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온전하게 내보여도 된다는 해방의 전율.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흐릿하던 안개가 걷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계산 이론’을 집어 든다. 숫자와 기호가 마치 생명을 얻은 듯 그의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사고가 가속된다.
하지만 선명함은 동시에 불편함이었다.
머릿속이 과열된 기계처럼 쉼 없이 돌아가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분석하려 한다. 호흡이 가빠진다. 그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져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서하는 오늘만큼은 이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서하가 칠판으로 다가가 분필을 잡는다. 그리고 단숨에 수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χ(G)=min{k∈N∣∃f:V→{1,···,k},f(u)=f(v)∀(u,v)∈E}
∀Gplanar,χ(G)≤4
“모든 그래프에는 약점이 있어.”
“차수가 낮은 꼭짓점. 다섯, 많아야 여섯. 거기서부터 무너뜨리자.”
머릿속에서 수많은 도형들이 세워지고 또 무너진다.
꼭짓점을 하나 뽑아내면, 남은 그림이 네 가지 색 안에서 안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다섯 갈래가 얽힌 자리에서 균열이 생겼다. 색이 겹치고 선이 꼬인다.
분필을 잡은 손이 멈추지 않고 새로운 선을 그어간다.
패턴이 늘어났다. 예외가 쌓인다.
칠판은 금세 그래프와 도형으로 뒤덮였다. 서하는 옆에서 화이트보드를 가져와 세워놓고 사고를 이어나갔다.
서하는 그래프의 숲을 헤매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안녕?”
눈앞에 그래프가 뿅 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서로 겹쳐지더니 괴물처럼 증식했다.
마치 겨우 그걸로 나를 상대할 수 있겠냐고 비웃는 것처럼.
무수한 가지, 무수한 패턴, 무수한 예외.
그는 결코 죽지 않는 불사신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상했던 수순, 서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웃기지 마. 넌 오늘 여기서 죽는 거야.”
서하의 입술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밤이 깊어지자 칠판 한쪽에 예외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서하가 보드를 하나 더 가져와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예외들을 일련의 기호와 규칙으로 바꿔 적기 시작했다.
'경계에 있는 정보만 부호화한다.'
예외 도형들이 새롭게 치환되어 간다.
마치 거대한 숲을 한 장의 지도로 줄여내듯이 무한히 늘어나던 패턴들이 하나의 오토마타 다이어그램으로 정리되어 갔다.
분필이 사각거리며 빠르게 칠판을 채워나간다.
[상태 집합 S], [시작 상태 q₀], [전이 함수 δ]···.
그리고 어느 순간, 칠판 위에 그려진 오토마타가 스스로 원을 닫고 범위를 확정 지었다.
예외의 숲은 더 이상 무한히 퍼지지 않았다.
“서른두 개.”
서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무수한 예외들이 결국 32개의 패턴으로 압축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것은 4색 정리를 해결하기 위한 아주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었다.
* * *
버튼을 누르자 CD 플레이어에서 겨울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초췌한 얼굴의 서하가 의자에 앉아있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러너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물병을 드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린다.
간신히 수분을 보충하고 에너지바를 꺼냈다.
“후우우우우.”
서하가 뒤로 고개를 젖히며 깊은 숨을 내뱉는다.
흔들리는 손끝은 분필 가루로 얼룩져 있었고 긴장으로 굳은 어깨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겨울의 연주가 잔잔하게 그의 신경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서서히 호흡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차르륵.
블라인드를 걷어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서하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린다.
“다음 단계로 가자.”
이곳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다.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칠판 위에는 밤새 쌓아 올린 도형과 기호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본다. 적을 공간이 부족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하는 박스를 열어 A3 용지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프로 그것을 한 장씩 벽에 붙여나간다.
잠시 뒤, 벽에 거대한 보드가 생겼다.
이제는 스스로 만든 규칙의 정당성(Soundness)을 검증할 차례였다.
서하는 압축해 놓은 패턴 하나를 다른 것과 맞물리게 했다. 그러자 내부와 경계를 넘나드는 색의 흐름이 생겼다. 서하는 수식을 통해 네 가지 색이 서로 뒤섞이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잘 풀리기만 할 리가 없지.’
순조롭게 흐르던 색이 한순간 울컥하고 막힌다.
서하는 이것이 마치 괴물이 더는 다가오지 말라며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림도 없지. 규칙을 보강하면 된다.’
하나, 또 하나.
벽이 어느새 서하가 그리는 수식들로 가득하다.
모든 경계가 완벽하게 맞물릴 때까지 서하는 쉬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 * *
월요일 아침, 수업 예비종이 울렸다.
교실 안 학생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런데 항상 가장 먼저 나와 있던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늘 교과서를 펴놓고 칠판을 똑바로 쳐다보던 아이,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던 학생.
모두가 그 공백을 느낄 수 있었다.
“서하 아직 안 왔어?”
“오늘 못 보지 않았나?”
“별일이네. 전화 한번 해봐!”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퍼져나간다.
드르륵.
담임이 문을 열고 들어와 교탁에 섰다.
그의 시선이 서하의 자리를 한번 훑고 지나간다.
“서하, 오늘 병결이라고 연락받았는데 혹시 아는 사람 있나?”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들은 거 있어?”
“없는데?”
“서하 금요일에 멀쩡해 보였는데?”
담임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그가 어제 받은 것은 한 통의 짧은 문자였다.
-선생님, 몸이 좋지 않아 월요일은 결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가 아픈데? 병원은 가봤니?
병결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의 상태를 선생이 직접 확인하거나 진료 기록 정도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태진이하고 기범이가 서하 기숙사 방에 한 번 다녀와 봐라. 혹시 쓰러져 있거나 하면 바로 전화해 알려주고.”
““네!””
두 학생이 씩씩하게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갔다.
학생이 모두 나간 기숙사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서하야! 문 좀 열어봐!”
기범이 태진을 바라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야? 우리 그냥 들어간다?”
삐빅ㅡ.
사감에게 받아온 스페어키를 대자 문이 열렸다.
“어?”
“없네?”
태진이 주위를 둘러본다.
평소 서하의 성격처럼 물건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방이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반듯하게 놓여있고, 교과서와 참고자료들도 제 자리에 모두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교무실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없다고?”
담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관리 센터에 확인해 보죠.”
옆에 있던 학생 부장이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누른다.
“네, 학생 출입 기록 조회 부탁드립니다. 1학년 1반 유서하.”
짧은 정적 후, 수화기 너머에서 관리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요? 선이수 교과 세미나실요?”
학생 주임이 눈을 크게 떴다.
학생이 주말에 그곳을 사용했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담임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나도 같이 갑시다.”
학생 부장이 빠른 걸음으로 곧장 그에게 따라붙었다.
유서하는 학교에서 특별하게 관리하는 학생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 * *
“아이고 삭신아.”
김지윤 교수가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다.
서하가 무슨 연구를 한다길래 주말에 거기를 가 볼 생각이었는데 급한 일정이 잡혀버렸다.
이제야 상황이 정리되어 그녀는 오후 강의 전에 늦게라도 학교에 가볼 작정이었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띠리리리링ㅡ.
지윤이 핸들의 버튼을 누른다.
“김지윤입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학교로 나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여유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교장의 다급한 목소리.
순간 지윤의 머릿속에 서하가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인데요? 설명을 해주세요.”
-유서하 군이···.
“서하가 왜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저희 선생님들 모두가 일단 교수님이 오시는 게 좋겠다고···. 늘 수업하시는 세미나실입니다.
“안 그래도 가던 중이었어요. 10분이면 도착합니다.”
지윤이 액셀을 밟는다.
부아앙ㅡ.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지윤이 허겁지겁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녀는 제발 서하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계단을 올라가자 복도를 막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교장, 교감,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교장이 그녀를 보더니 허겁지겁 달려온다.
“교수님, 이것 좀 봐주세요. 서하가 지금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대답도 듣기 전에 그가 지윤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세미나실.
그곳에 발을 디딘 지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뻔했다.
교실 벽 삼면에 모두 종이가 발라져 있었다.
종이마다 수식과 기호, 작은 도형과 그래프가 빼곡하다. 그녀가 보기에는 수식이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사방에 화살표가 교차하고 원과 삼각형 그리고 사슬처럼 얽힌 그래프들이 벽면 여기저기에서 부딪히며 의미를 생성한다.
정면에 있는 거대한 칠판에는 오토마타 다이어그램이 완성되어 있었다.
수십 개의 원이 화살표로 이어져 있고 각 단계마다 색깔이나 기호가 따로 달려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괴수의 심장처럼 스스로 박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윤은 이제야 교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압도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면 누구나 겁에 질리게 된다. 그들 중 누구도 서하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부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윤이 교실에 들어가려 하자 교장이 팔을 들어서 막는다.
“안 됩니다! 서하 군은 지금 굉장히 예민해져 있어요. 저희도 여러 번 들어가려다 실패했습니다.”
지윤이 피식 웃는다.
“전 괜찮아요.”
‘여기 있는 누구도 널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아니란다.’
4색 정리.
필즈상 후보이자 국내 최고의 암호 전문가인 그녀는 서하가 만든 거대한 다이어그램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들어오지 마세요!”
전혀 서하답지 않은 날카로운 목소리,
지윤이 제 자리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주변에 쓰다 버린 용지들이 가득했다.
“나는 너를 방해하지 않아.”
지윤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서하가 바쁘게 움직이던 분필을 잠시 멈추었다.
“곧 끝나니까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며칠 동안 계속한 것일까?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끝.
서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소름이 돋을 만큼 형형하게 빛나서 누구도 감히 서하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서하는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른다.
너무 오랜 기간 집중을 유지한 탓에 자율신경계가 한계에 다다랐다. 연료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뇌는 불타는 엔진처럼 과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서하는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7년이나 붙잡고 있던 문제였다.
서하는 이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지금 찾아온 영감은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이러한 염려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수면도 휴식도 없었다.
서하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사각사각.
서하가 증명을 이어나간다.
칠판에서 시작된 거대한 오토마타 다이어그램이 벽면 전체를 뒤덮었다.
서하는 끝없이 뻗어나가던 패턴을 국소 규칙으로 묶어냈고, 그 규칙이 어떤 상황에서도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이제 남은 단계는 단 하나.
이 가설의 완전성(Completeness)을 검증하는 일이었다.
서하는 제한된 공간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무한 평면 위에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해 볼 생각이었다.
사각사각.
학생들이 웅성거린다.
복도에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기! 빨리 교실로 들어가!”
선생님들의 날 선 목소리,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
“저게 다 뭐에요?”
“세상에나···. 벽 전체가 수식이네요.”
“대체 뭘 하는 거죠?”
믿기지 않는다는 듯 터져 나오는 감탄과 수군거림.
서하는 주변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증명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이제 곧 한계가 다가온다.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지윤은 서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정리가 시작되는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다!’
깊이 들어가니 보였다.
벽면 전체에 겹겹이 이어진 도형과 수식이 서로 맞물려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환원 방식을 재정의해서 국소 규칙을 만들었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시작점은 칠판에 그려진 대형 오토마타 다이어그램이었다.
서하는 이제 그것을 동력 삼아 귀납적 사다리를 타고 무한 평면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천재라 여겼다.
세상이 천재라 칭송하는 수학자들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자신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체 무엇이?’
그녀가 아는 천재들은 존재하는 길을 고쳐 더 빨리 달리거나, 남들이 보지 못한 지름길을 발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서하는 아예 길이 없던 불모지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가 만든 국소 규칙은 단순한 계산적 편의가 아니었다.
서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언어, 자신만의 새로운 체계를 완성했다.
거대한 오토마타 다이어그램의 경계 안에서 혼돈이 진압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절대적 규칙.
모든 혼란이 서하가 창조한 질서 아래 무릎 꿇고 있다.
지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 * *
“음? 뭐야 이거.”
우현이 강의용 인스타그램을 관리하다 신경 쓰이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현 시각 영재고]
-내 친구가 보내준 건데 지금 영재고에서 난리가 났다고 함. 어떤 애가 교실을 이렇게 만들어놓음.
(사진 첨부)
└저게 다 뭐야?
└무슨 공식 적고 있는 거 아냐?
└벽은 뭔데?
└야, 뭔가 무섭다ㄷㄷㄷㄷ
└영재고 애들은 다 저래?
└흑마법? 저기 가운데 서있으면 제물로 바쳐지는 거냐?
└딱 보면 모르겠냐? 악마 소환이다.
└뉴비네, 이거 이세계에서 용사 소환진 펼친 거야. 저기 있으면 빨려 들어가.
└저기 어디냐? 늦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ㅋㅋㅋ
└나도 영재고에 친구 한 명 있는데, 지금 학교가 뒤집혔다더라. 교장, 교감 다 튀어나왔다고ㅋㅋㅋㅋ
“서하?”
우현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익숙한 글씨체와 도형 배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 봐도 우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교실이 엉망이다.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 없었다.
“젠장!”
우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던져둔 키를 낚아챈다.
그리고 생각할 틈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600마력의 고성능 스포츠카.
달그락, 덜컥ㅡ.
열쇠를 넣고 힘껏 돌렸다.
부아앙ㅡ.
카랑카랑한 엔진음이 자신의 성능을 뽐내듯 울려 퍼진다.
우현은 거칠게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았다.
* * *
서하는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그가 걷고 있는 곳은 무한하게 펼쳐진 평면, 빛도 그림자도 없는 무채색의 광활한 세계.
서하가 수식으로 만들어 낸 공간이었다.
그가 발을 내디딘다.
그래프의 괴물들은 더 이상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경계 바깥에서 으르렁대며 서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하는 그것들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이제는 알 것 같아. 너는 무한하게 증식하는 괴물 따위가 아니었어.”
서하가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수많은 수학자들을 먹어 치웠던 4색 정리,
사람들은 이 문제를 수학자를 파멸시키는 괴물이라 여겼다.
서하가 분필을 움직여 마지막 공식을 적는다.
그러자 서하가 있는 자리로부터 네 가지 색이 고요히 번져 나갔다.
그 색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되었던 춤을 추듯 부드럽게 얽혀 들어갔다.
서하가 사방을 둘러본다.
무한하게 퍼져나가는 네 가지 색의 조화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황무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 평면은 이제 질서와 조화로 짜인 태피스트리로 변모했다.
“이게 진짜 너의 모습이구나.”
어느새 괴물은 사라지고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에게 가해졌던 무차별적인 폭격,
그는 괴물로 오인받아 강제로 진압당했다. 하지만 이 신사는 그저 처음부터 증명을 허락할 상대를 기다리고 있던 것뿐이었다.
서하의 의식이 먼 과거로 흘러간다.
시작은 일곱 살 무렵이었다.
아직 손에 연필을 쥐는 법조차 서툴던 나이에 백과사전 구석에 있던 정리를 알게 되었다.
‘평면의 어떤 지도든 네 가지 색으로 칠할 수 있다.’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설렘이란···.
어린 서하의 머릿속에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일까? 왜 네 가지일까?’
스케치북에 지도를 그리고 색종이를 오려 붙여보며 서하는 이 정리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백과사전에서 읽은 증명 방식이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서하는 어렸을지언정 수학자로서의 미학 만큼은 확고했다.
‘증명은 원시적 폭력이 아닌 논리의 칼날이어야 한다.’
‘내가 직접 해보자.’
그것이 첫 번째 시도였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 서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수학책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래프 이론을 알기 위해 위상수학을 공부했다.
경우의 수를 따지기 위해서는 조합론이 필요했다.
그 후로도 서하가 공부해 온 수많은 이론들은 오직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좌절과 실패를 알게 되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손에 닿지 않는 진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하는 수학은 벽을 부수는 힘이 아니라 벽을 이해하고 그 벽을 이루는 요소 자체를 알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서하를 성장시켰다.
서하가 고개를 들어 신사를 바라본다.
“내 증명은 어땠나요? 당신이 보기에 만족스러웠나요?”
신사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하지만 서하는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잘했다며 손을 뻗어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하도 신사를 보며 함께 웃었다.
빛이 퍼져나간다.
남은 것은 네 가지 색으로 짜인 광활한 질서뿐이었다.
서하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신사를 향해 속삭였다.
“안녕.”
서하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의 선생님.”
* * *
서하가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움직인다.
「···따라서 모든 평면지도의 색칠은 네 가지 색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아래 또박또박 적히는 짧은 글자.
「Q.E.D.」
서하는 손끝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분필이 바닥에 부딪히며 ‘톡’하고 부러진다.
그 순간 긴장으로 버텨오던 몸이 한꺼번에 풀리며 시야가 흔들렸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서하의 의식이 끊겼다.
“서하야!”
지윤이 자리에서 달려 나갔다.
칠판 앞에서 쓰러지는 소년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었다.
우현이 몸을 날려 서하를 붙잡는다.
그리고 날다 지친 새처럼 힘없이 무너지던 그를 단단히 받아냈다.
“젠장, 대체 뭘 한 거냐! 어서 구급차 부르세요!”
떨리는 목소리,
그러나 미약하게 들려오는 소년의 숨소리에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내에 구급차가 들어오자 학교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학생들이 창가에 매달려 이를 구경한다.
복도에 몰려있던 학생들은 마치 대형 재난을 목격한 듯 난리법석을 떨었다.
“서하 괜찮대?”
“몰라, 기절했대.”
“벽에 적힌 게 다 증명이라던데?”
“선생님들도 하나도 못 알아봤다더라.”
소문이 꼬리를 물며 퍼져나갔다.
눈치 빠른 교장은 곧장 관리 센터에 명령을 내렸다.
“세미나실 봉인하세요. 출입은 저와 교감만 하겠습니다. 칠판은 물론이고 벽에 붙은 종이들까지 단 하나도 건드리지 마세요. 청소도 필요 없습니다.”
관리 직원들이 서둘러 출입문을 봉쇄하고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
이튿날, 몇 장의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졌다.
벽면 가득한 그래프와 다이어그램, 무수한 기호들의 집합.
수학을 잘 모르는 대중들은 이를 ‘소환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이것의 실체를 알아보았다.
[영재고 소환진, 아무래도 4색 정리 같은데요?]
-고화질로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실제로 증명했다면 정말 대단한 사건일 텐데요. 혹시 자세히 아시는 분 계십니까?
└카이스트 김지윤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4색 정리 맞습니다. 증명이 됐는지 결과를 예단할 순 없겠지만 검증은 꼭 해봐야 합니다.
└진짭니까? 이걸 연구하는 수학자가 국내에 있었어요?
└이거 어디서 검증합니까? 대한 수학회에서 진행할 겁니까?
└해외 쪽도 참여 해야죠. 그래프, 조합, 계산 이론 쪽 크로스 필드가 꼭 필요합니다.
└그나저나 저 교실, 정말 장관이네요. 직접 가서 꼭 보고 싶어요.
└선생님도 소환진에 흥미 있으세요?
└멋있잖아요. 저도 하나 만들어보고 싶습니다ㅋㅋㅋㅋ
* * *
따르르르릉ㅡ.
교장실 전화가 쉬지 않고 울린다.
전화가 멈추면 메일함이 반짝이고, 수개월간 잠잠하던 팩스마저 딸깍거리며 종이를 뱉어냈다.
“예, 맞습니다. 세미나실은 보존 중입니다.”
“아, 그건 좀 곤란하네요. 학생 건강이 최우선이라서요.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니 곧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희 학생이 워낙 어려서요.”
학계뿐 아니라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언론사에서도 취재요청이 들어왔다.
같은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야 했지만 교장은 통화가 끝날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언제 시작한답니까?”
통화를 듣고 있던 교감도 안달이 났다.
교장이 점잖은 척 모니터 앞에 붙여둔 메모지를 떼어내 읽는다.
“학생 동의서가 접수되는 대로 모레 시작한답니다.”
“교장선생님, 이거 정말 혹시···.”
교장이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는다.
“어허! 부정탑니다.
내가 김지윤 교수를 좀 아는데, 그때 표정을 보니까 틀림 없어요. 우리도 일단 언론 브리핑을 미리 준비합시다. 서하 군 시험 본 거랑 다른 자료들도 모두 정리해 놓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교감이 나가자 그의 입꼬리가 승천한다.
“하하하! 우리 학교가 벌써 국제 데뷔를 하게 되는 건가?”
그가 벌떡 일어나 거울을 바라본다.
화면발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살을 좀 빼야 할 것 같았다.
서하는 곤란했다.
‘어떻게 된 거지?’
삐ㅡ, 삐ㅡ.
기계음이 들려온다.
옆으로 살짝 곁눈질을 해보니 엄마가 앉아있었다. 자신이 깨어나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오빠, 일어났다!”
서은이 눈이 퉁퉁 부은 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저질러 버렸구나.’
증명을 마쳤던 기억은 또렷하다.
그 후로는 공백.
상황을 보니 쓰러졌던 게 틀림없을 것이다.
방을 둘러보니 낯설 정도로 깔끔하고 널찍했다.
원목으로 마감된 벽이 고급스러워 보인다. 침대 옆에는 작은 소파와 보호자용 침대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너무 비싼 병실 같은데···.’
시선을 돌리자 문가에 우현이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아, 선생님이···. 그래도 빨리 나가야지.’
서하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우현이 다가와 말린다.
“며칠 쉬자. 다행히 별 탈은 없다고 하니 잘 먹고 잘 쉬면 나아질 거야.”
“네···.”
서하는 자신이 지은 죄를 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일요일에 증명을 끝내고 월요일 전까지 모든 흔적을 지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 촉박한 일정을 세웠던 자신을 책망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쳐버렸다.
며칠간 잔소리를 잔뜩 들었지만 병원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같은 반 학생들이 문병을 오겠다고 하자 서하는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며 그들을 만류했다. 어디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니고 그저 탈수로 쓰러졌을 뿐인데 다들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동생과 병원 밥을 함께 나눠 먹고, 저녁에는 몰래 간식을 시켜 먹었다.
둘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놀이를 실컷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머리가 아프지 않네? 몸에 힘도 충분히 들어가고.’
슬슬 퇴원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에, 우현이 찾아왔다. 평소와는 다른 무서운 얼굴이었다.
“서하야.”
“네?”
“4색 정리는 그때부터 계속해 온 거야?”
처음 만났던 날에도 서하의 연구는 이미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최소 7년.
“네.”
우현은 화가 나 있었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아이를 괜히 수학의 길로 끌어들였나 하는 자책감, 그리고 수년 동안이나 난제를 붙잡고 있던 서하를 말리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우현의 진지한 표정에 서하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걸 왜 꼭 풀고 싶었던 거야?”
무려 7년이다.
우현은 4색 정리에 대한 서하의 집착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미 증명 된 난제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서하가 우현을 빤히 바라본다.
“선생님.”
“그래.”
“저는 평생이 걸리더라도 4색 정리를 풀 생각이었어요.”
서하는 이런 면이 있었다.
한번 정한 목표라면 무모해 보여도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체 왜?”
“그걸 풀지 못한다면 저는 어차피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테니까요.”
“뭐?”
예상치 못한 답에 우현은 묘한 불안을 느꼈다.
“뉴턴은 스물셋에 미적분, 광학, 만유인력의 기초를 전부 세웠어요. 파스칼은 열여섯 살에 원추곡선 정리를 증명했고 열아홉 살에는 계산기를 만들었죠.
가우스는 스무 살에 이미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했어요. 갈루아는 십대에 군 이론을 창시했고 아벨은 스물 여섯에 죽었지만 지금도 모든 수학자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요.”
우현이 고개를 젓는다.
시대가 다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하의 말은 이성적이지 못했다.
“그때와 지금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어. 와일즈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오일러보다 더 뛰어난 수학자는 아니잖니.”
오일러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도전했지만 끝내 풀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오일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수학적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애초에 풀 수 없는 난제였기 때문이다.
우현이 한 박자 숨을 고르며 서하의 눈을 바라본다.
“수학은 마라톤이지 단거리 경주가 아니야. 어떤 문제는 평생을 써도 풀리지 않아. 자기 시대에 맞는 성취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야.
너는 너무 무모했어. 4색 정리를 7년이나 붙잡고 있었던 것도, 100미터 경주를 하듯 며칠 안에 그것을 끝내려고 시도했던 것도.”
우현은 서하의 수학적 성향이 내심 염려스러웠다.
지금은 과거처럼 홀로 책상에 앉아 종이와 펜만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업적을 세우는 시대가 아니다.
현대의 수학자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능력은 협업이다. 수십 명이 팀을 이루어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갈래로 파고드는 방식이 이제는 기본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류 최고의 두뇌라 불리는 엘리야 크로넨이 어째서 굳이 팀을 꾸렸겠는가?
하지만 이 아이는 홀로 수년 동안 난제를 파고들었고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과연 다음에도 그렇게 운이 좋을까? 우현은 회의적이었다.
“물론 그분들은 모두 자기 시대에 맞는 성취를 이뤘어요. 그러니까 저도 제 시대에 맞는걸 하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우현이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난제에 혼자 매달리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건 너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야.”
우현에게는 보였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서하의 미래가.
하지만 현대 수학은 너무 복잡하고 세분되어서 결코 혼자서는 이 길을 갈 수 없다.
이대로라면 빛나는 재능이 무가치하게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선생님.”
“듣고 있어.”
“만약 제가 진짜 선생님이 말씀하신 천재라면, 세기에 한 번 나올까 한 그런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면요.”
서하가 우현을 똑바로 바라본다.
“고작 4색 정리 같은 걸 풀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우현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도 오만한 말이었지만 서하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서하의 생각에는 그랬다.
뉴턴처럼 우주의 법칙을 밝힌 것도, 가우스처럼 수학의 기초를 세운 것도 아니다. 이것은 훨씬 더 단순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4색 정리는 제가 정말 역사의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한 문제였어요.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접을 생각이었죠.
뉴턴이나 가우스였다면 분명히 풀어냈을 테니까요.”
“그..그럼.”
우현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하다.
“선생님은 오해하고 계세요.
저는 중세 스타일의 수학을 고집할 생각은 없어요. 필요한 도움은 모두 받을 겁니다. 기술이 필요하면 쓸 거고, 팀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과 협업도 할 거예요.”
“어?”
“낭비잖아요? 왜 모든 걸 혼자 다 해야 하죠? 혼자 연구 해야 하는 경우는 단 하나 뿐이에요. 그게 가장 효율적일 때.”
우현의 얼굴이 빨개진다.
지금까지 열변을 토한 것이 부끄러웠다.
“오늘 내가 한 말은 잊어주길 바란다.”
우현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다.
“네!”
서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한다. 괜히 민망해진 우현은 빠르게 말을 돌렸다.
“아! 대한 수학회에서 네가 했던 증명을 검증할 모양이야. 도움을 줄 생각은 없니? 직접 가서 설명해 준다면 훨씬 빨라질 텐데.”
난제의 해결은 여러 번의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번에 진행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오답을 걸러내는 1차 검증.
우현은 좋은 제안이라 생각했지만 서하의 반응은 미적지근 했다.
“그걸 검증해요? 저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어? 그건 왜?”
“저는 제가 완벽하게 풀었다는 걸 알아요. 필요한 과정도 모두 적어 놨고요. 그러니 의심이 든다면 그걸 해결하는 건 본인들의 몫이 아닐까요?”
악의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얄미웠다.
우현이 병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다.
뚜벅뚜벅.
서하에게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느낀 순간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허탈한 웃음이었다.
서하는 자신의 증명에 일말의 의심조차 두지 않았다.
보통의 연구자라면 결과를 인정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할 텐데 그 아이는 검증 따위는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태연히 타인의 몫으로 밀어두고 있다.
아마 학계의 인정조차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뉴턴이 미분을 완성하고도 30년도 넘게 학계에 발표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 같은 범인은 이해할 수가 없어.”
우현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 * *
대한수학회 회의실,
1차 검증을 맡았던 교수들이 회의록을 정리하고 있다.
“예상외였죠. 생각보다 논리가 탄탄했습니다.”
한 교수가 감탄한 듯 말했다.
“열세 살이라고 해서 사실 이걸 진지하게 검증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가보길 잘했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였다.
고등학생이 쓴 4색 정리의 새로운 증명이라니.
단순한 오류나 미숙한 전개가 산더미처럼 쏟아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논리의 흐름은 놀라울 만큼 치밀했고, 중간중간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한 기호들은 마치 오래된 체계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수학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허점이나 비약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조합론, 그래프 이론, 계산 이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얽혀있는 논리망은 단순히 한 분야의 잣대로는 재단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교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선에서 최종 결론은 내릴 수 없겠군요.”
누군가 입을 열었다.
실력 있는 연구자들이었음에도 서하의 증명을 완전히 이해하고 ‘옳다 혹은 그르다’ 단언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방대하고 낯선 방식이었다.
그들이 끝낸 1차 조사의 결과는 이러했다.
[치명적 오류 없음. 국제 검증단 소집 권고.]
“좋습니다. 바로 메일을 돌립시다. 해외 학회에도 협력 요청을 해야겠군요. 증명이 여러 가지 이론을 넘나들고 있으니 분야별 전문가가 필요할 겁니다.”
[내용 요약 : 한국 영재학교 학생이 제시한 새로운 4색 정리 증명 초안, 1차 검증에서 명백한 오류는 발견 할 수 없었음. 국제 검증 협력 필요.]
메일은 순식간에 전 세계 수학자들에게 퍼져 나갔다.
* * *
미국 동부 시각 새벽 두 시,
엘리야 크로넨이 어두운 연구실에서 노트북을 켰다.
“4색 정리?”
오랫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론이었다. 사실상 증명이 끝났기에 다시 손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새로운 접근법?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건가?”
뒷맛이 나쁜 증명이었다. 가능하다면 다 뒤집어엎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가 메일을 열어 첨부된 요약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오토마타 이론을 통한 국소 규칙 환원, 경계 부호화?’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크로넨은 놀라운 수학적 직관으로 이 증명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그려 볼 수 있었다.
그가 한참을 생각하다 턱을 쓰다듬는다.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엘리야는 의자를 돌려 벽면에 걸린 세계지도를 보았다.
이미 늦은 시간, 그러나 가슴이 묘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메일을 열어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자료 전문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 건에 참여하겠습니다. 분야별 전문가들은 제가 직접 연락해 보겠습니다.]
며칠 뒤, 세계 각국의 권위자들에게 크로넨의 이름으로 메일이 날아갔다.
미국 MIT의 조합론 권위자, 프랑스 ENS 출신의 위상수학자, 일본 도쿄대의 계산 복잡도 이론가, 독일 본 대학의 그래프 이론 전문가.
그리고 참여를 원하는 수십 명의 다른 연구자들···.
엘리야 크로넨의 이름을 확인한 그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요청을 아무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
“오른쪽 카메라 봐주세요!”
“교수님, 이번 방한 목적이 뭔가요?”
“정말로 4색 정리 검증 때문에 오신 겁니까?”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엘리야 크로넨은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띄었다.
큰 키와 은빛 머리칼, 꼿꼿하게 선 자세,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그의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게 한다.
40대 중반에 이미 수학계의 정점에 오른 인물,
마치 트로피를 수집하듯 수십 개의 난제를 해결해 온 그의 경력은 세계인들로부터 인류 최고의 두뇌라는 찬사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가 무심한 눈으로 기자들을 지나쳐간다.
그의 뒤를 따라 젊은 여성 수학자가 나왔다.
프랑스 ENS 출신의 위상수학자 클로에 모로, 그녀는 시차로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기자들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Oui. 한국에서 수학계에 중요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도 어서 빨리 직접 보고 싶네요.”
또 다른 출구에서는 도쿄대의 계산 복잡도 이론가(Complexity theorist) 시무라 켄지가 나타났다. 일본 언론들이 몰려와 그를 둘러싼다.
“시무라 교수! 한국에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모이고 있다는데 교수도 거기 합류하시는 겁니까? 프린스턴의 엘리야 크로넨과는 가까운 사이라고 봐도 되겠죠?”
“교수! 한국에서 열세 살 소년이 4색 정리를 풀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걸 검증하러 가시는 거죠? 일본의 가능성 있는 영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무라가 잠시 멈춰서더니 기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수학에 국적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단지 동료 연구자로서 검증에 협력하러 온 것일 뿐입니다.”
알맹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터뷰였지만 일본 언론은 원하는 헤드라인을 뽑아냈다.
[한국에 모인 세계적 석학들, 시무라 켄지 교수 엘리야 크로넨과 반갑게 인사]
[시무라 켄지 도쿄대 교수 한국행, 4색 정리 검증에 日 수학자의 존재감 빛날까]
[결국 핵심 검증은 일본이 맡는다]
[한국 소년? 검증이 끝나야 알 일]
이어서 MIT의 월터 스콧, 본 대학의 게오르크 슈타인이 차례로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이 일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여러 연구자들도 자발적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럽 각국의 젊은 조합론 학자들, 미국의 박사과정 학생들, 심지어 이 중에는 아직 정식 자리를 얻지 못한 독립 연구자들도 있었다.
엘리야 크로넨이 직접 검증에 나선다는 소식은 이 사건이 단순한 루머가 아니라는 확실한 보증서가 되어주었다.
눈앞에서 난제를 다루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평생 연구 인생의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곧 언론에서도 포착되었다.
[한국으로 모이는 수학자들, 그 이유는?]
-한국 영재고의 한 학생이 세계 수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소환진’이라 불리며 화제가 되었던 사진이 4색 정리의 새로운 증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 사진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되는 듯했으나 최근 상황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프린스턴의 엘리야 크로넨을 비롯한 세계적인 석학들이 잇따라 한국에 입국하면서 학계는 물론 대중들까지 술렁이고 있다.
‘루머라면 저런 인물들이 직접 올 리 없다’는 것이 학자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반응이다.
전문가들은 ‘아직 증명의 옳고 그름은 알 수 없다’면서도 거물급 학자들이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이 단순한 소동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4색 정리의 증명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유서하 군(13세, 한국 영재고1)은 ‘컴퓨터 없이 풀 수 없다’라고 여겨졌던 난제를 최초로 해결한 인물로 기록될 전망이다.
└주..모?
└진짜 누군가를 소환하긴 했네.
└저 사람들은 누구임?
└노벨상 수상자들이 정모 중이라고 생각하면 됨.
└한국은 진짜 수학에 관심 없네. 해외 언론들이 더 난리임. IMO 1위 했던 소년이 수학계를 뒤집어 놨다고. (링크)
└위상 수학 석사과정인데···. 만약 이게 진짜라면 내 전공 교재가 통째로 갈아엎어질 수도 있다. 지금 우리 ㅈㄴ 쫄았어.
└그걸 열세 살짜리가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게 레전드ㄷㄷ
└나도 대학원생인데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님. 우리 연구실 사람들 다 논문 제쳐두고 뉴스만 보고 있음. 크로넨이 직접 온 시점에서 한 70%는 찐일거라고 믿는 분위기.
└뭐야뭐야? 나 빼고 무슨 얘기하는 거야?
└응, 수학.
└에이, 난 또 뭐라고ㅋㅋㅋ
* * *
세종시 정부청사 근처의 특급 호텔,
늘 비즈니스 수트를 차려입은 바이어와 관료들이 오가던 호텔 로비에 이틀 전부터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머물기 시작했다.
정장 대신 캐주얼한 재킷과 셔츠, 고급 브리프 케이스 대신 두툼한 가죽가방이나 백팩을 멘 이들이 보인다.
소파에는 중년의 학자가 커피를 식히며 논문을 보고 있고, 구석 테이블에는 젊은 연구자들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프런트 직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게 다 수학자들이라니···.’
대한수학회는 검증팀에게 고등과학원(KIAS)의 대형 회의실을 제공했다.
커다란 창이 있는 넓은 공간,
정면에는 거대한 화이트보드와 전자칠판이 설치되어 있고, 벽면에는 카메라와 스캐너가 줄지어 있었다.
“모든 자료는 이곳에서 디지털화됩니다.”
수학회 관계자가 검증팀을 안내한다.
“영재고 세미나실의 원본은 보존하고 검증은 이곳에서 진행하게 될 겁니다. 각국에서 온 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공간을 24시간 개방할 계획입니다.”
크로넨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무심한 듯 말을 꺼냈다.
“먼저 증명 현장을 보고 싶소.”
크로넨은 첨부 파일에서 보았던 강의실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의 수십 년의 학자 생활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네?”
일주일 내내 자료를 정리했던 수학회 관계자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교수님, 이미 모든 데이터는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더 효율적으로 검증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관계자가 조심스럽게 항변했다.
하지만 크로넨이 회색 눈을 뜨고 지긋이 그를 바라보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 * *
영재고 본관 앞,
교장은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넥타이를 한 번 더 고쳐 매고, 출입 통제선의 말뚝이 흔들리지는 않는지 괜히 손으로 한번 밀어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학교가 알려지길 바라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들어오더니 그의 앞에서 멈춰 선다. 문이 열리자 짙은 색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내렸다. 그의 가슴에는 정부 부처의 배치가 달려있었다.
“교육부 협력 파견, 정민수입니다.”
그가 명함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언론 응대, 출입 통제, 동선 관리, 전부 저희가 맡겠습니다. 정부와 소통할 일이 있으면 저를 통해 말씀해 주세요.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만 잘 관리해 주시면 됩니다.”
교장은 멍한 얼굴로 명함을 받더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새로 사 입은 양복이 어색하다.
하지만 책임을 넘기고 나니 홀가분했다. 상황은 이미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치지직ㅡ.
경비의 무전기가 깜빡인다.
정문이 열리고 검은 밴과 은색 세단, 그리고 승합차가 잇달아 교정으로 들어왔다. 차량이 일렬로 정지하자 먼저 수행원이 내렸다. 곧이어 뒷문이 열리고 은빛 머리칼의 사내가 발을 내디뎠다.
‘엘리야 크로넨.’
나와 있던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그리고 학계 인물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는 사진보다 더 차분하고 날이 선 인상이었다.
누군가가 휴대폰을 꺼내려다 경비가 째려보자 황급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뒤이어 일본의 시무라 켄지, 프랑스의 클로에 모로, 미국의 월터 스콧, 독일의 게오르크 슈타인이 차례로 밴에서 내린다.
눈치를 보던 교장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환영합니다!”
크로넨이 짧게 고개를 숙이자 정민수가 앞으로 나섰다.
“동선 이미 확보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검증단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 문제의 세미나실에 도착했다. 문에는 봉인 스티커와 ‘출입 제한’ 안내문이 겹겹이 붙어있었다.
찌직ㅡ.
관리 직원이 해제 서류를 확인한 뒤에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철컥ㅡ.
카드키를 대자 문이 열린다.
크로넨이 가장 먼저 그곳에 들어갔다.
분필 가루와 종이 냄새, 오래 밀폐되어 있던 방 특유의 금속성 공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교장이 불을 켜자 세미나실의 전경이 드러났다.
사방 벽을 가득 메운 A3 용지, 복잡하게 얽힌 그래프와 기호, 칠판 한가운데를 차지한 거대한 오토마타 다이어그램.
검증 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信じられない(믿을 수가 없군).”
시무라가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정말 근사하네요. 이렇게 멋진 강의실은 처음 봐요.”
“Jesus Christ.”
각국의 언어가 뒤섞인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대단해. 논문만 보다가 이런 현장에 나와보니 젊은 시절 생각이 나네.”
게오르크가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정말요. 너무 로맨틱하죠?”
클로에가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손끝이 종이 가장자리를 위를 맴돌다 멈췄다.
“숫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네요. 규칙이 또 다른 규칙을 끌어안고.”
이들은 모두 최정상급 수학자들이었다.
논문 검증 같은 것은 그들에게는 일상이다. 하지만 페이퍼 더미가 아닌 살아있는 증명의 현장에 직접 나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흥분케 했다.
그들은 이 방에서 홀로 며칠 동안 고독한 싸움을 했을 어린 수학자를 상상해 보았다.
슈타인이 벽에 붙은 종이를 유심히 살핀다.
기호들이 일정하지 않고 어떤 줄은 급히 쓴 듯 기울어져 있었다.
“기존 교과서에는 없는 표기법이군.”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알아보려고 적은 거겠죠. 확실히 그는 이 방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걸 우린 해석해야 하는 거고.”
클로에의 손이 벽의 한 지점에서 멈췄다.
“여기서 방법을 바꿨네요. 저 전이는 원래의 정의라면 충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규칙을 새로 만들었어요. 저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너무 리스크가 커요.”
“위험한 시도지. 결과적으로는 모순을 피하고 체계를 닫는 데 성공한 것 같지만.”
연구자들이 교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자료를 수집한다.
크로넨은 한참 동안 교실에 서 있었다.
그는 소년이 남긴 논리의 흐름을 좇고 있었다. 현장에 와보니 뚜렷해진다. 소년이 어떤 각오로 이곳을 택한 것인지, 어떤 사고로 증명을 시작했는지.
그가 걸음을 옮기자 마치 흔적이 영화처럼 되살아나 눈앞에서 펼쳐졌다.
어린 소년이 칠판 앞에 서서 단숨에 수식을 써 내려간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전체적인 논리의 틀을 모두 잡았음이 틀림없다.
벽에 낯선 기호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존 언어로는 자신의 증명을 담아낼 수 없으니 스스로 새로운 언어를 만든 것이다.
‘하루 이틀 해왔던 게 아니군?’
지뢰를 능숙하게 피해 간다.
그가 만든 규칙은 모두 실패의 역사일 것이다. 그것들을 모아 규칙으로 전환시켰으니.
칠판 가장자리의 희미한 분필 자국이 그의 눈길을 붙잡았다. 한쪽은 지워진 흔적만 남아있었고 그 위에 새로운 화살표가 덧그려져 있었다.
‘처음부터 다 계획했던 건 아니구나.’
그는 부딪히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며 체계를 세워갔다. 그럼에도 이 구조는 놀라울 만큼 단단했다.
구석에 노트 더미가 보였다.
손때로 거뭇하게 얼룩지고 여기저기 모서리가 헤져있다. 크로넨은 가장 위에 있는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아이 같은 필체, 아직 교과서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풀이, 하지만 그 안에는 진지한 탐구의 흔적이 있었다.
‘마치 수학자들의 연구 일지 같군.’
그가 의자에 앉아 노트 몇 권을 집어 든다.
노트에는 친절하게 날짜가 적혀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글자가 차츰 또렷해지고 불안정하던 수식 전개가 정연한 구조를 갖추어갔다.
소년의 실패가 쌓여간다.
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모듈러 산술을 이용해 색칠의 주기를 추적하고, 경우의 수를 동형 그래프로 묶어 축소하려는 시도도 했다. 크로넨은 페이지를 넘기다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평면과 구면을 오가며 힌트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익숙한 패턴이 보였다.
‘이건 내 방식인데?’
이 아이는 자신의 논문을 읽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연구에 적용해 보려 했다.
최신권으로 오자 뚜렷한 진화의 흔적이 보였다.
자신만의 기호, 기존 논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부호와 약속들이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크로넨은 노트를 덮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노트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방은 소년에게 있어 마지막 전장이었던 것이다.
그가 읽은 것은 일곱 해 동안 이어진 장대한 소년의 서사, 그 전쟁의 기록이었다.
익명게시판,
[오리좌, 멀리 가버리는 거야?]
-학교에 갑자기 무서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우리 오리좌가 대단한 일을 해낸 모양인데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미국에 가버린다거나 ‘너희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아 같이 못 놀겠잖아!’하고 아장아장 걸어서 대학으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너무 걱정되는 거야. 오리좌가 없으면 이제 살 수 없는 몸이 돼버렸는걸?
└아..안돼!
└하지만 우리 오리좌가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기분이 좋던데.
└그건 맞긴 해. 오리좌한테 걸리면 그깟 색칠 문제 따위야ㅋㅋㅋ
└엘리야 크로넨이 막 오리좌를 케이지에 감금해서 데려간다던가?
└우리 학교가 뉴스에 나오니까 나도 적응이 안되더라. 그래도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어. 오리좌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나중에 밀레니엄 문제도 다 풀어버린다던가.
└그땐 사람들한테 자랑해야지ㅋㅋㅋㅋ 오리좌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피타고라스처럼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오리좌에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아?ㅋㅋㅋ
└오리좌, 보고 있니? 그렇다면 우리가 볼 수 있게 꼬리를 흔들어줘!
* * *
[내가 만약 천년 후에 깨어난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장 먼저 물어볼 것이다.]
“리만 가설은 증명되었습니까?”
-다비트 힐베르트, 1900년 파리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대머리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내 멱살을 붙잡고는 리만 가설은 대체 어떻게 되었냐며 추궁했다.
독일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는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20세기 수학자들이 도전해야 할 23개의 난제를 제시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중 13개는 해결되었고, 7개는 부분적으로만 풀렸으며, 여전히 3개의 문제는 미해결로 남아 있다.
‘힐베르트 할아버지는 왜 날 잡고 그러셨던 걸까? 리만 가설에 원혼이라도 붙었나?’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난제.
리만 가설을 풀기 위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두뇌들이 거의 모두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난공불락의 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힐베르트가 꿈속에서 멱살을 잡은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너희들은 100년 동안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왜 아직도 증명을 못했어!”
쩌렁쩌랑한 노인의 호통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부르르ㅡ.
몸이 으스스한 것이 아무래도 엄마가 주신 한약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학교에 돌아가기 전 엄마는 나를 붙잡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으면 같이 그냥 옥천으로 돌아가자.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니까 명심해서 들으렴. 억지로라도 데려갈 테니까.”
면목이 없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어머니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내게 다짐을 받고는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셨다.
또 떨어지게 되었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서은이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방학 때 오빠랑 많이 놀자!”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건물이 텅 비어있었다.
‘아, 수업 시간이구나!’
오늘은 목요일, 나는 이틀을 더 쉬고 다음 주부터 수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음?’
방문을 열어보니 문틈 아래로 카드들이 가득했다.
한 장씩 열어보니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서하야, 어서 돌아와서 같이 축구하자!]
[도서관 3층 창가 자리가 비어있으니 이상해. NPC가 사라진 것 같잖아.]
[신문부입니다. 인터뷰는 아직도 생각이 없으신가요?]
[야! 너무 멀리 가버리진 말아줘. 그래도 등은 보여야 따라갈 거 아냐!]
[돌아오거든 음악실에서 보자.]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동안 그것을 보다 소중하게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아직도 수업이 안 끝났겠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오솔길을 터벅터벅 걸어 음악실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아무도 내게 펜과 노트를 주지 않았다. 어른들끼리 무슨 합의가 있었던 것인지 읽을 책도 챙겨주지 않아 병원의 어린이 도서관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피아노였다.
나는 스케치북을 달라고 해서 그곳에 실제 사이즈와 같은 건반을 그렸다.
남은 것은 연습.
오솔길을 지나 음악실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와 분필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불을 켜자 피아노가 검은 물결처럼 반짝인다.
가방을 열어 병원에서 들고 나온 스케치북 건반을 꺼냈다.
병원 침대에 앉아 나는 하루 종일 이 종이 건반으로 피아노를 연습했다.
머릿속 이미지대로 실제 건반을 두드려본다.
엄지로 ‘도’를 아주 가볍게 눌렀다.
왼손은 도-솔, 오른손은 미-레-도.
종이 위에서 수천 번 해봤던 이동을 반복한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교본을 읽어두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더키는 그날 이후 잠잠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손톱으로 쇠를 긁듯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그의 허기가 잠시 충족되었을 뿐.
당분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키의 테마는 우울한 곡이다.
더키는 특히 피아노 소나타를 좋아했는데 느린 악장에서 왼손이 같은 음형을 낮게 깔고 오른손이 아주 조금씩 살아나는 선율, 그 구조를 좋아했다.
베이스가 한 음씩 내려가며 길을 만드는 동안 멜로디가 뒤늦게 음을 얹는다.
‘안전한 하강.’
이런 느낌이 든다.
내 의식 안에서 가라앉을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러다 빛을 찾아 격렬하게 상승한다.
“제법 잘 치네?”
고개를 돌려보니 겨울이 와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하나로 묶었고 신발은 운동화였다.
숨이 가쁜지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겨울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들어와 가방을 의자에 올려둔다.
“지나가다 피아노 소리가 나길래.”
그녀가 변명하듯 이유를 먼저 말했다.
서하는 그녀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하기로 했다.
“네가 준 CD,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고마운 일이 정말 많은데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
겨울이 서하를 보며 눈을 살짝 흘긴다.
“7년 걸렸다는 그 문제, 결국 푼 거지?
부탁은 잠시 아껴둘게. 나중에 쓸 데가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것보다 피아노 계속 쳐봐.”
겨울이 서하의 손목을 살짝 눌러 각도를 맞춰주었다.
서하는 호흡을 고르고 다시 ‘더키의 테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나타네? 직접 작곡한 거야?”
“응.”
“마음에 들어. 네가 전에 나한테 음악을 잘하면 수학에도 소질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 반대도 맞는 것 같아. 일단 왼손 오른손 분리가 너무 잘되고 있어.”
양손을 따로 쓰려면 뇌의 좌우 반구가 서로 번갈아 신호를 주고받아야 한다.
서하에게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가?”
“응, 그거 안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수학은 잘 모르지만 네가 만든 곡도 마음에 들어.”
“그럴 줄은 몰랐는데.”
서하는 더키가 작곡한 곡이 지나치게 어둡고 정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음악적 테마가 확실하잖아. 왼손은 시계처럼 일정하게 두드리면서 그 위에 선율이 조금씩 계속 달라져. 이 오스티나토(Ostinato * 반복되는 베이스) 위에 변주를 얹는 방식은 바로크의 파사칼리아(Passacaglia)나 샤콘느(Chaconne) 계열이야. 바흐하고도 닮아있는 것 같고.”
서하가 멍하니 겨울을 쳐다본다. 더키가 참고한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걸 듣고 알다니 대단하다.”
서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탄했다. 겨울은 그런 서하의 표정에 만족했다.
“그런데 화성은 또 낭만주의 색채가 있어. 여러모로 흥미가 생기네.”
서하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겨울이 황급히 허리를 편다. 뒤에서 건반을 잡아주다 보니 둘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자! 다시 해보자. 아직 미완성이지? 곡이 완성되면 꼭 알려줘. 내가 연주해 보고 싶어.”
겨울이 슬쩍 시계를 본다.
분침이 연습실 예약 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도 어차피 연습과 다를 바 없으니 상관 없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 *
고등수학원 3층 회의실,
서하는 이른 아침 전화를 받았다. 질의가 있으니 나와달라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검증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나?’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엘리야 크로넨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다란 머그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코코아 괜찮지?”
“네!”
논문 속에서만 보아오던 인물을 실제로 마주하자 서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이라 들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소한 것들을 물어봤다.
학교에서는 어떤 과목을 배우는지, 어릴 때는 무엇으로 수학을 익혔는지, 친구는 있는지 같은 질문들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증명에 관해 물어보실 게 있는 거 아니었나요?”
크로넨이 크게 웃는다.
“하하하!”
서하는 그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증명이 완전하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나도 알아. 그러니 더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네?”
“검증은 유능한 동료들이 맡아줄 걸세. 오늘은 그저 장래가 유망한 수학자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을 뿐이야.”
크로넨이 표정을 바꾸더니 서하를 바라본다.
“그런데 자네, 내 논문을 읽었더군. 푸리에 변환으로 제타 함수의 진동성을 눌러버렸던데.”
서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맞아요. 원래는 극한 구간에서 계속 발산되는 꼬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막막했는데 그 변환을 적용하니까 잡음이 싹 정리되더라구요. 진짜 끝내주는 아이디어였어요!”
수학 얘기를 하는 서하의 눈이 어린 아이처럼 반짝인다.
크로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서하가 4색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여러 이론이 동원되었고, 그중에서도 크로넨의 ‘진동 억제 변환’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크로넨은 그 이론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지 서하와 오래 이야기했다. 그리고 요즘 자신이 붙잡고 있는 몇 가지 연구 주제도 마치 자랑하듯 들려주었다.
즐거운 대화였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서하에게 있어 평생 처음이었다.
“그래, 앞으로는 뭘 할 생각인가?”
크로넨은 서하가 혹시 페렐만처럼 난제를 증명한 뒤 연구 의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자리를 마련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당장이라도 다른 연구를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수학자의 얼굴이.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아요. 지금 당장 밀레니엄 문제 같은 난제에 도전한다는 건 오만이겠죠.”
크로넨은 서하의 말을 다르게 들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풀 수 있겠지만요.’
“그래도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있을 것 아닌가?”
그는 궁금했다.
이 소년이 마음에 두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혹시 자신과 겹친다면 충고해 주어야 하니까.
“굳이 말하자면 리만 가설에 흥미가 있어요.”
“흐으음.”
크로넨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나왔다.
‘보기보다 명예를 따지는 타입인가?’
리만가설은 말 그대로 수학자 분쇄기,
그러나 풀어낸다면 세상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명예가 뒤따를 것이다. 크로넨은 이를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선택이라 여겼다.
“이유는?”
서하가 우물쭈물 하더니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소수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혼자 골드바흐 추측을 풀어봤거든요.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뭐라고?”
크로넨이 깜짝 놀란다.
[2+2=4, 3+3=6, 3+5=8···.]
이와 같이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골드바흐 추측은 간단하지만 가장 증명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이다.
“그걸 증명하려면 정수론을 아예 새로 써야 할 텐데?”
그야말로 수학 교과서를 모두 바꿔놓을 만큼 새로운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아!”
크로넨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지른다.
“이 괘씸한 녀석!
너는 지금 리만 가설이 골드바흐 추측보다 훨씬 쉽다고 생각하는구나! 리만 가설에서 힌트를 얻어서 결국 골드바흐 추측을 증명할 생각인 거야.”
리만 가설은 소수의 배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걸 풀 수 있다면 골드바흐 추측을 증명하는 데 있어 아주 강력한 힌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수학자를 좌절시켰던 리만가설을 이 아이는 목표를 위한 가교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서하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그게 리만 가설은 그동안 연구도 많이 됐고···.”
많은 수학자들이 도전한 만큼 축적된 자료도 많았다.
리만 가설과 관련된 논문만 수만 편, 서하는 이 중에 반드시 힌트가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또?”
“왠지 풀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느낌.”
타고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직관.
탁, 탁.
크로넨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린다.
“수학에서 가장 필요한 영감이지. 하지만 또 위험하기도 하고.”
“교수님도 밀레니엄 문제에 도전하고 계시다 들었는데요.”
“왜, 궁금한가?”
크로넨이 서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조금요.”
“프린스턴에 온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진행 상황까지 전부. 미리 말하지만 상당히 근접한 상태야.”
“그럼 됐어요.”
서하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크로넨은 평생 처음으로 학생을 스카우트하는데 실패했다.
“이봐 소년!”
나가려고 일어서는 서하를 그가 붙잡는다.
“네?”
“잘 듣게. 진지하게 밀레니엄 문제에 도전할 생각이라면 나중에라도 팀을 꾸리는 게 좋을 거야.
난제를 해결하는 건 배를 타고 망망대해에서 섬 하나를 찾는 일과 비슷해. 그런데 선장이 돚도 펴고 노까지 저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서하가 잠시 멈춰서서 그의 말을 생각해 본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서하가 회의실을 나선다.
‘팀원···.’
이 얘기를 듣는 것은 벌써 두 번째였다.
누가 좋을지 생각해 보자 떠오르는 이름이 한 명 있었다.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고등과학원 3층 대회의실,
“자료 띄우겠습니다.”
대한수학회의 코디네이터가 손짓하자 녹화를 위한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다. 이어서 대형 스캐너가 윙- 하는 소리를 냈다.
벽면 스크린에는 영재고 세미나실이 파노라마로 재현되었다.
칠판의 오토마타와 벽을 메운 A3 용지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지워진 분필 자국까지 또렷이 드러날 만큼 화질이 선명했다.
교수들이 강의실에 모여 종이와 펜으로 이론을 검증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이제는 모든 논문이 디지털화되고, 필요하다면 증명 보조기와 수학 소프트웨어로 가상 실험까지 재현할 수 있다.
크로넨이 슬라이드를 내리며 말했다.
“자료는 충분히 확인 했겠지?
정석대로 간다. 표기 해석, 정합성과 완전성 검증, 반례 탐색 순서로.”
월터 스콧이 화이트보드 한가운데 네 가지 순서를 적었다.
클로에가 바로 옆 전자보드에서 서하의 증명을 표준 기호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 기호는 경계 고리로 바꾸면 될 것 같아요. 아래 첨자는 색 부호하고 매핑으로 처리하면 되겠죠. 식 집합 ‘1,2,3,4’ 는 2비트 알파벳 (a,b)²로 치환할게요.”
게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경계에 나타나는 색의 패턴을 길이 가변의 단어로 바꾼 다음 유한 오토마타 A가 그 단어를 읽으며 확장 가능, 불가능을 판정한다는 거지?
미쳤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시무라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경계 규칙이 꼭 서른두 개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노트에 있어.”
클로에가 스캔을 확대해 띄운다. 서하의 손 글씨가 뚜렷하게 보였다.
“예외 군이 유도하는 경계 국소 규칙의 동치류 수가 서른두 개네. 마이힐-네로드 스타일(Myhill–Nerode style * 많아 보이는 경우의 수를 실제 구분해야 하는 최소 패턴 개수로 줄이는 방식)로 최소화한 거야.”
월터가 웃었다.
“그냥 최소 DFA(Deterministic Finite Automaton * 결정적 유한 상태 오토마타)라고 써놓으면 될걸 굳이 마이힐-네로드까지. 귀엽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서하는 표기와 전개 방식에서 기존 수학자들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검증팀은 그것이 귀여우면서도 놀라웠다.
경험 많은 연구자들조차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발상들이 거기에 있었으니.
검증은 한 달 내내 지속되었다.
수십 명의 수학자들이 달라붙어 서하의 이론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그들은 혹여 증명에 구멍이 뚫린 곳은 없는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나씩 체크리스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아보기 힘들던 부호를 모두 해독해 치환하고, 정합성과 완전성 면에서도 ‘오류 없음’ 판정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단계는 반례를 찾는 일.
젊은 연구원들이 회의실 뒤쪽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그들은 작은 평면 그래프를 자동으로 생성해 경계만을 뽑아낸 뒤 서하의 오토마타에 통과시켰다.
다른 쪽에서는 서하의 4색 정리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실제로 색칠이 가능한지 적용해 보고 있었다.
두 결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할 때마다 화면에 초록 불이 켜진다.
케이스의 수가 늘어나자 회의실에 긴장감이 감돈다.
알고리즘을 돌린 연구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지만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한 채 손끝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오늘 일은 수학자들 사이에서 반드시 오랫동안 회자된다.’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감각이 그를 흥분시켰다.
“열 면까지 일치.”
“열네 면까지 일치.”
“스무 면까지 이상 없음.”
반례를 찾기 위해 수십만 개의 샘플이 투입되었지만 경고음은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이 소년의 오토마타는 완전하다는 것을.
* * *
이른 아침부터 고등수학원이 술렁였다.
검은색 승합차와 방송 중계 차량이 건물 앞 도로를 점거한 채 줄지어 서 있다. 각국의 언론인들도 삼삼오오 모여 카메라 각도를 살피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뒤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MBS 기자인 심현우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본다.
“무슨 수학 발표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게 이렇게 특종이 될 일이었습니까?”
선임 기자가 그를 보며 한심한 듯 혀를 찬다.
“지금 이 사람들이 수학 때문에 온 것 같아?”
“네? 그럼요?”
“외신들 봐라.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해도 이렇게 몰려오진 않았을 걸.”
심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러면 뭐 때문인데요?”
“너도 특종 잡으려면 한참 멀었다.
당연히 열세 살짜리 애가 무슨 정리인가를 증명했다고 하니까 난리인 거지. 서양에서도 그 왜 있었잖아, 열세 살에 체스 그랜드 마스터라는···.”
“아! 마그누스 칼슨이요? 저도 알죠! 그때 CNN, BBC 같은 메이저 방송사들이 다 노르웨이로 몰려갔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야.”
정문 앞 공터에 단상이 세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자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엘리야 크로넨이다!”
“MIT 월터 스콧 교수도 있어.”
“시무라 교수! 여기 한번 봐주세요!”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모여있으니 서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었다.
앞줄에 앉은 기자들이 서둘러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플래시가 연신 터지고 노트북을 들고 있는 기자들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Ready?”
속삭이듯 들려오는 크로넨의 목소리, 수학원 관계자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넨이 단상 앞으로 걸어 나온다.
회색 눈동자가 잠시 객석을 훑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를 따라 움직이며 연신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가 마이크를 가볍게 고쳐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와 동료 연구자들은 한국에서 제기된 4색 정리의 새로운 증명을 검증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객석을 바라보았다.
기자들이 숨소리마저 죽이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증명의 모든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였고 백만 회에 가까운 자동 검증을 실시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증명을 뒤엎을 치명적 오류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증명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인류가 쌓아 올린 수학사의 위대한 진전 중 하나라고 평가합니다.”
수학자들은 결코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혹은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덧붙인다.
작은 균열 하나가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성과조차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진전 중 하나’라는 말한 검증팀의 워딩은, 사실상 수학자들에게 허용된 최대치의 찬사였다.
순간 회견장이 술렁였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며 외친다.
“지금 말씀은 사실상 증명을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학생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는 나오지 않았나요?”
“그 소년이 혼자 증명한 게 맞습니까? 혹시 주변에 조력자는 없었을까요?”
마지막 기자의 질문이 회견장을 떠나려던 크로넨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누구시오?”
한 동양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속을 밝힌다.
“산케이 신문의 아베 신타로 기자입니다.
수학자들이 150년 넘게 풀지 못했던 난제를 열세 살 소년이 증명했다는 걸 우리가 정말 믿어야 합니까? 그 과정에서 혹시 다른 어른들의 개입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크로넨이 기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불쾌한 듯 한마디 내뱉었다.
“당신은 우리가 바보로 보이시오?”
“네?”
“증명이란 단순히 결론이 ‘맞냐 틀리느냐’로 평가되지 않소.
논리를 어떻게 전개하는지, 어떤 정의와 보조 정리를 선택하는지, 기호는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 그 모든 것이 연구자만의 고유한 서명처럼 남게 되지.
우리는 이 논문에서 아직 정제되지 않은 젊음의 패기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신선한 발상의 도약을 동시에 보았소. 당신의 질문은 수학자들에게 터무니 없는 모욕이란 말이요.”
회견장의 모두가 그의 말을 숨죽여 경청했다.
“정말 그 소년이 혼자 해낸 거란 말씀입니까?”
기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크로넨이 그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기자 양반, 대학은 나오셨소?”
뜻밖의 질문에 기자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네! 나왔습니다.”
“그럼 한 문제를 붙잡고 가장 오래 고민해 본 시간이 몇분이었소?”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어···.”
“10분? 30분?
길어야 한 시간을 넘지 않았을 거라 내 단언하지. 당신이 못난 사람이라서가 아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테니까.
그런데 유서하 군은 무려 7년도 넘는 시간 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 왔다는 것을 아시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면 더는 설명하지 않겠소.
하늘은 때때로 한 사람에게 별빛을 몰아주기도 하지.”
마지막은 들릴 듯 말듯,
그러나 의미는 확실히 전달 되었다. 발표를 듣는 국내 방송 관계자들의 얼굴에 안도와 자부심이 동시에 번져간다.
“크흠!”
산케이 신문의 기자가 민망한 듯 물러났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크로넨이 단상에서 내려가자 수학회 관계자가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오늘 기자회견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추가적인 사항은 대한수학회를 통해 공지하겠습니다.”
대중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수학계의 일이었지만 화제에 목말랐던 방송사들은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필즈상은 시간문제? 13세의 한국 천재, 세계가 주목]
[한국에서 ‘수학의 모차르트’ 탄생, 전 세계 언론 대서특필]
[교과서 다시 써야 하나?, 13세 소년의 충격적 증명]
[7년간 이어진 소년의 투쟁, 결국 수학계 170년 난제 허물었다]
그날 저녁, 한 방송사에서는 편성표를 뒤엎고 긴급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평소 외면받던 수학, 과학 전문 유튜버들도 앞다투어 캠을 켜고 계획에 없던 합동 방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빨랐던 이가 있었으니, 그동안 서하 자랑을 참느라 입이 근질거렸던 우현이었다.
[프레임 시리즈 LIVE 신우현, 그 얘기 오늘 한다!]
“얘들아, 오늘 5강 들어가기 전에 잠깐 딴소리 좀 할게.”
└또 무슨 얘길 하시려고ㅋㅋㅋ
└프린스턴 시절 여자 얘기?
└섬네일에 있잖아. 전에 말했던 국내에 있는 진짜 천재.
└헐ㅋㅋ 설마?
“그 설마가 맞아. 내가 말했잖아. 국내에도 세기에 한번 나올법한 천재가 있을지 모른다고.
내가 수학자는 업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했지? 이 정도면 충분히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
└소오름ㄷㄷㄷ 그게 유서하였어요?
└대박ㅋㅋㅋㅋ
└약 파는 거 아니죠?
“내가 이런 걸로 약을 팔 것 같아?”
└썰 좀 풀어주세요. 학원에 상담 왔었나요?
└설마 우리랑 같이 지금 수업 듣고 있나?
“내가 서하를 처음 본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때 감이 딱 왔어. 아! 얘는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서하ㅋㅋㅋ 친한척ㅋㅋㅋ
└어땠길래요?
└빨리빨리!
└지금도 미어 터지는데 강의가 이렇게 또 떡상하나?
“일곱 살짜리 애가 4색 정리를 풀고 있었거든.
스케치북에 색종이 붙이고 크레파스로 그래프 그려가면서 그걸 하고 있는데, 자세히 봤더니 대학 수준 이상의 고차원적인 정리였어. 그걸 본 내 심정이 어땠겠니?”
└안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애들 편애하는데 그 정도면ㅋㅋㅋ
└와! 그때부터 하고 있었어요?
“나도 깜짝 놀랐다. 아직도 하고 있는지 몰랐거든.
얘가 증명이 끝나기 전까진 말을 안 해. 너무 과묵해! 풀고 나서도 덤덤하더라고. 서하도 알았던 거지. 언젠간 자기가 반드시 풀 수 있다는걸 말이야.”
└그러면 걔도 선생님 제자?
└설마 우리 다 동문인가?
└뭘 가르치셨는데요?
“안 가르쳤어. 봐야 할 책만 보냈지. 애초에 나 정도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거든. 그냥 방향 제시 정도만 해줬다고 하자.”
└그럼 이제 필즈상 받는 거예요?
└한국에서도 드디어 나오나?
“야 이놈들아! 필즈상은 4년에 한 번이야. 이번 수상자는 올해 나왔고. 그러니까 아무리 빨라도 4년 후겠지?”
└와ㄷㄷ 난 매년 주는 줄.
└뭘 그렇게 아낀대? 노벨상도 매년 주는데.
“그리고 수학계는 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보수적이야. 이번에도 엘리야 크로넨 교수가 뭐라고 했냐? ‘치명적 오류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딱 이 정도라고.
이제 정식 논문 나오면 마침 심심하던 수학자들이 달라붙어서 또 검증 하겠지. 그걸 한 2년 하면 그때야 겨우 인정해 줄까.”
└ㅈㄴ빡세네요ㄷㄷ
└어후, 난 수학자 못할 듯.
└그거 아니라도 우린 못해.
“아무튼 서하는 이제 월드클래스가 된 거야.
크로넨 교수가 또 뭐라고 했냐? 인류가 쌓아 올린 수학사의 위대한 진전!
캬! 내가 이 양반을 좀 아는데 이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야. 그만큼 서하가 인상적이었단 거지."
└수학계의 셀럽이 되었다ㄷㄷㄷ
└그건 어째 별로 안 부러운데.
└예능 같은데 나오지 않을까?
“이제 자랑은 다 했고 다시 수업 들어 가자!”
우현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분필을 집어 든다.
하지만 오늘 방송에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수능 강사인 그에게 초등생 학부모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모두가 ‘우리 아이도 굉장히 똑똑한데 유서하처럼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우현에게 지도를 요청했다.
익명 게시판,
[세탁실 사용, 매너를 지킵시다.]
-진짜 너무하네. 빨래 끝나면 바로 가져가거나 건조기 돌리라고! 공부할게 쌓여있는데 이걸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 PTSD 올 것 같다. 세탁 지옥.
└학생회에 민원 넣음.
└예약 시스템부터가 잘못됐음. 선착순이 공정임?
└어쩔 수 없잖아.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기는 해?
└노쇼만 잡아도 지금보단 널널할걸?
└너희가 게을러서 그래. 나는 항상 새벽에 일어나서 편안하게 한다고.
└그냥 세탁기 숫자를 늘리면 안되나?
└지금도 열대나 되는데 더 늘리자고? 차라리 빨래방을 차리지 그러냐.
학생 회장 백준기가 게시판을 보다 한숨을 내쉰다.
“이번 주 세탁실 관련 민원이 벌써 20건이 넘어. 이거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부회장 민도현이 손을 들었다.
“선착순, 자율로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예약 앱을 고쳐서 각자 추천 시간을 다르게 주는 거죠. 병목 구간만 줄이면 세탁기 숫자 자체는 충분하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영재고는 상당한 부분까지 학생들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다. 세탁실 사용도 그중 하나.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이런 세세한 문제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음···.”
준기가 도현의 의견을 머릿속으로 굴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생각이다. 애초에 지금 쓰는 예약 앱도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거니까.”
“3년 전에 만든 거라고 들었어요. 그때는 전부 아날로그여서 피크타임에는 다들 빨래 바구니 들고 줄 서 있었다고···.”
지금의 시스템은 세월이 쌓이며 하나씩 확립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 시스템도 달라져야 하는 법,
학생회는 그날 오후 컴퓨터 동아리 ‘비트 포지’를 찾았다.
끼익ㅡ.
작은 동아리방은 빈말로도 청결하다고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케이블이 산처럼 쌓인 책상, 먼지가 수북한 본체들, 비어있는 에너지 드링크 캔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방문을 열자 전자제품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눅눅한 공기를 타고 훅 하니 밀려왔다.
백준기가 얼굴을 찌푸린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제발!”
안쪽에서 후드티를 눌러쓴 학생들이 그들을 빤히 쳐다본다. 화면에는 복잡한 그래프와 코드들이 끝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을 맞이했다.
“학생회? 무슨 일로 왔어?”
“세탁실 예약 앱 때문인데요.”
부회장인 도현이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아! 그거? 우리 동아리 선배들이 만든 건데 개판이지.”
동아리 방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알면 좀 고쳐줄 수 없을까? 예약 시스템 좀 뜯어 고치자.”
회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야구모자를 눌러쓴 여학생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무료니까 문제, 돈 내면 전부 해결.”
‘여긴 왜 정상인이 없는 걸까?’
준기가 욱하고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누르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안돼. 무료가 원칙이니까. 학생들에게 돈을 받을 순 없어.”
준기의 단호한 말에 동아리방이 잠시 조용해졌다.
“근데 우리가 그걸 왜 해야 하는 거지? 보상도 없잖아.”
구석에서 이어폰을 한쪽만 꽂은 남학생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을 보탰다.
회장이 한숨을 내쉰다.
“너네는 우리 학교 학생 아니야? 어차피 같이 쓸 거, 편리하면 서로 좋잖아.”
상식적인 얘기였지만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우린 안 불편한데? 어차피 세탁은 3주에 한번 하고.”
“깔끔하네. 나는 한 달에 한 번인데.”
“나는 집에 갈 때 다 가져가.”
준기가 결국 손을 들었다.
“좋아, 조건을 말해봐. 들어줄 수 있는 걸로.”
말이 끝나자마자 요청이 빗발쳤다.
“무조건 예산이지. 컴퓨터 새삥으로 바꿔줘.”
“와이파이 교내 전역으로 확대.”
“우리 동아리 이름이 각인된 점퍼 만들어줘.”
민도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속삭인다.
“이건 그냥 욕망 청원 수준인데요?”
준기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가능한 게 하나도 없네. 대신 이러면 어떨까?
학생회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시 너희는 동아리 감사를 받는 거야. 그동안 타 먹은 예산이랑 실적을 비교해서 이 동아리가 과연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 철저하게 파헤쳐줄게. 더불어 환경 위생 평가도 같이 받자.”
동아리방에 침묵이 감돈다.
비트 포지의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모두에게 눈짓을 보냈다.
“뭐···. 선배들이 만든 코드를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우린 언제나 학생회를 존중해왔습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준기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우리가 원하는 조건은 간단해.”
회장이 보드를 끌어와 요구 조건을 적기 시작했다.
-세탁기 10대, 건조기 12대.
-야간 소음 제한 00 : 00 - 05 : 00
-우선순위 : 실험복, 동아리 단체 세탁, 장애 학생 가중치.
-공정성 확보.
-평균 대기시간 최소화, 동선 충돌 최소화, 세탁기 및 건조기 유휴시간 최소화.
비트 포지 회장인 연우가 보드를 보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회장, 우리가 앱은 뚝딱 만들 수 있어. 그런데 저 추천 엔진, 진짜 지옥인 거는 알고 있어?”
“왜?”
말이 짧던 여학생이 대뜸 대화에 끼어들었다.
“불가능. 단순 앱 개발이 아님. 너무 많은 목표. 확률, 최적화, 공정성 문제, 수요 변동, 계절 효과.
논문감. 연구실 프로젝트 급 난도.”
“그래도 우린 대책이 필요해.”
화가 난듯한 회장의 모습에 연우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타협하자. 공정성만 지워줘. 그럼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 최대 효율로 기계만 돌리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 너라면 매번 밤늦게나 밥시간에만 추천이 뜨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
답답한 듯 연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대체 우리보고 어쩌라고!”
“가능하게 노력을 해보라는 거야. 교내 프로젝트로 인정해 줄 테니까. 적지 않은 예산이 나올 거야. 물론 수행 평가 점수도 받을 수 있고.”
머리에 피가 쏠리는지 연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자 보자 하니까! 세계를 다 뒤져봐라, 이걸 할 수 있는 고등학생이 있겠냐?”
흥분한 연우를 보며 여학생이 짧게 말한다.
“있음.”
““응?””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수학의 신, 오리좌라면 가능.”
여학생의 모니터 위에는 작은 오리 피규어가 붙어있었다.
* * *
서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말도 없이 자신을 에워쌌다. 그리고 끌려온 곳이 바로 이곳.
[비트 포지]
의자에 앉아있자 민망한 표정의 학생회장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세탁 알고리즘을 만드는데 제가 필요하단 말씀이죠?”
“바로 맞췄어. 제발 부탁할게. 이건 몇 년간 누적된 불만이라 그냥 넘어가면 학생회가 박살 날지도 몰라.
교내 프로젝트니까 2학기 정보 수행도 바로 만점 받을 수 있을 거야.”
준기가 두 손을 모으며 간곡히 부탁한다.
“근데 전 프로그래밍을 못하는데요?”
““에?””
서하의 천진한 표정을 보며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정보 과목이 개설되어 있기에 영재고 학생들은 대부분 입학 전에 코딩을 예습해 온다.
“혹시 지금 배울 수 있을까요?”
“당장 급한데 그게 되겠어?”
비트 포지 회장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서하가 수학적 규칙을 정하고 자신들이 전체적인 코드를 짜면 일은 진행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가능. 책 여기.”
나리가 어디선가 가이드북을 가져와 그에게 건넨다.
‘지금 줘서 어쩌려고?’
평소에도 충분히 이상한 캐릭터였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나리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동급생. 반말 좋음.”
“응!”
서하가 책을 받아 들었다.
이상하게 말이 잘 통하는 둘을 보며 준기와 연우는 새삼 자신들이 늙었음을 자각했다.
[파이썬, 입문부터 심화까지]
“제목부터 겁나네. 그냥 입문서는 없냐?”
준기의 말에 나리가 어깨를 으쓱한다.
“이게 제일 위에 있었음.”
서하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다.
첫 장에서 함수의 스코프, 이터레이터, 제너레이터 같은 낯선 단어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서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간다.
책 속의 단어들은 낯설었지만, 그 구조는 서하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스코프는 증명의 가정과 결론의 경계, 이터레이터는 귀납법, 제너레이터는 무한 수열.’
코드는 그저 새로운 기호에 불과했다. 그 안의 원리는 서하의 몸에 이미 새겨진 수학적 논리.
서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란 결국 논리와 규칙의 집합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하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학에서 다루던 무형의 논리가 이제는 코드라는 형식을 통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났다.
자리를 비우기 애매해진 이들은 각자가 할 일을 하며 서하를 기다렸다.
서하가 책을 덮는다.
“다음 주에 다시 와도 괜찮죠? 몇 가지 조사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전문가용 교본을 두 시간 만에 독파했다.
‘설마 벌써 그걸 다 이해한 건가?’
동아리방에 있는 모두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는 곧장 도서관에 가서 정보과학 섹션으로 향했다.
‘근사한 언어였어.’
프로그래밍을 이해하고 나니 세탁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 것 같았다.
[운영체계와 스케줄링]
[컴퓨터 네트워크]
[게임 이론과 알고리즘적 설계]
기숙사로 돌아온 서하는 책과 노트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노트북을 켰다.
위잉ㅡ.
“자, 한번 해보자.”
타닥, 타닥.
먼저 전체적인 틀을 잡는다.
어떤 수학 이론을 써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타닥, 타닥.
밤이 깊어질수록 화면의 코드도 길어진다.
‘또 뭐가 필요하지?’
책에서 보았던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앱에 적용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동시에 예약을 눌렀을 때 충돌을 막는 랜덤 지연 시뮬레이션, 고스트 호출을 흉내 내는 즉시 응답 이벤트 처리.
‘보상을 주자.’
크레딧을 주고받으며 학생들의 선택을 컨트롤링 하는 간단한 보상 모델까지.
대략적인 설계를 끝낸 후, 서하는 행복한 얼굴로 잠을 청했다.
* * *
일주일 후,
서하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타다다다타다다다탁ㅡ.
눈앞에서 코드가 폭풍처럼 쏟아진다.
고3이지만 코딩 5년 차.
대회 입상 경력 다수.
연우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일주일 전에 처음 파이썬을 배웠는데.’
서하의 손이 노트북 위에서 신들린 듯 춤을 춘다.
끼익ㅡ.
“준비 됐어?”
회장이 들어오자 서하가 의자를 뒤로 돌렸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 드릴게요.”
회장과 부회장이 급히 노트를 꺼내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완벽한 공정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크게 손해보지 않는 상태, 수학적으로는 EF1(Envy-Freeness up to one item)이라고 부르는 수준까지는 만들 수 있어요.”
“이 에프 원?”
서하가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준다.
그래프와 표가 빼곡히 차 있는 시뮬레이션 결과였다.
“네, 한 사람이 한 번만 양보하면 질투가 사라지는 상태를 말해요. 다시 말해, 장기적으로는 모두가 비슷한 기회를 얻게 만들 수 있어요. 물론 기계도 거의 최대 효율로 돌릴 수 있고요.”
연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그게 시스템적으로 구현 가능하다고?”
분명히 논문을 써야 할 만큼 어려운 과제라고 들었는데 눈앞의 아이는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공정성은 확률적 가중치와 보상 구조로 맞추면 됩니다. 이 둘을 합치면 효율성과 공정성을 모두 잡을 수 있어요.”
연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EF1을 고작 세탁실에서 구현하겠다고?”
이어폰을 꽂고 있던 학생도 몸을 일으켰다.
“이게 가능하면 프로그래밍 대회에 나가도 대상은 거져먹기 수준인데.”
“매우 어렵지만 가능. 현실성 있음. 다만 극한의 수학능력 필요.”
나리가 만족한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본다.
백준기와 민도현은 서하가 준비한 시뮬레이션 그래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동시에 돌아가며 대기열이 줄어든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불공정 지표가 점점 사라지다 결국 아주 낮은 선에서 안정되었다.
“대기시간이 35%나 줄어든다는데요?”
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역시 수학의 신.”
나리가 으스대듯 말했다.
서하가 기본 알고리즘 설계를 마치자 개발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비트 포지 동아리방에 화이트보드 두 장이 더 들어왔다.
연우가 PM(Project Manager)을 자처했고 준기와 도현도 이해관계자로 회의에 참석했다.
비트 포지는 전시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이트보드마다 화살표와 동그라미, 그리고 굵게 강조된 키워드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알고리즘 설계, 시뮬레이션 → 서하]
[동시성 처리 → 종욱 팀]
[UI/UX → 나리 팀]
[테스트 → 도현, 준기 피드백]
연우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듯 보드에 역할을 수북이 적어나간다.
“이번 주는 뼈대를 세우는데 집중하자. 기능 하나하나가 제대로 돌아가는걸 목표로 하는 거야.”
개발은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굴러갔다.
보통의 프로젝트라면 기획과 구현 사이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하가 이미 모든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트 포지는 머릿속에 명확한 앱의 이미지와 로드맵을 가지고 개발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동시 세 명이 눌렀을 때 충돌 없음, 확인했어요.”
“알림 예약 성공. 배터리 절약 모드에서는 한 번 튕김.”
서하는 기존 앱의 복잡한 UI를 딱 두 개의 버튼으로 바꾸었다.
‘가장 빠른 예약, 가장 공정한 예약.’
개발 3일 차,
화이트보드의 역할 표에 체크 표시가 하나씩 늘어난다.
“동시성 시나리오 1차 통과 했어. 알림 안정화는?”
그때 종욱이 귀에 있던 이어폰을 빼고는 손을 들었다.
“20명이 눌렀더니 두 명한테 동시에 ‘예약 확정’이 떴어.”
방 안이 얼어 붙었다.
버그를 잡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투자해야 할까?
하지만 이곳에는 서하가 있었다.
그가 말 없이 모니터로 다가가더니 로그를 훑는다. 화면이 휙휙 지나간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로그를 읽던 서하가 원인을 발견했다.
“서버는 한 명만 확정했네요. 그런데 폰 두 개가 동시에 성공 토스트를 띄웠어요. 클라이언트 쪽 로직이 서버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옵티미스틱 업데이트를 해버린 거죠.”
연우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인다.
“자..잠깐만! 방금 로그 읽은 거 맞아? 디버깅 툴로 한참 잡아야 보일 텐데···.”
버그가 발생하면 개발자는 본능적으로 해당 문제를 재현해 보려 한다.
그런 후에 디버깅 툴을 붙여 검사해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냥 로그만 보고?’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서하가 왜 그러냐는 듯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본다.
문제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수학처럼 맨땅에 헤딩하는 것도 아닌 로그라는 증거가 남아있는데.
서하가 코드를 고치자 버그가 즉시 사라졌다.
“나 컴공 가지 말까.”
종욱이 멍하니 혼잣말한다.
개발 경력 일주일 차인 아이에게 뒤처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괜찮음. 저런 사람 또 없음.”
종욱은 나리의 건방진 말이 평소와는 다르게 꽤 위로가 된다는 걸 인정했다.
밤이 깊었지만 동아리방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다.
“야, 로그 보정 끝났다!”
“UI 수정 반영 완료.”
“테스트 케이스 돌립니다.”
키보드 소리, 팬 돌아가는 소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
‘웃음?’
연우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생각한다.
본래 개발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보통이라면 버그 하나를 잡고 모두가 지쳐있거나 서로 책임을 미루며 날카로운 말이 오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야말로 일사천리, 모든 일정이 타임라인에 맞춰 정확히 굴러가고 있다.
눈앞에서 서하가 또 화이트보드에 수식을 적고 있다.
그 단순한 곡선과 수식 몇 개가 치명적인 문제조차 한순간에 정리해 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연우의 얼굴에 잠시 자괴감이 스친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뭘 의심한 거지. 4색 정리를 증명한 천재가 코드 논리를 다루지 못할 리 없잖아.’
동아리방에 울려 퍼지는 키보드 소리가 다시 한번 활기를 띠었다.
* * *
“나리야, UI 꼭 이걸로 해야겠니?”
연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우스만 움직인다.
화면 위에는 노란색 오리 아이콘이 떠 있었다.
둥글둥글한 벡터 드로잉으로 단순하지만 시선이 가는 디자인이었다. 눈은 점 두 개로만 표현되어 있었는데 커서를 올리면 ‘깜빡’하고 깨어나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된다.
연우가 예약 버튼을 누르자 오리가 날개를 퍼덕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효과음.
“어···. 나리야 귀여운 건 알겠는데 학생회 앱이잖니.”
“이게 좋음. 브랜드 아이텐티티.”
연우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럼 소리만이라도 평범하게 하면 안될까? 이건 너무 가벼워 보일 수 있어.”
“안됨. 예약 축하 전용 사운드.”
준기가 두 사람을 중재하고 나섰다.
“나는 괜찮은 것 같아. 학생들이 앱을 좋아하는 게 중요하잖아. 귀엽게 만들면 애들도 많이 쓰겠지.”
부회장인 민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좋다고 생각해요. 학생회 앱이라고 꼭 관공서처럼 만들 필요는 없겠죠.”
긍정적인 반응에 신이 난 나리는 한가지 애니메이션을 추가했다.
‘세탁 완료’ 알림을 누르자 노란 오리가 커다란 빨래 바구니 옆에 나타난다. 곧이어 부리로 세탁물을 집어 들더니 작은 다리를 총총 움직여 건조기 쪽으로 옮겨다 놓는다.
“이제 완벽.”
나리가 의자를 홱 돌리더니 모두를 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 * *
버그는 모두 잡혔고 UI도 자리를 잡았다.
테스트 케이스까지 모두 초록 불.
화이트보드의 체크박스에는 단 하나의 리스트만이 남아있었다.
[오픈 베타 서비스]
“좋아, 이제 베타로 돌리자.”
내부 알파버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석 대로라면 지원자를 받아 클로즈드 베타를 돌려야 하겠지만 방 안에 있는 모두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치명적인 버그들은 모두 잡혔고 테스트 케이스도 전부 통과했다. 시뮬레이션 데이터 역시 안정적인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준기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소문이 파다해. 다들 기대하고 있을걸? 그냥 바로 돌려보자.”
연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백업 플랜도 준비해놨어.”
서하는 자신이 설계한 앱이 세상에 풀린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연우가 마우스를 움직여 최종 빌드를 서버에 올린다.
배포 버튼을 누르기 전, 방 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하가 하자. 이 앱의 아키텍트는 네 거니까.”
연우가 버튼 위에서 손을 거두었다.
“오! 설계자한테 양보? 부장, 로맨티시스트였네!”
“나도 찬성!”
“그럼 제가 할게요.”
서하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우스를 잡았다.
딸깍ㅡ.
배포 버튼이 눌린 순간 화면 상단의 상태 바가 천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Deploying build···.]
연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학교 세탁기 예약에 이 정도 앱을 쓰다니. 과하다, 너무 과분해.”
서하를 제외한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다.
학생회에서 미리 공지를 내린 탓인지 다운로드 수가 순식간에 솟아 올랐다.
“이십 명 돌파.”
“칠십 명.”
“오, 백 명 넘었다.”
서하는 차분히 화면을 들여다보며 로그를 확인했다.
예상한 대로 트래픽은 안정적으로 분산되고 있다. 설계해 둔 모든 구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서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 *
익명 게시판,
[세탁 앱, 학생회에서 만든 거 맞아?]
-퀄리티가 너무 높은데? 설마 전문 업체에 외주라도 준 건가?
└학생회에서 공지했어. 크레딧에도 비트 포지 & 유서하라고 적혀있음.
└알고리즘 설계는 다 오리좌가 했다는데.
└둔하기는ㅋㅋ 애니메이션을 보니까 나는 감이 딱 오더라.
└그러네. 나도 모르게 학교 마스코트처럼 받아들여 버렸어ㅋㅋㅋ
└매일 세탁하는데 전보다 훨씬 쾌적해졌어. 추천도 두 가지 중 하나만 고르면 돼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예약 성공할 때 꽥 소리ㅋㅋㅋㅋ
└실패는 ‘꽥?’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날개 파닥거리는 것도 귀여움ㅋㅋ
학생들은 세탁 앱을 ‘꽥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 나 빨래 해야 해. 꽥꽥이 잠시 확인 좀.”
“넌 크레딧 얼마냐?”
기숙사 곳곳에서 ‘꽥꽥’ 소리가 들려오자, 지나가던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앱이 배포된 지 일주일,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터졌다.
어느 순간부터 세탁기 가동률이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탁기가 텅 비어 있는데도 저녁 인기 시간대를 특정 집단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서하는 처음 그 숫자를 보고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모두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가정 한다면 일어 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서하는 곧바로 서버 로그를 열어보았다.
[19 : 00 - 21 : 00 예약성공 → A동 3층 그룹]
[취소 로그 다수 발생 → 동일 사용자 반복]
[크레딧 +1 적립]
연속된 기록에서 뚜렷한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예약을 잡았다가 취소하고 그 빈자리를 같은 그룹의 다른 사람이 다시 잡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었다. 피크 타임 양보는 크레딧을 얻을 수 있었으니.
“···.”
서하는 손가락을 멈췄다.
알고리즘은 완벽했다.
양보하면 보상, 지각하면 패널티. 공정성을 위한 규칙이다.
하지만 그 규칙이 일부 학생들에게 게임처럼 소비되고 있었다. 그들에게 양보는 배려가 아니라 점수를 채굴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연우가 다가와 화면을 들여다본다.
“집단으로 돌려 먹고 있네. 서로 취소 찍고 크레딧을 쌓아서 황금 시간대를 독점하는 거지.”
“시스템을 단순화 하려고 취소를 양보라고 정의했어요. 수학적으로는 차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현실에선 그게 농사가 되지.”
서하는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의 수학적 모델은 모든 인간이 공리를 위해 합리적 행동을 한다는 전제하에 세워졌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사익을 위해 시스템을 기만한다.
타닥, 타닥.
시무룩한 표정으로 코드를 수정하는 서하를 보며 연우가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긁는다.
“너무 실망하진 말자. 시스템을 지키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서하가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시스템에 인간의 욕망이 개입할 여지를 주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연우는 서하가 그런 것들을 조금은 늦게 깨달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 * *
불 꺼진 방 안,
모니터 불빛이 서하의 얼굴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다.
서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이진수의 낙하를 보고있었다.
무한한 비트의 행렬이 서하의 머릿속에서 숫자와 기호로 변환되어 간다.
검은 화면 위에 떨어지는 0과 1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어느 순간에 좌표가 되고 그래프와 함수로 바뀐다.
남들 눈에는 무의미해 보였을 숫자들이 서하의 의식 안에서 구조를 얻었다. 그리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서하가 화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돌아왔구나, 더키.”
쏟아지는 비트의 파도가 잠들어있던 더키를 흔들어 깨웠다.
화면 위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0과 1.
서하는 왜 이토록 단순한 기호들에 마음을 빼앗기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열림과 닫힘.
단 두 가지 상태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복잡함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일까.
수학은 무한을 다루지만 2진수는 그것을 가장 단순한 조각으로 쪼개버린다.
부정과 긍정, 부재와 존재.
세상은 끝없는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은 두 개의 기호로 압축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키는 2진수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구조와 상성이 좋았다.
기계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고안된 이 불편한 체계를 그는 자연스러운 언어로 받아들인다.
더키가 원한다면 더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속삭였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해볼게.”
반복적인 취소에 페널티를 부여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서하는 그런 일차원적인 해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닥, 타닥.
서하의 머릿속에 과거 세탁실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실험 지금 끝난 거야?”
“응, 데이터가 이상하게 나와서 계속하다 보니까 오래 걸렸어.”
“너 곧 죽겠다. 야! 세탁기 내가 잡아 놨거든? 먼저 해. 나는 내일 해도 되니까.”
이 학교의 학생들은 실험 때문에 늦게 돌아온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곤 했었다. 서하는 그런 선한 학생들이 페널티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취소는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게 하자.”
이것만으로도 어뷰징의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 그리고 보상은 3자가 실제로 혜택을 보았을 때만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편했다.
‘그래도 어뷰져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 좀···.’
서하는 그들을 위한 맞춤형 알고리즘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간다.
수학 이론이 현실에 적용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됐다.”
모니터에 새로운 그래프와 수식이 차례로 나타났다. 거기에는 기존과는 다른 곡선이 파란색으로 덧그려져 있었다.
이제는 변한 조건에서의 상황을 지켜볼 차례였다.
* * *
서하가 주도한 패치는 즉각적인 효과가 있었다.
어뷰징이 줄어들고 세탁 앱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학생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이 늘기 시작했다.
이제 예전처럼 바구니가 복도까지 늘어서거나, 세탁물을 가져가지 않은 학생을 기다리며 짜증을 내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비트 포지 동아리방,
개발자들과 학생회가 회의를 위해 모였다.
로그를 돌려본 연우와 준기가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저번 주보다 가동률이 훨씬 높아졌네. 컴플레인도 거의 없어.”
“학생회에도 고맙다는 메시지가 많이 오더라.”
컴플레인 지옥에서 해방된 준기와 도현은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도 익명 게시판에는 ‘꽥꽥이’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종욱이 그래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빨간색으로 표시되던 불공정 지표는 크게 완화되었고, 초록색 곡선이 부드럽게 안정화 되어있었다.
“이게 되네. 나는 예약 취소에 페널티를 줘야 한다는 쪽이었는데.”
연우가 피식 웃었다.
“기껏해야 세탁이야. 애초에 리턴이 크지 않은데 농사마저 어려워지니 별수 있나. 게임 접은거지.”
어뷰져를 위한 패치가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것은 순수하게 리턴의 제약으로 인한 결과였다.
서하는 시스템의 작은 변동이 인간의 행동을 이토록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쩌면 인간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그저 효율적으로 이기심을 채우고자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형 플랫폼은 시스템을 조정하는 것으로 인간을 쉽게 통제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서하는 이쯤에서 앱 개발을 마치기로 했다.
“베타는 이제 끝내도 되겠네요.”
같은 생각인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가 노트북을 닫자 동아리방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수고 많았어. 덕분에 좋은 앱을 만들 수 있었어.”
준기가 일어나 서하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야말로 프로그래밍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교내 프로젝트 결과 발표가 나면 수행 점수도 공식적으로 확인 할 수 있을 거야.”
준기가 걱정 말라는 듯 서하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 혹시 또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쩌죠? 이제 서하도 없는데.”
부회장인 민도현은 아직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하가 고개를 젓는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요. 알고리즘에 양심 지표를 추가했거든요.”
처음 듣는 얘기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게 뭔데?”
“취소가 일어났을 때 누가 이득을 보았는지 추적하는 지표를 도입했어요.
확률 분포 함수인데 수학에서는 샤논 엔트로피(Shannon Entropy)라고 해요. 이걸로 어뷰징을 99.9% 걸러낼 수 있어요.”
서하는 더 이상 시스템에 인간의 욕심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게 가능해?”
“엔트로피라는 건 쉽게 말하면 데이터가 얼마나 고르게 분산되었는가를 측정하는 값이에요.
예를 들어 수십 명이 번갈아 가며 혜택을 받으면 엔트로피 값이 높게 나오고 특정 서너 명만 이득을 보면 값이 확 떨어지는 거죠.”
서하가 보드를 가져와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자 도현이 겨우 이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양보가 다수에게 혜택이 가지 않으면 시스템이 감지한다는 거지?”
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마땅히 배려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제외했고요.
앞으로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람은 우선순위에서 뒤처지게 될 거예요. 반대로 시스템을 잘 따른다면 점차 회복될 테니 영구적인 것은 아닙니다.”
대체 언제 이렇게 복잡한 알고리즘을 추가한 것일까?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보았다.
“저···. 서하야!”
연우가 말을 꺼내려다 말고 우물쭈물한다.
그는 비트 포지에 서하를 간절히 영입하고 싶었지만 함께 해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다.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이미 거의 없었기에.
“···고맙다!”
결국 연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짧고 평범한 인사였다. 하지만 서하는 그의 눈빛에서 여러 감정을 읽었다.
서하가 환하게 웃는다.
“저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되죠?”
““언제든지!””
서하를 보는 그들의 눈에 애정이 가득하다.
벌써 정이 들었는지 나리는 빨개진 눈으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네.’
서하가 짐을 챙겨 일어난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다는 것에 만족했다.
노트북을 들고 기숙사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목발을 짚고 가는 학생이 보였다.
서하는 준기가 주었던 세탁 우선순위 학생 명단을 떠올렸다.
‘이진주 선배.’
어렸을 때 큰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다.
그녀는 지금도 목발이 없으면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선배님.”
서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어? 유서하! 유명인을 만났네?”
한 손으로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구김 없이 환한 표정이었다.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서하가 무거워 보이는 그녀의 가방을 바라본다. 하지만 진주가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 의사가 이 다리는 평생 회복되지 않을 거라고 했거든.”
“네?”
서하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주가 담담하게 웃는다.
“불편하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해. 그러니까 도움에 익숙해지면 안 되겠지?”
서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많이 편해졌어.”
“어떤 점이요?”
“꽥꽥이 말이야. 전에는 내가 빨래를 하려고 하면 친구들이 몇 명씩 나왔었거든. 옛날에 세탁실 가다가 한번 넘어져서 다쳤었는데 걔들은 그게 마음에 걸렸나 봐. 싫다는데도 억지로 친구들이 바구니를 들어주거나 세탁기도 양보해 주고 그랬어.”
“그게 달라졌나요?”
“응, 예전엔 미안한 마음에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했거든. 근데 이제는 예약만 하면 바로 되니까 부담도 없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바로?’
장애우 학생의 우선순위가 높다고 해도 기존 예약을 캔슬할 수는 없다.
아마도 여전히 그녀의 세탁 시간에 맞춰 예약 취소를 눌러주는 친구가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그냥 고맙단 말이 하고 싶었어. 네가 우리 학교에 와서 정말 다행이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천천히 기숙사 쪽으로 멀어져갔다.
서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한 친구를 돕겠다는 친구들, 그게 미안해서 또 굳이 새벽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는 학생.
무거운 가방을 든 채 씩씩하게 목발을 짚고 걷는 진주의 뒷모습은 서하에게 강한 여운을 남겼다. 어뷰져들로 인해 어지럽던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네가 우리 학교에 와서 정말 다행이다.’
그저 상투적인 감사의 표현이었지만 서하는 그녀의 말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알고리즘이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서하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책상 위에는 축구 팀 멤버들이 나눠 준 과자와 음료가 놓여있었다.
화면 속 커서가 깜빡인다.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겠지.”
검색창에 ‘코드 공유’를 입력하자 수많은 결과가 쏟아졌다. 서하는 그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을 골랐다.
GitHub.
누구나 자신의 소스코드를 올릴 수 있고 모든 이가 이를 자유롭게 수정,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
‘이름을 뭐로 하지?’
서하가 책상 위에 놓인 오리 피규어로 시선을 옮긴다.
2진수를 좋아하는 자신 안의 한 조각.
“그래 너로 하자.”
Duckie.
회원 가입을 끝내고 코드를 업로드한다.
설명란에는 짧은 소개를 적었다.
[학생들의 공정한 세탁실 사용을 위한 알고리즘, Quack Quack!]
[리턴 구조 최적화, 양심 지표.]
[누구든 참고하고 개선할 수 있습니다.]
타닥, 타닥.
수천 줄의 코드가 커밋되었다.
푸른 진행 바가 천천히 차오르더니 완료 표시가 나왔다.
“됐다.”
서하는 화면 속에 공개된 자신의 첫 프로젝트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서하는 눈을 비비며 노트북을 켰다.
“이게 뭐야?”
깃허브 알림창에 메시지 숫자가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Stars(북마크) ★ 1.2k]
[Forks(퍼감) 340]
[Issues(토론) 57 Open]
[Pull Requests(제안) 23]
하룻밤 사이, 평범한 개인이 올린 작은 프로젝트가 전 세계 개발자들의 손에 들려있었다.
심지어 유명한 오픈소스의 개발자조차 서하의 계정에 별을 찍었다.
└거기 어딥니까? 대체 어떤 학교에서 세탁실 예약에 이런 앱을 만들어요?
└코드 읽다가 울었음. 내 10년의 커리어는 대체 뭐였던 거지?
└이건 라이선스 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러스트로 다시 쓸까 했다가 파이썬 코드 품질보고 조용히 닫음.
└EF1, 샤논 엔트로피를 세탁실에 써먹네ㅋㅋㅋ
└확률, 최적화, 공정성, 자원 할당 문제를 전부 해결해 버렸어. 진짜 대단한데?
서하의 코드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단 하루 만에 해외 개발자 포럼과 SNS에는 ‘꽥꽥 알고리즘’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개발자 더키의 이름도 함께 언급되기 시작했다.
수정은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호텔의 이름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힐베르트 호텔(Hilbert’s Hotel)?”
머릿속이 안개처럼 흐려서 어디서 봤는지 좀처럼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일단 가보자.”
19세기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수트케이스를 끌며 리셉션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카운터에는 ‘No vacancy(빈방 없음)’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아···. 방이 없네.”
실망한 그녀에게 호텔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레이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무한 호텔이거든요.”
“네? 그럼 저건 뭐죠?”
수정이 카운터 위의 ‘빈방 없음’ 팻말을 가리킨다.
“아하! 손님이 가득 찬 상태이긴 하지만 레이디를 위해 특별히 빈방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수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요?”
“1번 방 손님을 2번 방으로, 2번 방 손님을 3번 방으로···. 이렇게 무한히 손님을 이동시키면 1번 방이 비게 되겠지요. 그곳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수정이 멍하게 있는 사이, 단체 손님이 들어왔다. 버스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카운터로 다가온다.
“이보시오. 우리는 무한 버스 회사인데, 우리 승객들이 여기서 묵을 수 있겠소?”
“문제 없습니다.”
“무한 버스회사 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는 승객도 무한대라오.”
직원은 빙긋 웃으며 손에 쥔 만년필로 장부를 두드린다.
“저희는 무한 호텔입니다.
호텔의 모든 손님을 짝수 번호 방으로 옮기면 홀수 방이 전부 비게 됩니다. 따라서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없이 투숙하실 수 있지요”
수정은 이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무한이면 그냥 빈방 아무 데나 들어가면 되잖아요!”
직원이 수정을 빤히 바라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디, 제가 처음부터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호텔에는 빈방이 없다고. 멋대로 들어가시면···.”
그가 어느새 다가와 수정의 귀에 속삭였다.
“···방에서 누굴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꺄아아아아악ㅡ.
수정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
서하는 수정과 함께 도넛을 먹는 중이었다.
그녀의 실감 나는 연기에 카페테리아의 직원들까지 힐끔거리며 이곳을 훔쳐보고 있다.
“그런 꿈을 꿨다고요?”
수정이 목이 타는지 물을 한 잔 들이켠다.
“그래, 자기 전에 힐베르트 무한 호텔의 역설(Hilbert's Paradox of the Grand Hotel)을 읽었더니 꿈에서 나왔어.”
객실이 무한한 호텔이라면 설령 손님이 가득 차 있다 해도 집합을 나누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빈방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힐베르트의 역설이었다.
“재미있는걸 읽고 계셨네요. 갑자기 힐베르트는 왜요?”
수정이 컵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 멘토링이 있어. 중학생한테 가산 무한이랑 일대일대응을 설명해달라고 부탁받았거든.”
“아하! 좋은 생각이에요. 힐베르트의 역설을 이용하면 그걸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겠네요."
자연수 집합 1, 2, 3, 4, 5···.
유리수 집합 1/2, 2/3, 1/4···.
얼핏 보면 1과 2 사이에 유리수가 무한히 끼어 있으니 자연수보다 훨씬 많아 보이지만, 수학에서는 집합의 크기를 카디널리티(Cardinality * 기수)로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냐의 여부다.
힐베르트의 호텔이 보여주듯, 가산 무한에서는 자연수(객실)와 유리수(손님)도 서로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다.
부분이 전체와 같아지는 무한의 역설, 이는 매우 철학적이기에 인간의 직관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왜 너도 여기에 관심이 있니?”
서하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The Theory of the Riemann Zeta-Function]
수정이 책을 보더니 까무러칠 듯 놀랐다.
“리..리만 제타 함수? 설마 리만 가설을 풀고 싶은 거야?”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풀 생각이에요. 아직은 조사를 하는 단계지만요.”
리만 가설을 힐베르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무한히 많은 방을 가진 호텔이 있다. 하지만 힐베르트의 호텔과는 다르게 모든 방이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2, 3, 5, 7, 11, 13, 17, 19호실···.
오직 소수 번호가 붙은 방에만 손님이 들어가 있다.
얼핏 보면 손님들이 들어간 방의 위치는 제멋대로 흩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리만 가설은 이 ‘소수 손님’들의 배치는 무작위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수학적 리듬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리듬을 드러내는 열쇠가 바로 리만 제타 함수인 것이다.
“너도 소수에는 우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쪽? 그거 무규칙이라는 게 대세잖아.”
수정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소수는 많은 수학자들을 매료시킨 주제였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의 규칙성을 증명해 낼 수 없었다. 리만 가설을 증명한다 해도 소수의 분포를 정밀하게 예측 할 수 있을 뿐, 소수 하나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수의 배열에 정확한 규칙 따윈 없다는 게 다수 수학자들의 의견이죠. 그 무작위성이 오히려 소수의 본질이라고 말하니까요.”
그래서 소수를 ‘수학 속의 원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는 쪼갤 수 없고 어디서 나타날지도 알 수 없는 존재.
“하지만 리만 가설이 참이라면 무규칙성이라는 말은 애매하지 않아? 혼돈 속의 질서라고 할까?”
“법칙이라기 보다는 밀도와 흐름 정도를 예측하는 정도겠죠.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정말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서하가 진지한 것을 보고 수정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래? 나는 리만 가설이 굉장히 과대 평가된 이론이라 생각해. 그걸 푼다고 해서 현대 암호 체계는 무너지지 않아. 소수의 규칙은 여전히 알 수 없을 테고, 수론에서 약간의 진전은 있겠지만 대단한 수학적 발전이 예상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많은 수학자들을 파멸시켰기 때문에 전설처럼 여겨지는 게 아닐까?”
수정은 서하를 리만 가설에서 떼어놓고 싶었다.
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부 수학자들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서하에게는 반드시 이것을 풀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서하의 꿈.
그것은 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이른바 ‘Theory of Everything’, 만물의 이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그것은 과거 300년 동안 뉴턴 역학의 몫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시간의 상대성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아냈고 이를 증명한 이론을 발표한다.
그리고 현대의 학자들은 상대성 이론이 양자의 움직임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음 단계의 이론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끈 이론은 후보 중 하나였지만 증명이 불가능하다)
서하는 소수의 비밀이 단순한 정수론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믿었다.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에 숨어 있는 질서는 양자 세계의 혼돈, 즉 우주의 리듬과도 닮아 있었기 때문에.
'만약 뉴턴, 아인슈타인 너머의 이론이 있다면 그 단계의 시작은 필연적으로 리만 가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서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연구, 수정에게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었다.
“리만 가설을 증명하면 골드바흐 추측을 풀 수 있지 않을까요?”
수정이 한참 동안 말 없이 서하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떼었다.
“서하야. 부탁이야, 하지 마.”
수정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네가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라는 건 알아. 하지만 무한을 건드리는 건 수학만의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는 분명 인간의 직관을 파괴하는 무언가가 있어.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
리만 가설에 빠진다는 것은 커리어의 종결을 의미한다.(적어도 지금 까지는)
세상은 이것을 수학자들의 집념, 실패 그리고 끝없는 탐구 정신으로 미화하고 있지만 정작 그 안에 몸을 던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끝을 알 수 없는 미궁, 답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질문.
그것에 사로잡힌 수학자들은 길을 잃은 채 무한한 어둠 속에서 인생을 소모할 뿐이다.
남는 건 아마도 공허와 좌절뿐.
수정은 서하가 끝없는 수학의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릴까 무서웠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요. 지금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순 없지만 저는 언젠간 반드시 소수의 비밀에 다가갈 생각이에요.”
수정은 눈을 감았다 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서하를 알고 있었다. 답을 찾을 때까지 그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길 끝에 아무것도 없으면?”
아직은 반례가 나오지 않았지만 리만의 가설은 어쩌면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사람이 되겠죠. 그걸로도 충분해요. 누군가는 그 낭떠러지를 직접 내려다봐야 하니까요.”
서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길을 가는 것은 운명이라 말하는 것처럼.
수정은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서하를 만난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를 돕기 위해서, 혹은 너무 늦지 않게 막던지···.
이런 재능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운명조차 바라지 않는 일일 테니까.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 같은 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사귄 친구, 수학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 준 은인.
그녀에게 있어 서하는 특별한 존재였다.
“아직 뭐라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에요. 다만 이걸 풀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 반드시 누나를 부를게요. 그때는 저를 도와주세요.”
수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대학에 가서 수학을 더 공부할 생각이었지만 구체적인 테마는 아직 정하지 않았었다.
‘수론(Number Theory)을 공부해야겠구나.’
이날 전까지는.
* * *
“오빠!”
멀리서 걸어오는 서하를 보자 서은이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참을 달리더니 서하의 품에 와락 뛰어든다.
서하가 환하게 웃으며 서은의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악ㅡ.
서은이 하늘을 날며 기뻐한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응! 오늘 온다고 했잖아. 계속 보고 있었어!”
서은이 오빠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집안으로 뛰어들 듯 들어갔다.
“엄마, 아빠! 오빠 왔어!”
집 안은 금세 환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서하는 동생의 공부를 봐주고 텃밭에서 함께 호박을 수확했다.
고기를 야무지게 먹은 서은이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더니, 이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철호가 조심스럽게 서은을 안아 올렸다.
“오빠 왔다고 신 내더니 벌써 자네.”
무슨 꿈을 꾸는지 곤히 잠든 서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서은이는 요즘 별일 없어요?”
미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작게 웃는다.
“전에는 너 따라서 수학자가 되겠다더니 요즘은 의사가 하고 싶다네?”
“갑자기요?”
“그건 아니고 너 문병 다녀온 뒤부터 그래. 오빠가 쓰러진 게 충격이었나 보지.”
그때를 생각하면 서하는 아직도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죄송해요.”
“알면 됐다. 다음에 또 그러지 않으면 돼.”
서하는 서은의 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성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은의 자질은 영재고 학생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곁에서 가르치면 된다.
남은 것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부모님은 괜찮다고 말하겠지만 공무원 수입에 의대 6년 학비는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닐 것이다.
우주의 비밀도 좋지만 가정의 평화 역시 중요하다.
서하는 동생이 대학에 가기 전까지 학비를 마련 할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다행히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서하의 머릿속에 돈을 벌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 이건 안 되겠다.’
그 중 어느 것도 나이의 제약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제 곧 14살,
보호자나 대리인의 명의 없이는 사업자는커녕 은행 계좌조차 열 수 없는 처지가 답답하기만 했다.
서하가 눈앞에 차려진 저녁상을 바라본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좋아하던 호박잎, 된장을 넣어 싸 먹으면 밥 외에 따로 든 것이 없어도 황홀한 맛이다.
호박잎은 촉촉하게 쪄내어 한 장씩 껍질을 벗겨야 하는 번거로운 재료다. 그 옆에도 손이 많이 가는 나물 반찬들이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고사리는 밤새 불리고 삶아낸 뒤에 들기름에 살살 볶아낸 것이었고, 도라지는 아삭하게 씹히도록 쓴맛을 빼느라 몇 번이나 물을 갈아가며 손질 했을 것이다.
서하는 젓가락질을 멈춘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거친 손과 허름한 옷차림,
빈말로도 유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하는 단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은 시간이 걸려도 아버지를 통해 결국 손에 들어왔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며칠 뒤 밥상에 꼭 올라오곤 했다.
부족한 형편 속에서도 부모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난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서하는 지금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말한다면 기특하다며 웃어주실까?’
아닐 것이다.
자신들이 부족해서 열심히 공부 해야 할 아들에게 괜한 짐을 지운 것이라 여기며 마음 아파하실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 혼자서 해보자.’
서은이 대학에 가는 시기는 최소한 10년 뒤일 테니까.
“엄마, 이거 정말 맛있어요.”
평소엔 그저 말없이 먹기만 하던 아들이 웬일로 칭찬까지 하자 미영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
“그렇지? 기숙사 밥보다 훨씬 맛있지?”
“네, 비교가 안 돼요.”
서하가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는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된장 향, 잘게 썬 고추가 톡 하고 터지며 남기는 자극. 익숙한 맛이었지만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밥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졌다.
* * *
서하는 오랜만에 대전에 있는 대형 서점에 와 있었다.
“와, 진짜 크네.”
컴퓨터 섹션에 들어서자 심리학 서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서하는 지난 밤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주식이나 코인 트레이딩은 가장 먼저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수학적 모델로 단기 예측에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리스크가 너무 큰 영역이었다.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앱 개발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서하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애플리케이션은 이미 존재하는 수요를 채워주는 도구일 뿐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만큼 서하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었다.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
세탁실 앱을 만들며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고, 때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타적이다.
이러한 인간의 복합적인 모순성이 서하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인간의 움직임은 마치 양자처럼 예외와 변칙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만약 이 불완전한 인간의 선택을 수학적으로 예측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선택이 만들어 낼 파동까지 계산할 수 있다면?
이는 불확실성 속의 규칙이라는 면에서 리만 가설과도 닮아있었다.
‘개인은 불확실하지만 집단은 패턴을 가진다.’
서하는 인간의 의사결정 자체를 엔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의 손에 다양한 책들이 잡힌다.
[강화학습과 의사결정]
[게임 이론의 실제]
[불확실성과 정보 이론]
[확률적 최적화와 마르코프 과정]
[인지과학과 인공지능]
[행동경제학]
비어있는 수트케이스에 책들이 가득 채워진다.
서하의 1차 목표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를 모델링하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세탁실 자원을 두고 경쟁하거나 협력하는 상황, 그 안에서 드러난 선택의 패턴은 이미 그에게 있어 흥미로운 데이터였다.
이제 영역을 넓혀 기숙사, 식당, 동아리 활동, 도서관과 자율학습실의 자리 배정, 그리고 시험 준비 전략과 여가 활동까지,
학생들이 매일 하는 크고 작은 결정들이 모두 훌륭한 연구 소재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이 모든 데이터를 수학적으로 모델링할 수 있다면 자신이 구상하는 의사결정 엔진의 뼈대를 학교 안에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범위를 넓혀 한 도시나 국가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언제 이동하고 어떤 소비를 하며 무슨 여가를 즐기는지.
교통 체계와 상권, 교육과 문화, 심지어 개개인의 정치적 선택 또한 모델링의 범위 안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란 결국 수많은 개인의 선택이 모여 이루어진 결과일 테니까.
그 패턴을 수학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도시의 혼란을 줄이고 자원의 낭비를 막으며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또한 조금은 더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13살의 서하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 * *
“준비 됐니?”
서하의 말에 서은이 팔짱을 끼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입술이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것이 귀여웠다.
“음···. 좋아!”
서하가 직접 만든 카드들을 쫙 펼쳐놓는다. 각 카드에는 숫자, 동물, 과일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만든 ‘메모리 챌린지’였다.
IMO 때 처음 해본 메모리 챌린지는 무척 재미있었다.
동생과 숫자와 도형만으로 놀아주는 것이 미안했던 서하는 직접 이것을 서은이 좋아할 만한 그림 카드로 새롭게 꾸몄다.
처음 이 놀이를 했을 때 서은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만을 골라 외웠다.
“딸기, 자두, 바나나, 키위···.”
하나씩 카드를 뒤집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서하는 카드를 만든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메모리 챌린지는 서은의 암기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 서하는 조금 엄격한 오빠가 되어보기로 했다.
“이번엔 과일만 외우면 안된다? 전부 다 기억하는 거야?”
“응! 알았어!”
새로운 놀이가 재미있는지 서은이 눈을 반짝이며 카드를 내려다본다.
10장의 카드가 바닥에 깔렸다.
“시작!”
카드를 뒤집자 서은의 눈동자가 빠르게 이동하며 그림을 훑는다.
30초가 지나자 서하가 카드를 뒤집었다.
“자! 이제 맞춰보자.”
기다렸다는 듯 서은이 손가락으로 카드를 차례로 가리킨다.
“사과, 토끼, 별, 오리, 바나나, 숫자 5, 해님, 딸기, 달님, 곰돌이!”
서하가 동생의 말에 맞춰 하나씩 카드를 뒤집자 서은이 읊은 대로의 그림이 정확히 나타났다.
“꺄아아앗!”
서은이 벌떡 일어나더니 기쁨의 춤을 춘다.
짧은 팔로 허공을 젓는 것이 마치 병아리 날갯짓을 흉내 내는 듯했다.
“내가 다 맞췄다ㅡ, 다 맞췄다ㅡ.”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서은은 생각보다 승부욕이 강하다.
“좋아, 이번엔 열다섯 장!”
“응!”
서하의 선언에 서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여지없이 15장을 모두 맞춰버렸다.
서하도 이 부분에서는 조금 놀랐다.
그림 카드는 트럼프 보다 외우기가 어렵다.
숫자 카드라면 쉽게 규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홀수, 짝수, 색깔, 무늬 같은 기준을 세우면 머릿속에서 정렬하기 용이하다.
하지만 카테고리가 있다고는 해도 서로 별 연관도 없는 이미지들로 패턴을 만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꺄하하하ㅡ.”
서은이 두 팔을 벌려 비행기 놀이를 하며 마루를 뛰어다닌다.
서하는 잠시 서은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놀아주려고 했는데 이건 꽤 진지한 훈련이 될 수도 있겠는걸?’
좋은 암기력은 외울 것이 많은 의사들에게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서하는 집에 올 때마다 카드의 개수를 늘려보기로 했다.
* * *
위이이이잉ㅡ.
도서관의 프린터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옆에는 이미 두툼한 논문 뭉치가 쌓여 있었다.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 분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리만 가설과 양자 혼돈 이론]
프린트가 나오는 대로 제목을 확인한 서하는 차곡차곡 그것들을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오늘만 20편,
앞으로 읽어야 할 논문이 대략 1만 편이나 남아있었다.
서하는 지금까지 나온 리만 가설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를 모두 검토해 보기로 했다. 하루에 열 편씩 읽어도 삼 년이 걸리는 장대한 작업.
하지만 서하는 이것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설렘에 가까운 감정.
수천 명의 수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남긴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그에게 있어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그의 독해 속도 덕분이었다.
아무리 복잡한 수식과 증명이 눈앞에 있어도 서하는 그것을 즉시 이해 할 수 있었다.
“크흠!”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서하가 뒤를 돌아본다.
“책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프린트야?”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 사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어휴! 전에는 책 가져다 놓느라 힘들었는데 이제는 잉크도 자주 갈아줘야겠네.”
서하는 멋쩍게 웃으며 프린트된 논문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항상 자신으로 인해 고생이 많은 사서였다.
“죄송해요. 필요한 것들이라서요.”
순간 화가 난 줄 알았던 그녀가 장난이라는 듯 금세 얼굴을 바꾸었다.
“걱정하지 마! 교장선생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셨거든.”
“네?”
“몰랐어? 서하 너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무조건 구해주라고 하셨는데.”
“아! 어쩐지···.”
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자신이 도서관에 요청한 책들은 결코 흔한 것들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국내에 몇 권 들어오지도 않은 희귀 원서도 있었다.
‘설마 이게 되겠어?’ 하고 요청했던 책들조차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으니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다.
“천만에! 우리 학교의 이름을 빛내준 천재인데 내가 영광이지.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줘.”
서하는 기분 좋게 도서관을 나섰다.
기숙사 방문을 닫자마자 무거운 책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와르르.
가방을 여니 프린트 한 논문 뭉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하얀 종이 위에 빼곡히 적인 수식과 그래프들이 방바닥에 가득하다.
서하는 책상 위 스탠드를 켜고 맨 위에 있는 논문을 집어 들었다.
[리만 제타 함수와 임계선 근처의 영점 분포]
보통 사람이라면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어려운 내용이겠지만 서하의 눈에는 흥미로운 이야기 책으로 보였다.
‘여긴 영점을 통계적으로 해석했네. 이 부분은 가우스 분포와 연결할 수도 있겠다.’
어느새 페이지가 끝났다. 서하가 곧바로 다음 논문을 집어 든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마다 노트를 펴고 단정한 필체로 그것을 적어나갔다.
열 번째 논문을 덮고 나서야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눈빛은 오히려 더 또렷해져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수학자들의 발자취가 어서 따라오라며 서하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안 돼요.”
리만 가설은 마라톤이다. 섣불리 스프린트를 결심하면 안된다. 하지만 서하는 여정이 아무리 길어도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책장에 놓인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를 바라본다.
“선생님, 당신이 만든 공식을 아직도 전 세계가 배우고 있어요. 제 이름도 언젠가 교과서에 남을 수 있을까요?”
뉴턴이 한번 열심히 해보라는 듯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키가 어서 빨리 디지털 세계로 들어가자며 아우성치고 있다.
이제는 ‘시냅스 엔진(Synapse Engine)’이라고 이름 붙인 프로젝트의 첫걸음을 내디딜 차례였다.